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절규에서 허우적대는 영혼들의 등불을 밝혀주는 외침.
폐허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위대한 파괴자들.
일본 극강의 포스트 하드코어 밴드
엔비(Envy)의 정점을 담아낸 2003년도 걸작 [A Dead Sinking Story]
한국 공연 당시 첫 곡으로 연주됐던 앨범의 첫번째 트랙 [Chain Wandering Deeply]에서 이미 변화의 징조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격동과 비애의 끝에 느끼는 극한의 절망이 마음에 꽂힌다. 한층 깊어진 소리의 물결이 머리 끝까지 차오른다. 무엇보다도 매우 드라마틱하다.
[Evidence]에서는 일전에 언급한 바 있는 일렉트로닉한 소스들로 채워져 있는 스킷 트랙이다. 3분 여 동안 펼쳐지는 이 엠비언스 사이에 뭔가가 비집고 터져나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대로 끝난 채 다음 트랙의 절규로 넘어간다. 분노로 이끌고 가다가 중반부에는 아무런 반주없이 읊조리는 노래 부분이 등장하기도 하는 [Color of Fetters]는 결국 중반부에 침묵의 끝에서 급변동하는 굉음을 들려주면서 청자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역시 습기찬 어두운 엠비언스로 가득한 긴장감 감도는 트랙 [Conviction That Speeds]에서는 과연 언제쯤 터질지 모를 불안감을 엄습시키면서 청자들의 항문을 조이게끔 만들지만 역시 5분 여의 시간동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투어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이 바로 [Go Mad and Mark]다. 아마 앨범에서 가장 성공했던 트랙이 바로 본 곡일 것이다. 이것은 수렁에 빠져 잠시 멈춰있는 사람들을 소생시키는 찬가이다. 너무나 굉장한 박력과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덧 4분의 3박자 하드코어의 교본과도 같은 트랙이 되어버렸다. 라이브에서는 앨범보다는 약간 더 느린 템포로 연주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진중한듯 싶은 라이브에서 일단 다시 한번 접하고 싶다.
장장 12분에 달하는 [Will Remains in the Ashes]는 소리와 함께 침전된다. 특히 곡의 초반에 반복되는 멜로디는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전개방식이다.
8분 여부터 휘몰아치는 기타는 사실 약간은 건조한 으르렁 거림으로 조지고 있지만 그러면서 하드코어 특유의 단단한 모양새를 간직하고 있는 듯 보인다. 곡은 "작별은 불완전하다. 믿음과 의심, 그리고 비로소 시작된다."라는 대목으로 종결 짓는다. 앨범이 끝나는 그 순간, 우리는 실제 우리의 삶과 마주쳐야만 한다.
앨범이 끝나면 말로 표현할수 없는 여운과 허탈감이 습격한다. 수렁에 있는 절망감 보다는 희망이라고 생각되는 빛의 부분이 늘어나긴 했다. 하드코어의 철학을 한단계 올려놓았다. 엔비 자신의 신념의 힘이 본 작에 머물고 있다. 그 절대적 신념의 뒷편에는 절규와 희망이 혼재하고 있다. 광기 속에서 괴로운 채 허덕이며 거칠게 자르는 감정의 물결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당시에는 신/구 팬들이 찬반 양론을 펼쳤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다양하게 섞이는 것이 추세가 되면서 그런 이분법은 별로 중요한 요인이 되질 못했다. 굳이 이게 어떤 종류의 것이라고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 단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음악적 형식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Great Destroyer
수많은 사람들이 엔비의 베스트 작으로 꼽고 있는 앨범인 [A Dead Sinking Story]는 곡의 구성과 가사, 그리고 특유의 세계관이 제대로 각을 잡아내고 있다. 자신들의 능력을 200퍼센트로 끌어올렸으며 결국 새로운 팬층을 양산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전작 [All the Footprints You've Ever Left and The Fear Expecting Ahead]가 소리의 벽이라고 하면-물론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본 앨범은 강, 혹은 바닷가의 해일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그 물 구덩이에 빠져있는 것이 가끔은 괴롭고 무섭지만 그 속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희열의 소용돌이는 오히려 살고싶다는 생(生)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이것이 푸르고 안타까운 청춘의 하드코어인지, 혹은 하드코어를 넘어선 흑백의 어느 경지인지는 모르겠다. 가끔씩 앨범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던 세계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절대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으면 안된다. 결국 스스로를 격리시킬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본 앨범이 감옥이 될지 혹은 해방구가 될지는 여러분의 의지에 달렸다.
환율이 개판인 작금의 시기에 여러분들이 공연 직전 새롭게 라이센스되는 본 작을 듣고 엔비와 함께 절규했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불싸조 따위가 오프닝이 아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더욱 이들의 2009년 서울 공연을 지켜봐야만 한다. 분노, 절망, 그리고 희망, 이 모든 것이 앨범에 차 있다.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이 기회에 부디 손에 넣기를 바란다.
그림자가 있기 때문에 빛이 있다. 이 두 요소는 극과 극이지만 그 텀은 가끔씩 한끝발 차이로 느껴지곤 한다. 그렇게 멀리, 그렇게 가까이(Far away, So Close!).
한상철(불싸조 http://myspace.com/bulssaz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