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것처럼 양호한 상태.
돌아온 디스코 퀸이 들려주는 컬러풀 트랙들.
레트로 트랜드의 정점 2008년에 화려하게 부활한 도나 썸머
가수에게 어느 한 장르가 고유명사처럼 붙는 것은 장점일까 넘어야 할 굴레일까.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하면 80년대 팝의 절정기를, 너바나(Nirvana)는 90년대 초 그런지 록을 떠올리듯 검은 머리의 흑진주 도나 썸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70년대 디스코 음악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70년대에서 80년대 초까지 4곡의 넘버원을 비롯해 수많은 히트곡을 낸 전설적인 인물 아닌가. “Hot Stuff”, “Bad Girls”, “Love To Love You Baby” 등 감각적인 그녀의 히트곡 중 70년대 울트라 히트 “Hot Stuff”는 아직도 TV 의 짝짓기 프로그램이나 그루브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송에서 수시로 나오는 올 타임 페이보릿(All Time Favorite) 이다. 비단 방송만이 아니다. 홍대 여느 클럽에서도 여전히 댄스 플로어를 달구는 킬러 컨텐츠이다. 도나 썸머란 이름은 그렇게 70년대를 풍미했던 디스코 그 자체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70년대에 갇혀 있었다. 한국에서 그녀에 대한 관심은 딱 80년대까지였으니. 초기 히트곡들이 무한 재생산 되는 동안에도 후반기 음악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17년 만에 다시 돌아온단다. 그것을 기념해 베스트 앨범 [Endless Summer]를 오랜만에 다시 들어보면서 컴백을 자축하기로 하였다.
무엇보다 음악계의 복고 바람이 고맙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데뷔(1974년) 후, 정확히 34년 뒤 2008년 한국은 다시 디스코 음악의 자양분을 받으며 자라고 있지 않은가. 지난 몇 년간 한국 대중음악 씬 히트곡들은 디스코 음악을 교묘히 차용한 하이 브리드 댄스 음악이었고 사람들은 디스코의 뿌리는 모를 지언정 그 장르가 주는 흥겨움, 멜로디, 비트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 점에서 지금 썸머의 노래는 아주 신선하게 들릴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거장들의 컴백 붐이다. 블론디, 이글스, 듀란듀란 등 수많은 과거의 스타들이 줄줄이 재결합하거나 컴백하는 것이 단지 그들의 올드 팬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물론 오랜 팬들은 여전히 열렬한 환영을 보내고 있지만 컴백한 노장 뮤지션들이 들고 나오는 음악은 여전히 대단하다. 복고와 현대적 감각이 교묘히 결합된 그런 세련됨. 그런 거장에 대한 예우가 바람직한 시대에 ‘디스코’ 장르의 여왕 도나 썸머의 복귀는 마지막 순서지만 꼭 일어나야 할 사건인 것이다. 그녀의 컴백으로 이제 진정한 ‘레트로 트렌드’는 완성되었다.
1948년생, 우리 나이로 60세가 넘는 나이의 썸머. 거의 패티 김 연배의 노익장인 그녀는 나이로 따지면 레전드 급 칭호를 붙일 만하다. 어린 시절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그녀가 본격적인 팝음악의 세계로 뛰어든 것은 독일로 건너가 뮤지컬을 하면서부터. (그때 만난 남편 덕에 이국적인 썸머라는 성을 얻게 된다). 그 후, 그녀의 74년 데뷔 앨범 [Lady Of The Night]이 나오기까지 실력 있는 프로듀서 지오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와 피트 벨로티(Pete Bellotte)의 만남이 중요했다. 그들과의 작업을 통해 그녀의 음악적 재능이 단순히 댄스 비트에 있지 않음이 드러나게 되고 75년 "Love To Love You Baby"는 유럽에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사건은 미국시장으로 건너간 79년에 일어난다. [Bad Girls]앨범에서 메가톤급 히트곡 “Hot Stuff”, “Bad Girl”, “ In The Radio” 가 연속 터지면서 유일하게 3연속 더블 앨범을 차트에 올린 가수가 된 것이다. 이때가 디스코 피버(Disco Fever) 한가운데 썸머의 절정기였다.
하지만, 1980년 썸머는 자신의 카사블랑카(Casablanca) 레이블을 떠나 신생 게펜(Geffen) 레코드와 계약하게 된다. 디스코 음악보다는 좀 더 알앤비적 팝/록 음악을 추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인데 레코드사와의 음악적 이견으로 인해 히트곡 행렬에 약간의 공백기를 가지게 된다. 결국, 그녀는 열성 팬들이 원하는 것을 다시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1983년 발매한 포스트 디스코 트랙 “She Works Hard For The Money”가 큰 히트를 기록하면서 80년대 뉴 웨이브 시절의 대표 히트곡 하나를 더 추가한 썸머. 그러나 그 후로 그녀의 음악적 절정기는 서서히 저물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는데 그녀의 마지막 히트곡은 1989년 탑 텐에 오르는 "This Time I Know It's For Real”이다. 물론, 그녀의 주무기인 댄스 장르에 관해서는 여전히 위력적인 힘을 발휘하여 1994년 발매한 베스트 앨범 [Endless Summer]의 신곡 "Melody Of Love" 는 큰 인기를 얻는다. 그리고 베스트 앨범 이후 라이브 앨범을 제외한 공식적인 음반 작업을 중단했던 그녀가 새 앨범 작업을 시작한 건 2006년의 일이다. 비록 환경도 변하고 오랜 공백도 두려웠지만 관객과의 소통이 다시 하고 싶었다는 것이 그녀가 밝힌 이유였다.
