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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포스트록 팬들을 열광시켰던 스위스 출신의 국가대표 포스트 록 밴드 엡파토리아 리포트(The Evpatoria Report)의 뜨거운 데뷔작과 초기 EP 합본 앨범.
"우리가 보컬이 없는 이유는 딱히 뭔가 특별하게 할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음악 그 자체일 뿐이죠. 각각의 리스너들은 우리의 음악에서 자신만의 취향과 커넥션을 찾으면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음악을 만들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좋아해준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꼭 그렇지 않다고 해서 딱히 크게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 Daniel Bacsinszky (바이올린/키보드)
The Evpatoria Report
스위스 출신인 엡파토리아 리포트(The Evpatoria Report)는 2002년 1월에 결성됐는데, 두 대의 기타, 베이스, 드럼, 그리고 바이올린과 건반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다. 비쥬얼 아트를 담당하는 사람까지 멤버로 계산하고 있다는 점이 약간 특이하며 고요한 무드와 맹렬한 감성을 교차 시키는 연주 중심의 밴드로 전세계 포스트 록 팬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다. 인터뷰에 의하면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한 바이올린과 키보드를 연주하는 멤버가 클래시컬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고 드러머는 소울/훵크, 베이시스트는 메탈에, 그리고 기타리스트는 오래된 로큰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에 있는 도시의 이름인 '엡파토리아(Evpatoria)'에서 밴드명을 따왔다고 한다. 여러 밴드들과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국내에서도 충성스런 팬들을 몰고 다니는 일본 포스트 락 씬의 수퍼스타 모노(Mono)와 다양한 요소들을 흡수하면서 국내에서도 사랑 받고 있는 칼렉시코(Calexico), 그리고 로스 엔젤리스 출신의 포스트 락 밴드 레드 스패로우스(Red Sparowes) 등과 함께 무대에 서곤 했다. 그들의 사이트를 직접 방문해 보면 알겠지만 전 유럽을 아우르면서 투어를 다니곤 했으며 라디오헤드(Radiohead)라던가 매직 넘버스(Magic Numbers)와 같은 밴드들이 메인에 섰던 페스티발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밴드는 2003년도에 EP를 발매하고 첫번째 정규 앨범인 [Golevka]를 2005년도에 공개한다. 두 곡이 수록된 EP는 이들이 자체적으로 발매했으며 [Golevka]는 2005년도에 발매됐지만 아르헨티나에 있는 트와이라잇 레코드(Twilight Records)에서 2008년도에 라이센스 되기도 한다. [Golevka]라는 타이틀은 소행성 6489 고레브카(Golevka)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EP와 첫번째 앨범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후속작 [Marr]가 발매되면서 가장 중요한 포스트-인스트루멘탈 록 밴드로 지목되곤 한다.
6489 Golevka
소행성 6489 Golevka는 이들의 밴드이름이기도 한 우크라이나 엡파토리아에서 관측되고 있다. 혹시나 조경철 박사님을 존경한다거나 미래에 천문학자를 꿈꾸는 꿈나무들을 위해 이에 대한 사항들을 약간만 덧붙이자면 1991년도에 캘리포니아 파로마 천문대에서 처음 발견된 본 소행성은 1996년 1월경에야 그 이름이 지어졌다. 현재는 일본의 카시마 우주통신 연구센터와 캘리포니아의 골드스톤 천문대,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엡파토리아에서 레이다 관측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Golevka'라는 이름은 3개의 관측소 지명의 머릿부분을 따서(‘GOL’dstone, ‘EV’patoria, ‘KA’shima) 만들어졌다. 어느 방향에서 봐도 모습이 달라지는 기묘하게 모난 형태를 띄고 있다고 한다. 이런 소행성이 만일 지구로 곧바로 떨어진다면 우리는 아마 겟돈을 얼른 타먹어야 할 것이다.
[Golevka]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만 rateyourmusic.com의 어느 유저는 본 작 [Golevka]를 두고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Godspeed You! Black Emperor) 이후 들었던 최고의 포스트-록 앨범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Golevka]는 밴드 멤버들의 새로운 경험을 응축한 집합체라고 한다. 포스트록의 전통처럼 적은 양의 곡수가 들어있지만 앨범의 러닝타임은 68분에 달한다. 가장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 트랙이 8분대인데, 당신이 연주 위주의 포스트록 밴드에 취향이 없고 10여 분을 클라이막스를 위해 기다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앨범과 친숙해지기는 힘들 수도 있겠다만 눈 딱감고 잘 버텨준다면 아마도 상당히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시작부터 4분 여를 엠비언스로만 진행시키는 곡들도 있고-어김없이 끝에는 특유의 트레몰로를 바탕으로 조지고 부시면서 끝낸다- 몇몇 트랙들은 확실히 클래시컬한 영향을 담아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나 이런 부분들은 모노와 월즈 엔드 걸프렌드(World's End Girlfriend)의 콜라보레이션 앨범을 떠올리게끔 하는데, 확실히 클래시컬한 파트를 담당하는 멤버가 밴드의 메인이기 때문에 좀 더 섬세한 부분들이 번뜩이곤 한다. 몇몇 빛나는 멜로디들은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Explosions in the Sky)를 떠올리게끔 하며 와우와 에코가 걸린 고음역대의 희미한 잔향은 모과이(Mogwai)의 몇몇 부분들이 연상되곤 한다. 여느 포스트록 밴드들과의 또 다른 차이점을 얘기하자면 키보드 멤버가 고정으로 있기 때문에 확실히 건반이 주는 안정감이라던가 약간은 비어있는 음역대의 중심부를 채워넣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미약하게나마 그 풍성함이 감지될 것이다.
