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 액츄얼리> <노팅힐> 등 로맨틱 영화의 대가인 [working title] 의 2008년 야심작. <나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 (원제: Definitely, Maybe)>의 사운드트랙.
영화 <프렌치 키스>, <윔블던>,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 등의 작업으로 잘 알려진 아담 브룩스 연출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나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는 평범한 한 남자의 연애사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지고지순한 러브 스토리.
REM, Flaming Lips, Massive Attack, Belle & Sebastian, 그리고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영화음악 작업으로도 유명한 Badly Drawn Boy의 신곡까지 포함, 총 14곡의 특별한 음악 수록
세 번의 사랑, 세 번의 재난, 세 번의 화해를 위한 영화음악 [Definitely, Maybe]
에이프릴: 당신과 난 개와 고양이같아요.
윌: 물과 기름같죠.
에이프릴: 샌드페이퍼와 벌거벗은 엉덩이.
윌: 웩! ………….
마야: 아빠, 아빠가 술도 마시고… 담배까지 피웠다는 거… 믿겨지지 않지만, 그래도 나 아빨 사랑해. – 영화 중에서
윌 헤이즈(라이언 레이놀즈)는 청년 시절엔 미국 대통령까지 꿈꾸었던 열혈 정치가 지망생이었지만, 삼십 대가 된 지금은 이혼을 앞둔 광고회사 직원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사는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다. 똑부러지게 똑똑하고 예쁜 어린 딸 마야(아비게일 브레슬린)는 그의 낙심한 그의 인생에 남은 마지막 위안이다. 마야를 만나는 금요일, 아이의 학교를 찾아간 윌은 그러나 마야의 느닷없고 난처한 질문과 마주한다.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거야?'
학교에서 막 성교육을 받고나온 마야는 자기가 사고로 태어난 건 아닐까 우울하기 짝이 없다. '미성년 청취 불가'의 이야기도 서슴지 않으며 따지는 마야를 윌은 어떻게든 피하려다 결국 솔직하게 다 털어놓기로 한다.
그리고 과거로의 플래쉬백. 때는 1992년, 윌 헤이즈는 위스콘신을 떠나 뉴욕의 '빌 클린턴 캠프'에서 열심히 휴지를 나르고 복사를 하는 청년이다. 위스콘신엔 결혼하기로 마음 먹은 대학 동기 에밀리(엘리자베스 뱅크스)가 있다. 그러나 뉴욕으로 오면서 윌의 사랑의 행로는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캠프에서 복사를 담당하고 있는 매력적인 여자로 무당파에 환경주의자인 에이프릴(아이슬라 피셔)과, 애인 에밀리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지적이고 도발적인 서머(레이첼 와이즈)가 그를 각기 다른 사랑의 미래로 이끈다. 당혹스러운 첫만남, 서로의 성정을 계시처럼 이해하게 된, 추억이 될 어떤 순간, 예기치 않게 찾아온 감정 앞에서의 설렘, 짧은 행복, 길고 쓴 슬픔, 서로를 할퀴는 말과 가슴 에이는 이별, 긴 침묵, 힘겹게 되찾는 화해와 용서, 두렵지만 새롭게 꿈꿔보는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십여 년의 행로가 그들 앞에 펼쳐진다.
런던이 아닌 뉴욕으로 소재지를 옮긴 워킹 타이틀의 로맨스 영화로 아담 브룩스가 메가폰을 잡은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 Definitely, Maybe>는 가령 워킹타이틀을 세계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의 메카로 등극시킨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러브 액추얼리>와는 사뭇 다르다. 십여 년에 걸친 윌 헤이즈의 삶과 사랑 이야기는 ‘서서히 무너져간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슬프고 우울하다. 세 여자와의 연애담에도 코미디 보다는 ‘사랑하나 헤어지고’의 씁쓸한 공식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영화 내내 유지되는 지적인 유머와 절제된 감정과 가만한 휴머니즘이 영화를 성숙하고 자연스러운 해피엔딩으로 이끈다. 세상에 대한 열정보다는 그것과의 화해를 지향하는 듯한 영화의 노회함은 워킹 타이틀과 동고동락하며 < 브리짓 존스의 일기 - 열정과 애정> <윔블던>을 만든 아담 브룩스의 것이라고 믿기엔 살짝 힘들 정도다. 그만큼 <나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는 공허한 ‘캔디무비’와는 다른 사유를 전달해 준다. 어떤 실패한 삶과 사랑에도 화해와 행복의 기회는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Definitely, for Sure! 명민하게 로맨틱한 배경음악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에서 음악은 앞으로 나서는 법이 없다. 이 역시 사랑을 엑스타시로, 아이러니를 경쾌한 폭발로 표현하며 음악이 화면 맨 앞으로 달음질쳐 나오던 <브리짓 존스> 등과는 다른 점이다. 1992년 너바나(Nirvana)도 모르는 민주당 파 윌에게 에이프릴이“Come As You Are”를 소개하는 장면과, 마야를 만나러 가는 윌의 ‘이 노래야 말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을 치유해주는 탁월한 노래지’란 내레이션과 함께 첫 장면을 장식하는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and the Family Stone)의 “Everyday People”정도가 가장 두드러지는 정도다.