30년이 넘는 음악인생을 베스트 앨범을 들으며 돌이켜 보긴 어렵지만 한가지 그녀가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 있으니, 보통 댄스(디스코) 뮤지션에 대해 갖기 쉬운 음악적인 폄하를 초월하는 자신을 ‘여왕’으로서 완성시키는 아우라가 그것이다. 그런 아우라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17년 만에 나온 신보 [Crayons]이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이유이다.
[Crayons(크레용)]이란 재기 발랄한 타이틀을 보라. 색색 가지 고운 크레용이 가득한 크레용 박스를 선물로 받은 어린 시절의 즐거움, 그 흥분된 마음을 이번 앨범에서도 느끼게 하고 싶었다는 그녀의 말처럼 다양한 장르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단, 그 장르가 모두 탁월한 리듬과 소울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이 매력적. ‘전설적인 도나 썸머식’ 댄스 감각과 보이스가 어떻게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태어났는지 느끼는 것이 감상 포인트일 것이다. 릴리 알렌, 핑크, 나타샤 베딩필드, 리아나 등의 앨범에 참가한 히트 작곡가들의 참여로 완성된 대중적인 감각은 2008년의 엣지한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Crayons]의 12트랙을 듣다 보면 그녀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무시하지도 않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즐기면서 현재 원하는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크레용 박스를 여는 첫 트랙은 “Stamp Your Feet”. 파랑과 흰색이 조화된 발랄한 느낌이 드는 곡으로 원제를 “The Player’s Anthem” 이라 부를 정도로 치어링 업(Cheering Up) 한 곡이다. 인생이란 필드에서 뛰는 우리네들에게 주는 도마 썸머식 '으쌰 으쌰' 파이팅 송이자 희망적인 메시지 송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가장 잘 나가는 힙합/알앤비 프로듀서 중 한 명인 J.R. 로템(J. R. Rotem)이 디스코 퀸의 컴백선물로 선사한 "Mr. Music"은 보라색의 끈적한 섹시함이 느껴지는 곡. 마치 마돈나의 “Music” 을 들었을 때처럼 짜릿한 기분을 주는 건 사랑도, 실연도 아닌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음악에 대한 열정에 대해 노래하기 때문이다. 마돈나가 “Music Makes The People Come Together”라고 음악이 주는 보편적 기쁨에 대해 노래했다면 썸머는 “Hey Mr. Music Keep Me Focused“ 이라고 자신 내면을 바꾼 Mr. Music에 대한 찬사를 쏟아 놓는다. 그렇다면 Mr. Music 은 누구일까? ”Mr. Music 은 그 누구도 될 수 있어요. 클럽 디제이, 라디오 디제이, 아침에 노래를 들려주는 사람 등 음악으로 당신을 들뜨게 한다면 그 누구도 될 수 있죠." J. R. 로템과 닐 보가트(Neil Bogart)의 참여로 감각적인 해석이 단연 돋보인다.
가장 재미있는 트랙으로 꼽는 "The Queen Is Back”은 마치 붉은 레드를 연상케 하는 곡인데 사실 본인의 입으로 스스로 여왕의 복귀라고 소리쳐 부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녀 자신도 인터뷰에서 밝히듯 “자신감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나 자신을 놀림감으로 만들기로 했죠. 당돌하게 보이겠지만 사람들이 나를 '퀸' 이라 부르니 이 정도 노래는 나와줘야 하지 않겠어요?" 결국 치기 어리게 들릴 수 있는 곡이 굉장히 매력적인 곡으로 완성되었다. 음악을 듣는 순간 파워와 가사, 모든 면에서 이 앨범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트랙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썸머식 댄스 곡을 원하는 팬들을 위한 ‘핫 핑크’ 트랙은 레트로 모던 댄스 트랙 “I Am Fire”. 많은 가수들이 ‘디스코’ 필이 나는 피쳐링 가수를 써서 만드는 유행을 그녀는 오리지널로서 보여줬으니 이제 댄스 플로어를 달굴 일만 남은 듯하다. 이미 댄스 리믹스로도 싱글 커트되어 그 리듬감을 인정받았다.
서정적인 발라드 “Sand On My Feet”는 12곡의 트랙의 중간에서 잠시 쉬어갈 타이밍을 주는 하얀색의 편안함이라면 진정한 팝송 “Science Of Love”는 부담 없는 그레이 컬러, 월드 뮤직의 색채가 담긴 팔색조 느낌의 “Driving Down Brazil”까지 캐치(Catchy) 한 사운드가 매력적이다.
결론적으로 [Crayons]은 더 이상 (우리가 생각했던) 디스코 앨범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필이 담긴 잘 만들어진 흑인음악 앨범이다. 그런데 그것이 대단한 이유는 골드프랩 (Goldfrapp), 모로코 (Moloko)등 그녀의 영향에서 음악적 자양을 키운 언니들이 2000년대 음악 씬을 휩쓰는 사이 과거의 브랜드가 되기를 거부한 도나 썸머가 예순의 나이에 먼지를 털고 다시 음악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멋진 음악으로! 하나와 또 하나의 색이 모여 전혀 다른 색을 만들어 내는 것을, 그 색이 모두 모여 검은색이 아닌 무지개 색이 되는 것을 이 앨범을 통해 느낀다면 이제 남은 것은 바로 댄스 플로어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며 신나게 춤을 추면서 드는 생각, '역시 유행은 돌고 돈다'
글: Justine Kim (Festival Generation/대중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