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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들 오브 필스를 능가하는 화려함 속에 내재된 공격적인 사운드, 현재 프랑스를 대표하는 어둠의 미학 예찬과 신 퇴폐주의 노선분자 애너렉시아 널보사의 최신 앨범 최초 라이센스화!
Anorexia Nervosa - [Redemption Process]
1983년 2월, 팝 듀오 카펜터스의 보컬 카렌 카펜터의 사망으로 인해 낯선 병명 하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Anorexia Nervosa (애너렉시아 널보사: [정신의학] 신경성 거식증). 무리한 다이어트 등으로 몸이 음식물의 섭취 기능을 상실하여 영양부족으로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다.
의사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휘갈겨 쓰는 처방전에나 나올 법한 단어가 20여년만에 부활하여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블랙메틀 팬들에겐 결코 낯설지 않은 5인조 밴드 Anorexia Nervosa가 국내에 처음 공개하는 4집 [Redemption Process]를 통해서 말이다.
- Background Of Anorexia..
19세기 프랑스 예술사회에서는 보들레르와 베를렌느라는 위대한 문학가의 영향권 하에서 로당바크, 모레아스 등이 주축이 된 전위운동이 있었다. 이른바 데카당(퇴폐파)의 움직임이라 하여 데카당스로 불리게 된 이 사조는 현실을 부정하고 인위성을 중시하며 추악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기이한 행태를 보였다. 세기말적이고 극단적인 행태로 숱한 화제와 비난의 중심에 섰던 데카당스는 탐미주의, 허무주의와도 연관성을 가지며 예술은 양지에서 뿐만 아니라 음지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구실을 했다. 이러한 예술사적 흐름의 한 챕터를 굳이 이야기 한 것은 애너렉시아 널보사(Anorexia Nervosa)가 바로 데카당스 정신을 음악적으로 변주해 냈다는 점 때문이다. 프랑스 태생에 퇴폐미학과 블랙메틀이라는 절묘한 장르의 매치는 그들에게 정통성과 독창성이라는 양 날개를 달아주었다.
아름답고 고급스런 표지와, 추악하고 더러운 이미지들로 가득한 내지로 일관하고 있는 음반의 외양, 앙칼진 스크리밍과 헤비니스의 틈바구니를 뚫고 스며드는 매혹적인 선율의 옴팡진 움직임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전하고 있다.
이따금 애너렉시아 널보사의 중기 사운드를 놓고 영국의 크래들 오브 필스(Cradle Of Filth)의 아류로 오인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부 유사한 음악적 장치를 모방으로 단정한 오판이다. 흡혈문화(?)와 바쏘리 백작 부인 등을 컨셉으로 뱀파이어 미학을 강조하는 크래들 오브 필스와, 앞에서도 밝힌 프랑스 퇴폐주의 노선의 후계자인 아노렉시아 널보사와는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노선에서부터 차이가 있는 것이다.
- History Of Anorexia..
1995년 6월 프랑스에서 결성된 애너렉시아 널보사(Anorexia Nervosa)는 Stefan Bayle (G), Marc Zabe (G), Pier Couquet (B), Nilcas Vant (Dr) and Stephane Gerbaud (V) 까지 5명의 구성원으로 출발했다. 그해 10월 데모 음반 [Nihil Negativum]가 1,200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으며 인지도를 넓혀 나갔다. 그로부터 2년후인 1997년, 드디어 대망의 데뷔앨범 [Exile]를 Season Of Mist를 통해 발표하게 된다. 보통 어설프고 치기어린 모습을 보여주기 마련인 데뷔작에서 그들은 기존의 사정없이 달려나가는 블랙메틀의 정공법 대신 복잡다단한 구성의 컨셉트 지향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며 2,000여장의 앨범을 팔아치웠다. 앨범활동과 더불어 블랙메틀 역사에서 빠짐없이 거론되는 인슬레이브드(Enslaved), 미산쓰로프(Misanthrope) 등과 조인트 콘서트를 갖기도 했다.
얼마 후 밴드는 한차례 위기를 맞게 되는데, 음악적 견해차를 보이면서 실험적인 노선을 갈구하던 Marc Zabe와 Stephane Gerbaud가 팀을 떠나고 만다. 교체 멤버로 Hreidmarr (V) et Neb Xort (Key)가 가입하는데 이때부터 현재까지 구성원이 유지되면서 바야흐로 애너렉시아 널보사(Anorexia Nervosa)표 사운드 메이킹 방식이 확립되었다.