1960년대 소울, 훵크의 제왕 그룹이었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Everyday People"은 1968년에 발표된 빌보드 넘버원 히트곡이다. 음악을 통해 인종과 사회적 계급을 넘어선 평화와 평등을 설파한 슬라이의 대표곡으로 잘 알려졌는데, 분할된 화면 속에 햇살이 쏟아지는 뉴욕과 거리의 이정표를 보여주는 첫 장면과 썩 잘 어울린다. 더불어 “Everyday People”은 로맨스의 소재지를 뉴욕으로 옮긴 워킹 타이틀과 아담 브룩스의 적절한 선곡 능력을 보여준다. 오프닝을 장식할 노래를 고르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회고한 브룩스는 ‘무려 4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처럼 들리지 않고 바로 어제 나온 신곡처럼 신선하다’는 점에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을 골랐다. 참고로 [Definitely, Maybe]엔 애초 브룩스가 타이틀 음악으로 정했다가 누락시킨 어레스티드 디벨럽먼트(Arrested Development)의 1992년 히트넘버“People Everyday”도 실려있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스톤과 주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다른 스타일로 노래하고 있으니 비교청취해 봄직하다.
영화의 스코어를 작곡한 이는 클린트 맨셀(Clint Mansell)이다. 영국 록밴드 '팝 윌 잍 셀프Pop Will Eat Self'의 기타리스트였던 맨셀은 대런 아르노프스키(Darren Aronofsky)의 데뷔 영화인 <π>의 음악을 맡으면서 영화음악가로 입성했다. 오테커(Autechre), 에이팩스 트윈(Aphex Twin) 등의 유수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와 함께 언더그라운드 일렉트로니카의 귀재로 알려진 그이지만, 관현악 오케스트레이션을 주조로 서정적인 스크린BGM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발군이다. '관현악에 바탕 해 영화와 어울리는 사운드 텍스처와 정서적인 팔레트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한 브룩스는 고심 끝에 맨셀을 초빙했고, 맨셀은 '매우 프로페셔널하면서도 즉흥성이 넘치는 음악을 들려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사운드트랙에는 “Definitely, Maybe Suite”만 실려있는데, 기타와 신서사이저가 물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클래식 스트링 섹션이 조용히 너울지고 조용히 피아노가 들어서는 구성에서 청량감이 느껴진다. 무모한 열정이 아니라 재고에 재고를 거듭하는 성숙한 사랑이야기에 목가적 평화로 덧붙인 맨셀의 음악 역시 안정적이고 성숙하다.
그러나 팝 팬들에겐 아담 브룩스의 선곡 컴필레이션 쪽이 더 귀에 감길 것이다. 슬라이 앤더 패밀리 스톤의 60년대 히트넘버부터 2000년대 영미 팝까지 종횡무진하는 음악들은 브룩스가 세심하게 선곡한 것들로 영화에선 내내 조붓하게 들어섰다 사라지지만, 영화가 말하는 시점과 함께 각 인물들의 문화적인 배경을 암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가령 윌이 마야에게 과거의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화면이 플래쉬백할 때, 플레이밍 립스의 “Yoshimi Battles the Pink Robots”에서 REM의 “Stand”로 바뀌는 식이다. 윌이 딸 마야에게 저녁을 차려줄 때 흘러나오는 플레이밍 립스의 음악은 ‘딸과 아빠 둘 다 즐겨 들을 만 하다’는 점에서 선곡되었다. 1992년 위스콘신 대학의 송년 파티의 배경음악으로 등장하는 “Stand”는 REM의 1989년 앨범 [Green]의 타이틀로 지성적인 흥겨움이 장면과 잘 들어맞는다. 브룩스에 따르면 가사가 ‘달콤하게 정치적이어서’ 열혈 정치학도 윌과 잘 맞기도 하다.