[The Evpatoria Report EP]
2003년도에 발매된 본 EP는 7분 짜리 트랙인 [naptalan]과 9분 여의 러닝타임을 가진 [Voskhod Project]의 두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공식 홈페이지인 http://www.the-evpatoria-report.net/에서는 곡들을 192kbps짜리의 MP3로 다운받을 수 있게끔 해 놓았는데, 스위스 본국에서도 파스텔뮤직으로 마스터를 보낼 때 자신들 또한 단 한 장의 카피만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 이후 CD를 다시 돌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말인 즉슨 일반 CD, 즉 웨이브(Wav) 파일로 이루어진 포맷이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얘기인 셈이다. 보통 웨이브에서 MP3로 인코딩 될 때 고음역대가 깎여나가곤 하는데 이들의 시원시원한 어레인지와 맹렬한 전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사이트에서 MP3를 받는 것보다는 아마도 본 음반을 감상하는 것이 좀 더 입체적인 감동을 줄 것 같다. EP에 수록된 두 곡들은 한결같이 장쾌한 드라이브감을 가지고 있는 트랙들로 10여분에 가까운 시간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Rock Will Never Die
인터뷰에서 이들은 항상 다른 것을 시도해보고 싶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기존의 포스트록과 딱히 차별화 된 지점이 존재하거나 하지는 않다. 오히려 앨범을 들은 이후 드디어 포스트록이라는 ‘장르’가 일정 패턴으로 정형화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끔 만들었는데 이것이 포스트록이 점점 시시해져 간다거나 너무 뻔해져서 재미가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오히려 새로운 방식의 음악적 움직임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팬들과 더불어 이런류의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는 점에서는 분명 환영 받을만한 일이다. 하지만 서서히 정형화 되가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다음 세대의 록’이라고 불리는 것은 좀 뭔가가 웃기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인스트루멘탈 록’이라던가 영어가 싫다면 ‘키타-경음악’과 같은 좋은 말들이 얼마든지 많지 않는가. 90년대 광풍이 불어 닥쳤던 ‘얼터너티브'는 모든 세대의 대안이 된 것이 아니라 단지 80년대의 대안에 불과했을 뿐인데-그렇기 때문에 '그런지'라는 또 다른 표현이 존재하곤 한다- 포스트록 역시 90년대 중반 이후의 록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거 다 필요없다. 이런 류의 잡담은 말 만들기 좋아하는-정확하게는 '편의상' 분류라는 것을 해야만 하는-평론가 분들에게 맞기고 우리는 그저 쏟아지는 소리들에 몸을 띄우면 될 것 같다.
추억의 명화 [제 3의 사나이]에 등장하는 오손 웰즈는 스위스를 가리켜 전쟁이 없어 한낮 뻐꾸기 시계나 만드는 나라 정도로 비하하곤 했지만 스위스 청년들인 엡파토리아 리포트는 위풍당당하고 또한 위엄있게 조지고 또 조지고 때리고 뿌시고 그러다가 마치 알프스 산맥의 마테호른을 연상케하는 특유의 웅장한 서정미를 한번 새침하게 뿌려주곤 한다. 만일 오손 웰즈(극중이름 해리)가 이들의 음악을 듣게 된다면 아마도 다른 멘트를 생각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 단락의 제목을 저 따위로 써놨는데 사실 이 [Rock Will Never Die]라는 문장은 경복고교 3학년 이호석 군을 팬으로 가진 부활의 1집 커버 왼쪽상단에 써 있는 문구이기도 하다. 과연 계속 ‘포스트록’과 같은 류의 말들을 꾸준히 만들어 내기 때문에 록이 죽지 않는건지, 아니면 정말로 록이 자생력을 가지고 알아서 생존해 나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알 수 없다만 어쨌든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이 한물 갔으면 갔지, 락은 결코 죽지않아~.
소행성 6489 고레브카는 21세기 중 3회 지구 가까이에 접근할 예정이라고 한다. 2046년, 2069년, 그리고 2092년도에 지구에 근접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 때까지 살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음반은 그 때 즈음에 미미하게나마, 혹은 기대와는 다르게 성대하게 회자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밴드는 일단 곡/앨범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것이다.
한상철 (불싸조 http://myspace.com/bulssaz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