이어 밴드는 적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던 Osmose Productions 레이블과 계약하며 한차례 발돋움을 하게 된다. EP [Sodomizing the Archedangel]이 99년 2월에 공개하고, 99년도 하반기를 이모틀(Immortal)의 공연 서포트 밴드로 활약하며 새 앨범 준비를 하던 그들은 2000년 봄에 녹음 스튜디오의 이름이기도 한 문제작 [Drudenhaus]를 발표한다. 프랑스 블랙 메틀을 한차원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받는 이 작품은 아직도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며 애너렉시아 널보사를 프랑스 뿐 아니라 전 유럽의 익스트림 팬들의 머리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집의 성공에 고무된 그들은 2001년에 [New Obscurantis Order]로 다시 팬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앨범이 거듭될수록 힘을 더해가는 강력한 사운드와 오래도록 잔상이 되어 남을 오케스트레이션의 적절한 활용에 근거를 두고 퇴폐미의 진수를 들려주며 다수의 고정 열혈팬을 확보한다.
3년간 별다른 음반 발표 없이 세월은 흐르고, 블랙메틀의 기세가 다소 약화되어 갈 무렵, 애너렉시아 널보사는 [Nihil Negativum] (Demo Album 95)와 [Garden Of Delight] (Demo Album 93), 2곡의
라이브와 1곡의 비디오 클립으로 구성된 팬 서비스용으로 999매 한정 제작한 [Suicide is Sexy]를 소규모 레이블인 Apokalyse Records에서 내놓으며 밴드의 건재함을 알린다. 그와 함께 정들었던 Osmose Productions 레이블을 떠나 Listenable Records - 이몰레이션(Immolation), 모스 프린시피움(Mors Prinsipium) 등이 재적하고 있고, 초기 소일워크(Soilwork)가 몸담았던 레이블 - 로 이적하며 4집 준비에 들어간다.
유럽에서의 성공적인 캐리어에 안주하지 않던 그들은 명실상부한 Listenable의 대표 밴드로써 세계무대로의 진출을 꿈꾸게 되는데, 그 결과 유러피안 메틀 뮤지션들이 인정하는 ‘제 2의 고향' 일본, 미국 뿐만 아니라 한국에까지 라이센스 발매라는 수확을 거두게 된다.
아직까지는 분명 소수의 골수 팬들 사이에서만 회자되고 있는 애너렉시아 널보사(Anorexia Nervosa)가 과연 머나먼 동아시아에서도 자국 못지 않은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스스로 역대 최고의 작품임을 자신하는 4집의 내용물을 살펴보며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 Album is... Listenable!!
[Redemption Process] 앨범은 총 7곡의 (보너스 Demo트랙을 제외하고) 중,단편으로 채워져있다. 2집부터 키보드와 오케스트레이션을 담당하며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Xort의 활약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분위기는 첫 곡 ‘The Shining'에서부터 감지된다. 럭셔리한 컨셉트카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듯한 느낌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한층 안정된 멋을 풍긴다. 2,3집의 느낌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안도감 이상의 압도적인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천둥같은 드러밍과 무게있는 리프가 인상적인 'Antiferno'를 지나면, 흡사 고딕메틀의 그것과 유사한 관현악 파트가 받쳐주는 미드템포(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넘버 ‘Sister September'가 강렬한 후렴구와 적재적소에 배치된 깔끔한 멜로디로 귀를 잡아끈다. 앨범의 베스트트랙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한 'Worship Manifesto'는 밴드 고유의 색깔을 가장 잘 잡아냈다고 단언할 만큼 변화무쌍한 전개속에서 합창부와 스크리밍, 클린 보컬이 멋지게 조우한다. ‘Codex-Veritas'는 하이레벨의 관악기가 곡의 ‘업'된 분위기를 배가시켜주며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드라마틱함을 과시한다.
시종일관 달려주는 ‘An Amen'은 라이브로 꼭 한번 보고 싶을 만큼 파워풀한 에너지로 넘치는 곡이다. 심벌의 리드로 시작하여 막바지 있는 힘을 모두 토해낸 뒤 육중한 코러스로 마무리되는 'The Sacrament'까지 이르면 역시 보통 놈(?)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And Redemption...
단기간내에 과도한 에너지를 소비하고 숱한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왔던 블랙 메틀은 최근 다소 정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등장한 애너렉시아 널보사의 신작은 한 밴드가 시간적인 순서에 의해 발표한 신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4집의 앨범 명이기도 한 [Redemption Process]는 개인적인 탈출이 아닌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는 해방의 과정을 가리킨다. 부디 이들이 새 앨범을 통해 세계 만방에 블랙메틀의 위상을 떨치는 새로운 해방구를 제시하게 되기를!
글 : 윤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