까만 밤을 포근하게 채워주는 아름다운 음악
MARK-ALMOND / NIGHTMUSIC
파란 하늘에 황혼이 스며들고 이내 어둠이 대기를 채우게 되면 계절의 향기를 간직한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이들의 분주한 발걸음이나 연인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마저도 잦아들 즈음이면 그 세계는 철저하게 내면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익숙한 듯하지만 문득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항상 낯설고 생소하게 다가오는, 무채색의 신비로움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 세계는 바로 밤이다.
많은 이들에게 밤은 꿈과 신비와 낭만으로 가득한 시간대이지만 사실 밤은 여러 모습을 지니고 있다. 밤의 어둠은 빛이 존재하지 않던 모태의 포근함과 안락함의 현현이요 눈부신 빛의 위력에 가려졌던 꿈이 살포시 눈을 뜨고 미소를 짓는 공간이다.
남성적인 힘이 소멸되는 대신 여성적인 힘과 모성이 모든 것을 감싸안는 시간이다. 보이지 않던 죽음이 눈을 뜸과 동시에 또 다른 생명이 잉태되고 고요함 속에서 의식은 진화한다.
많은 시인들과 화가들은 각기 자신들에게 투영된 밤의 이미지를 무시무시한 초자연적인 전율이나 치유할 수 없는 절망, 또는 새로운 날에의 희망과 꿈이 담긴 소망 등으로 표현해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밤의 영을 선율에 담아 아름답고 신비로운 음악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밤이 가지는 커다란 매력 중의 하나는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부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몸뚱이에 걸친 이 거추장스런 천 쪼가리들뿐만 아니라, 타인들 틈에서 그리고 밝은 태양 아래서 나약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겹겹이 둘러쌌던 장막들을 이 어둠 속에서는 모두 벗어버리고 순수해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밤이 좋다.
아침이 오면 사라지고 먼 이야기가 되어버릴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푸른 보석과 같은 별들을 보며 웃음 짓고는 눈을 감고 창공을 비행할 수 있는, 오디오의 스피커에서 흐르는 음악이 천구의 음악과 기막히게 조화되는 그런 밤이 좋다. 이런 영상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포근한 추억을 실어다 주는 향기로운 바람이 온 몸을 감싸오는, 보석과도 같은 서늘한 별빛이 하늘에 가득한 밤에, 아름다운 밤하늘에 공감하며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씩 들이키는 소박한 모습 말이다. 그때 절대 빠져선 안 될 것들이 있고 그 중 중요한 것은 단연 음악이다. 마음에 편안한 휴식을 가져다주고 밤의 낭만의 수치를 한껏 높일 수 있는 음악, 잔잔하게 쏟아지며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는 아름답고 포근한 선율들. 그것은 하나의 기쁨이다.
가슴에 휘감겨 오는 아름다움이다. 음악 안에 얼마나 커다란 기쁨이 들어있는지를 아는 이들에게 좋은 음악, 아름다운 음악은 어떤 보석보다도 소중하다. 보석 같은 음악. 흙 속에 묻히고 돌 틈에 가리워 빛을 받지 못하는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그 보석들 중에 여기 이 음악도 분명 포함이 된다.
마크 아몬드(Mark-Almond)라는 이 낯설지 않은 이름이 선사해주는 한없이 편안한 음악 말이다.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존 마크(Jon Mark)와 색소폰과 플루트 연주자인 자니 아몬드(Johnny Almond)의 만남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미들섹스주 태생인 존 마크는 1960년대 중반의 브리티시 록 신에서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해온 인물이다. 그는 마리안느 페이스풀(Marianne Faithful)의 여러 작품들에 작곡자와 편곡자로서 참여했고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투어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또한 이후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결성하게 되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던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Jimmy Page)와 함께 프로덕션을 운영한 경력도 가지고 있으며, 포크 가수인 앨런 데이비스(Alun Davies)와 더불어 스위트 서스데이(Sweet Thursday)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을 했다. 그가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1969년, 브리티시 블루스의 거장 존 메이욜(John Mayall)의 그룹 블루스 브레이커스(Blues Breakers)에 합류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이 밴드에서 주투 머니스 빅 롤 밴드(Zoot Money's Big Roll Band)와 앨런 프라이스 세트(Alan Price Set), 뮤직 머신(Music Machine) 등 여러 그룹들을 거친 자니 아몬드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서로가 추구하는 음악적 지향점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Turning Point]와 [Empty Rooms] 등 2장의 앨범에 참여한 이들은 결국 1970년 존 메이욜을 떠나 자신들의 이름을 내세운 그룹을 결성한다. 이들 둘 외에 베이시스트 로저 서튼(Roger Sutton)과 건반 연주자인 토미 에어(Tommy Eyre)가 밴드의 라인업을 완성했다.
1971년, 셀프 타이틀의 데뷔작을 발표한 마크 아몬드(또는 마크 아몬드 밴드)는 활발한 투어 활동을 통해 보여진 그들 특유의 세련되고 탁월한 연주력은 적지 않은 이들을 밴드의 골수팬으로 만들 정도가 되었다.
재즈의 감성을 바탕을 록과 포크, 그리고 실험적인 요소들에 이르는 다채롭고 신비로운 사운드로 특징 되는 밴드의 음악은 기존에 없던 독특한 것이었다. 다양한 레이블을 통한 꾸준한 앨범 발표, 그리고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가진 투어 등으로 이들은 70년대의 가장 인기 있는 언더그라운드 그룹의 하나가 되었다.
1973년, 밴드는 돌연 해산 상태에 들어갔고 존 마크가 사고로 손가락을 잃는 불운을 겪게 된다. 하지만 1975년, 그는 한없이 포근하고 감성적인 사운드로 가득한 솔로 앨범 [Songs For A Friend]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밴드의 재결성으로 이어졌고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반을 통해 여러 장의 탁월한 앨범들이 발매된다. 하지만 마크 아몬드는 상업성과는 무관한 팀이었다.
