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tislav Rostropovich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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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Mstislav Rostropovich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발매일 2004.03.25
제작사 Universal
레이블 Deutsche Grammophon
미디어구분 2CD
Cat.No 8808678110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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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정보 트랙정보 상품후기

The Greatest Memory Series에 이은 유니버설 클래식의 야심찬 기획 [The Maestro] Series !!
현존 클래식계의 태두(泰斗), 그 전설로 남을 명연을 정리해 나갑니다.

Mstislav Rostropovich!
언제나 깨어있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위대한 음악가로서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슬라바, 로스트로포비치의 무대인생 60년 카라얀, 브리튼, 리히테르 등과 함께 한 전설적 명연 총 망라.


로스트로포비치의 무대인생 60년

얼마 전 로스트로포비치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모두를 담은 DVD가 출시된 바 있다.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연주는 물론이거니와 녹음 장소로 택한 프랑스 시골 교회의 고즈넉한 풍경도 이 작품과 너무나 잘 어울렸는데, 가장 큰 감명을 준 것은 한 곡 한 곡마다 직접 설명을 해주고 있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진지함과 음악 앞에서 한없이 몸을 낮추고자 하는 그의 겸손한 태도였다.
로스트로포비치가 누구인가? 1945년의 콩쿨 입상이래 세계 각지의 크고 작은 무대에서 60년이라는 엄청난 기간동안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아왔던 그이고, 첼리스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음악인들이 존경을 표해 마지않는 이 시대 최고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로스트로포비치가 아직까지도 작품 하나 하나를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풀어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선의 모습과도 같았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아제르바이젠의 수도인 바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역시 구소련의 연방 예술가 자격을 부여받은 바 있는 첼리스트였는데, 전설적인 첼로 연주자로 손꼽히고 있는 파블로 카잘스에게 직접 음악을 전수한 인물이기도 했으니 그 실력은 직접 들어보지 않더라도 짐작할만하다. 그의 어머니 또한 바쿠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기에 어린 로스트로포비치의 귀는 항상 음악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8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정식으로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세상의 모든 것이 경이롭고 신기하게 다가오는 유년기에 매일 반복되는 첼로 연습은 지루하기만 할 뿐,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던 것은 당연지사여서 그에게 있어서 첼로라는 악기는 그리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로스트로포비치에게 곧 인생의 첫 시련이 다가왔고, 이 시련은 첼리스트로서의 로스트로포비치를 제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 같으면 막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인 1942년, 아버지가 갑자기 타계하자, 로스트로포비치에게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가장의 역할이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그는 첼로 연습에 정신 없이 매달리기 시작했고, 3년 후인 1945년, 젊고 유능한 연주자를 발굴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된다. 이 때,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피아노 부문에서 금상을 받았는데, 냉전 시대의 소련을 대표하다시피 한 이 두 사람은 후일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곡 등 여러 음반들을 함께 녹음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의 인연을 계속이어나가기도 한다. 1947년과 1950년 프라하에서 개최된 콩쿠르에서 연이어 우승을 차지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한껏 드러내었단 그는 1948년,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함과 동시에 21살의 어린 나이에 모교의 교수로 임명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를 둘러싼 음악과 동료, 청중들은 항상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지만, 냉전시대 구 소련의 암울한 정치 상황은 결국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조국을 등진 망명자라는 꼬리표를 달아주고 말았다. 1940년대 후반, 국영 언론인 프라우다를 동원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프로코피에프 등 가장 진보적인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껍데기뿐인 형식주의'라고 몰아세우고, 심지어 비밀경찰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생존마저도 위태롭게 했던 '즈다노프' 사건과 관련, 로스트로포비치는 '러시아 음악의 큰 별들에 대한 말도 되지 않는 당신들의 기사를 보면서 나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낀다.'라는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당국으로부터 '반역자'로 지목되었던 반체제 문인 솔제니친을 자신의 별장에 장기간 숨겨주기도 하였으며, 1970년에는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발표하면서 독재 정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는데, 이것이 결국 큰 사건으로 발전, 소련 정부는 그의 해외 연주를 금지시키고 말았다. 1974년 한시적인 여행 허가를 받아 런던으로 날아간 로스트로포비치는 그곳에서 가족들과 합류, 미국의 워싱턴을 새로운 정착지로 삼게 되었는데, 정치적인 문제로 조국을 등진 것에 대한 그의 아쉬움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장벽 옆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그의 뺨을 하염없이 적셨던 눈물에서 충분히 읽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반애국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시민권마저 박탈당했던 그가 1991년 구 소련의 붕괴를 이끌어낸 쿠데타 기간동안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국회의사당 건물 앞에서 환호하는 시민들과 뒤섞이고자 했던 것 또한 인권 옹호자로서 그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인데, 역사의 큰 흐름 가운데에서 보여주었던 이런 용기 있는 행동들은 음반으로 듣는 그의 음악을 한결 더 감동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항상 적극적이고 도전적이던 그의 성격은 한 여인에 대한 불같은 사랑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55년에 볼쇼이 오페라의 최고 소프라노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와 결혼했는데, 그의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결혼 상대를 결정하는데에는 프라하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이후 겨우 나흘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첼리스트

