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자베스 (Nujabes)의 소울메이트 이자 전세계 재즈 힙합 붐의 신호탄을 던진 천재 비트 메이커
팻 존 (Fat Jon)의 2001년 첫 정규 앨범.
다이나믹하면서 로맨틱한 소스와 소울풀하면서도 정적인 질감으로 다운템포/ 칠아웃/ 앱스트랙트/ 언더그라운드힙합 계에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세기의 클래식.
파이브 디즈를 통해 맹활약하고 있던 팻 존은 2001년도에 첫 솔로앨범을 공개한다. 앨범에 스스로가 표기해놓은 대로 이것은 일종의 컨셉 앨범이다. 커버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The Ample Soul Physician" 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모리스 갤락티카(Maurice Galactica) 라는 유러피안 플레이 보이같은 새로운 얼터 에고를 창조해 냈다.
어느 해외 블로거는 본 작에 대해 '21세기 힙합씬에 등장한 역사적인 걸작'이라고 까지 언급하기도 했다. 비교적 컴팩트하게 주조된 이 인스트루멘탈 힙합 앨범은 음반커버에서부터 일단 눈길이 멈추게끔 만드는데 정작 내용에 있어서는 앨범 커버와는 다르게 내성적이고 차분하다. 만일 당신이 음반 커버에 매료되어 관심을 갖게 됐을 지라도 음악을 들은 후에는 오히려 낚인 것에 대해 감사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미 커버에서도 엿볼 수 있는 빈티지/레트로한 분위기와 사교계의 무드, 그리고 어딘지 모를 앱스트랙한 직공기술은 치밀하고 정교하다. 유연한 힙합앨범인 동시에 달콤한 일렉트로닉/ 칠 아웃 레코드이기도 하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피아노는 샘플링 된 소스도 있지만 팻 존 자신이 직접 연주한 부분들도 존재한다. 그의 몇몇 작품들이 그렇듯 트랙마다 자신이 직접 적어놓은 코멘트가 달려있다. 들으면서 읽어보면 흥미로울만한 것도 있다.
플룻과 휀더 로즈, 혼 섹션과 속삭이는 목소리는 대부분 에코가 걸려있으며 차례로 등장하고 사라져간다. 담담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짜여진 비트는 그 덧없음을 더욱 강조한다. 이런 요소들은 재지한 감성과 능숙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브레익 부분에 심벌을 넣는 타이밍같은 것을 미루어 봤을 때 락의 다이나믹함을 강조한 드러밍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재지한 비트운용이 더욱 짙게 감지된다.
다이얼로그와 업템포의 비트는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평정을 되찾는다. 첫 곡 [At the Bar]는 그렇게 전개된다. 꿈을 꾸는 듯한 공간감이 묘한 분위기를 주조해내는 [14 Years], 중반부에 등장하는 재즈 피아노가 인상적인 드라이브감 넘치는 [Triple Gold Daytons], 색소폰을 중심으로 무드있게 전개되는 [No], 그리고 [No]의 연장선에 놓인 듯한 [Tell me]가 스무쓰하게 이어진다.
스네어 롤링이 중심이 된 리듬 패턴과 팬더 로즈의 음색, 그리고 아이디어가 이색적인 [The Queen and I], 거친 드럼 톤과 혼 샘플에 비트가 얽히는 앱스트랙한 [Backseat Anonymous], 검게 빛나는 서정적인 힙합튠 [Change Your Mind], 피아노가 리드하는 소울풀하고 경쾌한 하모니를 가진 [Exact Space] 또한 청자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개인적으로 앨범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트랙은 바로 [I.Dee]이다. 이 아름다운 브레익비트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데, 앨범에서 가장 이색적이고 대중 친화적인 트랙이라 하겠다. 그는 확실히 당시 일렉트로니카와 힙합의 장점을 적절하게 배열하는 몇 안되는 아티스트였으며 후에 이런 류의 방식을 유행하게끔 만든 선구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바로 본 트랙을 통해 입증됐다.
격렬한 빗소리와 함께 전개되는 [Raindance (Remix Instrumental)]에 대해 누군가는 21세기의 클래식 튠이 될 것이라고까지 단언하기도 했다. 곡은 비장하면서도 서정적인 무드를 품고 있다. Five Deez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Pretty Pussy Killy Kat]은 리듬파트가 강조된 부유한 사운드와 경쾌한 스크래치로 우울한 플룻이 오히려 생동감있게 들리고 있다.
재즈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추천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최초 앨범이 발매된 레이블인 카운터플로(Counterflow)에서는 부드러운 테크노나 일렉트로닉 비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권한다는 문구를 삽입하기도 했다. 사실 카운터플로의 카탈로그를 살펴보면 일렉트로닉과 힙합 사이에 존재하는 레이블이긴 했다. 이미 파이브 디즈 당시부터 친분관계가 있었지만 자신의 솔로앨범을 카운터플로에서 발매한 것은 서로에게 무척 적절했던 것이다. 당신이 랩 뮤직의 팬이고 인스트루멘탈 힙합이 익숙하지 않아도 본 작은 약간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될 것이다.
Erotic Tales
멜로우하고 심플하다. 모든 소리의 밸런스가 절묘한데 감성적인 측면에 있어서 그가 왜 이 분야의 최고인지를 가늠케 해주는 증거물이 되어준다. 이미 정평이 나있지만 그 재능과 센스에 감복할 수 밖에 없는 뛰어난 트랙들만으로 완성되어 있다. 이것은 확실히 앱스트랙과 재즈 힙합, 그리고 다운 템포 일렉트로닉 사이에 존재하는 레코드이다. 다양하지만 의외로 화려한 맛은 덜하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 쉽게 질리지 않는, 오히려 들으면 들을 수록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한 장이라 하겠다. 서늘한 가을에 이것은 가장 훌륭한 배경이 되어 줄 것이다.
본 작은 독일로 옮겨 살기 이전에 제작됐다고 한다. 즉 아직 대대적으로 일렉트로닉한 소스가 도입되기 직전의 작품이라는 뜻인데 당시에는 올드하고 깊은 소리를 만들어 내면서 오히려 지금에 와서 초기작들을 사랑하는 팬의 수를 늘려갔다. 덕분에 비교적 가장 최근에 발매한 [Repaint Tomorrow]는 이 당시의 분위기로 다시 회기하고 있기도 하다. 팻 존은 안티콘(anticon)과는 다르게 좋은 의미로서 힙합에 구속되지 않는 작업물들을 만들어 왔다. 역으로는 다른 여러 요소들을 힙합에 집약하면서 발군의 센스와 기량을 보여주곤 했다.
매우 풍부한 소리를 담고 있지만 가끔씩은 외롭고 슬픈 공기들로 채워져 있기도 하다. 화려한 향락의 틈에서 생성된 자조적인 허무가 비춰지곤 한다. 자신만의 아름다운 세계관은 이 초기시절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쓸쓸하지만 항상 곁에 두고 싶은 로맨틱한 칠 아웃 앨범이다. 앨범은 이따금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팻 존이 본 작에 직접 작성한 라이너 노트는 이런 글귀로 마무리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글귀는 이 해설지의 끝부분에도 적절하다.
"이 레코드는 당신의 인생(특히 당신의 성생활)을 위한 사운드트랙 입니다. Enjoy!."
한상철(불싸조 http://myspace.com/bulssaz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