슬라이…와 함께 [Definitely, Maybe]에서 온고지신의 역할을 하는 건 머디 워터스(Muddy Waters)와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이다. 머디 워터스의 "Mannish Boy"는 1955년에 최초로 레코딩 된 클래식 블루스로 영화에선 윌의 연인 중 한 명인 서머의 동거남이자 교수인 햄튼 로스(케빈 클라인)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흘러 나온다. 위스키 매니아이자, 방약무인한 보헤미안으로 윌의 범생이 기질을 놀려먹는 로스와 더할 나위 없는 궁합인데, 느긋하면서 섹시한 기타 리프와 맥킨리 모건필드(McKinley Morganfield)의 부드러우면서도 야성적인 목소리가 일품이다. 오티스 레딩의“Cigarettes and Coffee”는 에이프릴과 윌이 비가 내리는 담배가게 밖에서 함께 담배를 피울 때 흘러 나온다. 레딩의 1966년 히트넘버로 전설적인 목소리와 함께 알앤비 블루스의 슬로우템포로 젖어드는 연주가 절절하다.
한 편 자유분방하면서도 지적으로 무장된 서머 하틀리를 위한 음악으론 로맨틱한 클래식 재즈팝 “Summer Wind”가 선정되었다. 1965년 헨리 메이어(Henry Mayer)와 조니 머서(Johnny Mercer)가 각각 작곡과 작사를 맡고, 66년 프랭크 시나트라가 발표해 유명해진 곡으로, 영화에선 서머 역을 맡은 레이첼 와이즈가 잠깐 부르기도 한다. 프랭크 시나트라 음악 중에서 가장 리메이크가 많이 된 넘버로 최근엔 2000년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é)가 리메이크했고, 2003년 영화 <매치스틱맨>에도 실린 바 있다. [Definitely, Maybe]에 실린 것은 1990년대부터 활동해 오고 있는 재즈 보컬리스트 매들린 페어루(Madeline Peyroux)의 버전이다. 페어루는 빌리 할러데이 뺨치게 고색창연하게 소화하고 있는데, 브룩스는 ‘격정적이면서도 재지jazzy한 면이 있고, 매우 자신만만한 서머의 캐릭터’에 딱 들어맞는 음악이라고 소회하기도 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엔딩 장면에 등장하는 섬세하고 낙천적인 음성이 매우 반가울 것이다. 독특한 성장영화이자 로맨스 영화였던 <어바웃 어 보이, About A Boy>의 음악으로 더욱 정겨운 배들리 드론 보이(Badly Drawn Boy)의 “The Time of Times”가 엔딩 타이틀로 선정되었다. 희망이 깃든 앞날을 암시하지만 과거의 모든 성장통을 잊지 않는 ‘성인의 내면’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 유념하면서 브룩스가 처음으로 고른 음악이었고, 그대로 낙찰된 것이 배들리 드론 보이이다. 올해 4월에 발매될 싱글이라는 점에서 사운드트랙의 최신곡이기도 하다.
뉴욕으로 간 워킹 타이틀 로맨스지만, ‘브리티쉬 비트’의 향연은 여전하다.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주의자 에이프릴을 보좌하는 건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의 클럽지향적인 트립합 “Safe from Harm”와 또 다른 영국 트립합 밴드인 스테레오 엠씨즈(Stereo MCs)의 “Connected”이다. 노숙한 마야를 위해 쓰인 음악 중 가장 인상적인 건 벨 앤 세바스찬(Belle and Sebastian)이 “The Boy with the Arab Strap”이다. 영국 출신은 아니지만 모핀(Morphine)의 목가적이면서 묘하게 몽환적인 “In Spite of Me”는 맨셀의 스코어 음악과, 스코틀랜드 출신의 뮤지션 핀리 케이(Finley Quaye)의 질박한 레게 블루스“Even After All”은 오티스 레딩과 한 몸의 정서를 담아낸다. 워킹 타이틀의 본산지를 적당히 과시하면서 영화 속 인물들을 세련되게 암시한다는 점에서 이 음악들은 관객에겐 두 배의 재미를 전해준다.
워킹타이틀은 유독 로맨틱 코미디로 명성이 높지만, 또 ‘이미 익숙하지만, 극장 밖을 나선 후에도 기억되는 팝 컴필레이션 사운드트랙’으로도 명성이 높다. [Definitely, Maybe]의 사운드트랙은 그 중에서 ‘명민하면서 로맨틱한’ 워킹 타이틀 브랜드로 기억될 것 같다. 늘 그렇지만 영화음악은 영화와 파트너쉽을 이루면서도,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존재한다. 영화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에 대한 평가는 갈릴지 모르나, 클래식과 첨단 팝을 느긋하면서도 재기 넘치게 배치한 [Definitely, Maybe]에 대한 평가는 늘 호의적일 것이다.
글. 최세희 (음악 평론가) nutshelt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