연주자로서의 로스트로포비치를 논하고자 한다면 상당히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야만 한다. 그렇게 많은 연주회와 음반들을 발표하면서도 그가 특정 작곡가의 스페셜리스트로 꼽히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바로크 시대로부터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넓은 분야에 그의 관심이 골고루 퍼져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니 말이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러시아를 떠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 그의 미래와 너무나 흡사한 동구권의 대지휘자 바츨라프 탈리히의 지휘로 1952년 처음으로 녹음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탈리히와의 만남을 아주 대단한 경험으로 회고하고 있는데, 드보르작의 작품뿐만 아니라 러시아 음악의 모든 것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최고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녹음을 시작으로 무려 일곱 가지나 되는 이 작품의 녹음을 내놓았는데, 단순히 이 작품에 대한 편애라고 판단하기보다는 첼로를 위한 협주곡들이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만큼 다양하지 못한 것을 탓해야 할 것이다. 이 중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DG),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EMI)와 호흡을 맞췄던 녹음들은 그 큰 스케일과 영혼을 울리는 깊은 울림에서 아직까지도 레퍼런스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단한 연주들이다.

주인공이 로스트로포비치 혼자만은 아니지만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같은 러시아 출신의 거장들과 카라얀과 함께 작업했던 베토벤의 삼중협주곡(EMI)도 역사상 가장 빼어난 녹음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세 사람의 굵직한 독주자들과 당시 막 주가가 오르고 있었던 지휘자 카라얀이 해석의 방향을 놓고 두 패로 갈려 심하게 다투었다고는 하지만 음반에 수록된 이들의 연주에서는 완벽한 호흡만이 들릴 뿐, 내분의 실마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의 단호하고 격정적인 보잉과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도 같지만,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Decca)도 항상 공급이 달리는 음반 가운데 하나이다. '아르페지오네'는 본래 첼로의 몸통에 기타와 비슷한 지판이 달려있었던 악기로 얼마 가지 않아 음악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이 소나타를 첼로로 편곡한 것은 LP시절부터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가 대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고 있는 인물은 영국 출신의 작곡가인 벤자민 브리튼, 두 대가들은 1960년 스승 쇼스타코비치의 소개로 만난 이후, 끈끈한 우정을 지속해 온 음악동지이기도 한데, 이 음반에서는 그들이 함께 녹음한 드뷔시의 소나타까지 감상할 수 있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연주들이 또 있다. 바로 독일 음악 전통의 핵심으로 군림하고 있는 베토벤과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들로 베토벤은 아까 언급했듯이 리히테르(Philips)가, 브람스에서는 제르킨(DG)이 반주를 맡고 있다. 유럽의 비평가들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연주자들의 독일 작품 해석을 '엄청난 힘만 앞세우고 있을 뿐, 작품을 꿰뚫는 개념이 없다.'라고 폄하하고 있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베토벤만큼은 독일인들보다 오히려 더 작품의 핵심에 근접해있는  연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첼로는 실내악에서나 오케스트라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악기임에도 불구하고, 더 대중적인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에 비한다면, 독주 작품이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만약 내게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만날 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을 협박해서라도 첼로를 위한 작품들을 쓰게 할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을 정도로 로스트로포비치는 첼로를 위한 협주곡이나 소나타들이 피아노나 바이올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에 적지 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자신의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기존 작품에의 갈증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20세기의 작곡가들에게 첼로 작품을 쓰도록 권유하는 것으로 분출되었고, 그의 스승과도 같은 쇼스타코비치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로스트로포비치를 염두에 두고 구 곡의 첼로 협주곡을 만들어 낸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하여, 프로코피에프, 브리튼, 슈니트케, 불레즈 등이 여기에 동참했고, 심지어는 작곡가보다는 지휘자로만 알려져 있는 로린 마젤까지도 그에게 첼로 작품을 헌정했을 정도이다.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대항한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또, 손꼽히는 첼로 연주자로서 수없이 많은 명연들을 양산한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독특한 점이 있다면 자신의 제자를 공공연하게 기르지 않았다는 것인데, 1948년 약관의 나이에 모교인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된 이후 적지 않은 숫자의 후배 연주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왔지만 '개인적인 제자를 받지는 않는다'는 그의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는 법. 커티스 음악원 출신으로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고 있는 다니엘 리의 연주를 자신의 거실에서 듣는 순간, 오랫동안 고수해 온 로스트로포비치의 그 원칙이 깨어지게 된 것이다.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대신 로스트로포비치는 다니엘에게 매우 엄격한 조건을 요구했는데, 연주회를 년 5회 이하로 제한한다는 것과 당분간은 음반 작업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젊은 연주자에게는 당장의 인기보다는 자신만의 소리와 색채를 가꾸어갈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더 중요하다는 그의 음악 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휘자