비록 어느 누구도 닿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에서 장인의 솜씨를 발휘했던 이들이지만 이들의 여러 앨범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고 결국 밴드는 80년대 초반 해산하고 만다.
하지만 밴드의 해체 후에도 존 마크의 활동은 계속된다. 1983년에 발표된 두 번째 솔로 앨범 [The Lady And The Artists]를 통해 편안히 들을 수 있는 나직한 저음의 목소리와 따뜻한 사운드를 선보였던 그는 이후 자신의 음악적 방향을 바꾸어 본격적인 뉴 에이지 뮤지션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80년대 말, 월드 투어를 마친 존 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곳의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이주를 했다. '길고 하얀 구름이 있는 땅'이라는 의미의 원주민어인 아오테아로아(Aotearoa)로 불리는 곳, 바로 뉴질랜드이다.
자연이 선사하는 최상의 아름다움과 고요함 속에서 명상가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던 그가 클라우스 헤이만(Klaus Heymann)이라는 인물을 만난 것은 1993년 초의 일이다. 유명한 클래식 레이블 "낙소스(Naxos)"와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사장인 클라우스 헤이만과 존 마크의 만남은 컨템퍼러리 성향의 뉴 에이지 음악을 지향하는 새로운 레이블 "화이트 클라우드(White Cloud)"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뉴질랜드에 본거지를 두고, 남태평양 지역의 탁월한 뮤지션들과 작곡가들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목표를 두는 "화이트 클라우드"의 이념은 존 마크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그는 여러 뮤지션들을 발굴해내에 지금까지 앰비언트와 재즈, 켈트 음악, 클래식, 그리고 월드뮤직 등 현대적인 것과 전통적인 요소들의 적절한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앨범들을 발매해왔다. 그 자신 또한 자신의 레이블을 통해 여러 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고갈되지 않는 창작력을 드러내고 있음은 물론이다.
1996년 발매된 이 앨범, [Nightmusic]은 그가 "화이트 클라우드"에서 작업을 한 세번째 작품으로, "화이트 클라우드"의 서브레이블인 "실버 라이닝(Silver Lining)"을 통해 발매된 첫 앨범이기도 하다. "[Nightmusic]은 내가 만들고 싶었던 노래들의 시리즈로 시작되었지만 이내 마크 아몬드의 앨범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존 마크의 이러한 언급은 앨범의 사운드를 통해 보다 확실하게 이해된다. 그가 하고자 하는 뉴 에이지나 명상음악의 요소들은 단순한 스타일에 머무르지 않고 이전에 마크 아몬드가 행했던 방법론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존 마크와 자니 아몬드의 사이에는 10년 이상의 긴 공백이 있었지만 둘의 재결합은 아주 자연스럽고 원숙한, 감미로우며 포근한 사운드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록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부담이 앨범 작업의 어려움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존 마크는 뉴질랜드에, 자니 아몬드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멤버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고 자신들이 의도했던 음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앨범은 전체적으로 존 마크 특유의 색깔을 잘 반영하고 있다.
나른한 감성을 실은 듯한 저음의 굵은 목소리가 이루어내는 편안함은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 라인가 부드러운 재즈의 향취와 더불어 전형적인 마크 아몬드의 색채를 이룬다. 하지만 밴드가 70년대에 했던 것과 같은 프리 재즈스타일의 실험적인 즉흥연주나 각 연주 파트의 보다 명확한 동시 전개 대신 앰비언트의 향취로 가득한 키보드 배킹에 탁월한 솔로 연주가 더해지는 식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은 남반구에서 최고로 인정되는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다. 존 마크와 더불어 몇몇 곡의 작곡에 참여한 뉴질랜드의 건반 연주자인 로버트 스미스(Robert Smith) 외에 재즈 피아니스트인 마이크 녹(Mike Nock), 기타리스트인 렉스 고(Rex Goh), 탄탄한 연주력으로 자니 아몬드를 뒷받침해주는 색소폰 주자 크레이그 월터스(Craig Walters)와 퍼커션 주자 수닐 드 실바(Sunil De Silva), 그리고 텁텁한 존 마크의 보컬에 신선한 감성을 더해주는 보컬리스트 더그 윌리엄스(Doug Williams)와 바네타 필즈(Vanetta Fields) 등이 사운드의 완성을 이루어준다.
대체로 긴 러닝타임을 지닌 대부분의 곡들은 지극히 시각적인 감흥을 선사한다. 더불어 앰비언트 음악 특유의 공간감은 여러 곡들에서 충분히 느껴진다.
물론 서로 엇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소지도 있지만, 뉴 에이지 음악이 지니는 효용성의 측면에서 이 작품들에 담긴 극도의 서정성과 풍부한 감정이 주는 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크 아몬드 밴드의 모든 역량이 담긴, 반복되는 주 선율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재즈 풍의 연주가 돋보이는 13분의 대곡 'Skyline'을 비롯하여 'Nightmusic', 'City Of Dreams' 등 고요한 관조 또는 명상 속의 미세한 울림과도 같은 감미로운 곡들이 앨범을 채워준다. 앨범의 타이틀처럼 일곱 곡의 수록곡들은 철저하게 밤을 위한 음악인 듯하다.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편안하게 앉아 그저 빠져들 수 있는 몇 안되는 포근한 음악, 존 마크와 마크 아몬드 밴드가 선사하는 흐뭇한 밤의 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 Black Bird On A White Sky
2. Nightmusic
3. City Of Dreams
4. Don't Go
5. Cruising
6. Skyline
7. Still Of The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