어지간한 연주자라면 그가 이룩한 첼리스트로서의 업적만으로 충분히 자족하고 남을 일이었지만 끊임없이 흘러 넘치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부터 지휘봉을 잡기 시작한 로스트로포비치는 68년 볼쇼이 극장에서의 <예프게니 오네긴>을 계기로 뚜렷한 성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어느 시대, 어떤 작곡가의 작품이건 가리지 않고,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고 있었던 반면, 지휘자 로스트로포비치는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오페라와 몇몇 관현악 작품들에 그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아내 비쉬네프스카야와 니콜라이 게다가 주역을 맡아 1979년에 녹음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멕베드 부인>은 가장 빼어난 연주로 손꼽히고 있는데, 소련 정부가 그와 아내의 러시아 시민권을 박탈했다는 것을 먼 이국땅에서 뉴스로 전해 들어야 했던 당시의 북받치는 감정들이 녹아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만프레드 교향곡'을 포함하여 그가 런던 필하모닉과 함께 완성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전집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고,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또한 마찬가지인데, 러시아 작품을 프랑스 악단이 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만한 음향과 다채로운 색감이 작품의 화려함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지휘자로서의 로스트로포비치가 들려주는 러시아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러시아적'이라고 이야기하는 특성들이 다른 연주들에 비해 오히려 더 적다는 것이다. 이런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에 대해 로스트로포비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진정한 모습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아와 개성을 내던짐으로서 가능해집니다. 프로코피에프도 차이코프스키가 부당하게 평가되는 가장 큰 이유를 틀에 박힌 표현이 자유롭고 참다운 작품의 아름다움을 가리고있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러시아풍', 그리고 차이코프스키풍'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들이 과연 진정한 러시아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언제나 깨어있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또, 위대한 음악가로서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슬라바(로스트로포비치의 애칭), 누구보다 큰 조국애를 진솔하게 몸으로 보여주었던 그의 앞에서 누가 감히 당신보다 러시아를 더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박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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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1]

1.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In B Monor Op.104 : I.Allegro (Antonin Dvorak)

2.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In B Monor Op.104 : II.Adagio Ma Non Troppo

3.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In B Monor Op.104 : III.Finale. Allegro Moderato

4.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In A Minor Op.129 : I.Nicht Zu Schnell (Robert Schumann)

5.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In A Minor Op.129 : II.Langsam

6.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In A Minor Op.129 : III.Sehr Lebhaft

7. Andante Cantabile (Peter Ilyich Tchaikovsky)


[CD-2]

1. Sonata For Arpeggione And Piano, D821 : I.Allegro Moderato (Franz Schubert)

2. Sonata For Arpeggione And Piano, D821 : II.Adagio

3. Sonata For Arpeggione And Piano, D821 : III.Allegretto

4.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In A Minor Op.129 : Vocalise Op.34 No.14 (Sergei Rachmaninov)

5. Traumerei (Robert Schumann)

6. Cello Sonata No.1 In F Major, Op.5 No.1 : I.Adagio Sostenuto - Allegro (Ludwig Van Beethoven)

7. Cello Sonata No.1 In F Major, Op.5 No.1 : II.Rondo: Allegro Vivace

8. Sonata For Cello And Piano : I.Prologue (Claude Debussy)

9. Sonata For Cello And Piano : II.Serenade

10. Sonata For Cello And Piano : III.Fin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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