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할 만한 단 한 사람의 역량, '두 번의 겨울이 만든 이야기' - 규원 1집
원맨밴드로 차분하게 자신이 느끼는 신념, 죽음, 시간, 선택,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청자에겐 애매한 이미지로 남는 왠지 미스터리하지만 좋은 음악.
추억은 당신보다 아름답다, Kill the Snake 등의 기 발매 곡으로 이미 범상치 않은 잠재력을 짐작케 했던 뮤지션 규원이 드디어 정규 앨범, '두 번의 겨울이 만든 이야기'로 돌아왔다. 전작을 계승하는 듯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새로워진 이번 앨범으로 그는 몇 가지 면에서 진실로 놀랄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보컬을 비롯하여 어쿠스틱 기타, 건반, 일렉기타, 베이스, 드럼 미디작업 등 연주는 물론, 레코딩, 믹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홀로 통괄하는 철저한 1인 제작 방식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수준에 있어 상당한 발전을 이룬 듯하다. 저마다 개성을 갖춘 각 트랙에서 큰 무리 없는 무난하고 편안한 연주와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또한 규원은 그가 누구보다도 가사에 신경을 많이 쓰는 뮤지션임을 이번 앨범에서 여실히 증명한다. 각각의 곡이 전하는 이야기와 앨범 전체의 큰 틀에서 해석되는 주제 등 여러 차원에서의 해석이 가능한 가사는 본 앨범의 가치를 한층 끌어올려준다. 사운드 측면에 있어서도 그는 개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수준 있는 작사/작곡을 뒷받침하며, 나쁘지 않은 음색을 들려주고 있다. 저예산, 수공업, 홈레코딩으로 잘 알려진 여타 인디뮤지션들의 상당수가 사실은 결코 나쁘지 않은 환경에서 앨범을 녹음하고 발표하는 것을 감안하면, 방음조차 없는 가정집 방안에서 탄생한 규원의 결과물이 더욱 놀랍다.
보다 깔끔하고 정교해진 연주와 보컬
비교적 대중적인 어필을 염두하고 쓴 곡으로 보이는 '사진 찍지 마요'나 '기찻길' 등의 트랙에서는 늘 보컬이 큰 단점으로 부각되던 그의 예전 곡들에 비해 좀 더 '노래하는 사람'에 근접한 가창 스타일을 느낄 수 있다. 음색은 전 앨범을 통틀어 순수하고 꾸밈없는 느낌으로 큰 변화 없이 흘러가지만, 각각의 곡 분위기와 가사에 묘하게 들어맞으며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신비하게 듣는 이의 마음에 속삭이듯 전해진다. 심지어 'the Last Soldier on Earth'와 같은 곡에서는 약간의 비장미까지 느껴진다.
도입트랙에 이어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이삿짐'은 시작에 잘 어울리는 감성적 편곡이 돋보인다. 차분하고 무리하지 않는 기타 연주, 두고 간 이삿짐에 사람의 마음을 비유한 이야기가 좋다. '사진 찍지 마요'에서는 단단하고 깔끔한 베이스 연주, 중독성 있는 후렴구, 맨 마지막 부분의 변박이 이루는 다채로움이 두드러진다.
규원은 이번 앨범에서 기타 연주 역시 절제하듯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거의 모든 곡의 중주를 차지한 기타 솔로는 곡에 드라마를 더해주고 있고, 'Winter Surfing'에서는 아예 본격적인 일렉기타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이런 다양한 가능성이 앞으로의 규원을 더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유치한 만담도 싫다. 패배자의 노래도 이젠 진부하다. 개똥철학은 더 싫다. 이야기만이 좋다. 이야기가 어려우면 차라리 순수한 이미지만 전달하자."
그의 말을 인용해 본다. 그가 이번 앨범의 가사를 만들며 선택한 노선이다. 그렇다면 그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혹은 이미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연 성공적으로 전달될까?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분명 제가 생각하고 있는 앨범 전체의 이야기, 그리고 각각의 곡에 담긴 이야기가 모두 있긴 있어요. 각각의 곡을 앨범의 틀에서 해석하면 의미가 약간 달라지기도 하고 그래요.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앨범이 신념, 죽음, 시간, 선택, 운명을 다루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들이 앨범을 이해하는 키워드라는 거예요. 적어도 제가 만든 의도는 그렇죠. 허나 듣는 사람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많이 남겨 놓았어요.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애매하다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 이야기와 이미지의 경계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거예요. 정작 제 이야기의 뼈대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고 불친절하기 짝이 없지요. 그런데 곡마다 확실한 이미지가 있어요. 나머지는 듣는 사람이 상상해야 합니다(웃음). 원래 제가 의도한 이야기는 지금 당장 주절주절 설명하기보다 나중에라도 책으로 엮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가 우리에게 혹시 짝이 맞지 않는 퍼즐을 던져 준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어떠랴, 가위 질이라도 해서 나만의 그림을 만들면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1번 트랙과 10번 트랙의 공통적인 비프(beep)음으로 하나의 큰 이야기를 형성하는 '두 번의 겨울이 만든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의 손에 남겨졌다. 하지만 그가 던져준 키워드만은 확실히 사실인가보다. 앨범 곳곳에서 그런 이미지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사랑 발라드로 보이던 '기찻길'에서 조차 파괴, 혹은 극단 적인 선택이 부르는 찢어짐 등의 이미지가 숨어있다. 의도적으로 '디지털'이나 '각막' 같이 튀는 단어를 선택하여 가사를 쓴, '사진 찍지 마요'에서 특히 '각막'은 앨범 전체를 꿰뚫는 '죽음'의 이미지와 연관되는 의도로 보여 흥미롭다.
영어로 쓰인 두 곡이 바로 신념과 선택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부분으로 여겨지는데 영어의 라임도 신경 쓴 작사 실력이 눈길을 끈다. 여기에 세련된 편곡과 멜로디가 더해져 흡사 팝송을 듣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뻔 했으나, 아쉽게도 토종 한국인의 발음 흔적을 지우지 못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영어 발음이 별로여도, 혹시 문법이 틀리더라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영어로 떠오른 가사와 그에 어울리는 멜로디와 리듬을 포기하기 싫어서 영어가사를 쓰니까요." 그의 말이다.
가사와 앨범에 대해 그의 인터넷방송(http://afreeca.com/zipha9)을 즐겨듣는 한 애청자의 말을 인용해본다.
"잔잔하지만 내면적인 균열이 섬세하게 표현되기도 하고, 20대의 사변적인 감성도 묻어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한남자의 성장기적 자아와 음악 속에 배어 있는 외로움과 거북스럽지 않은 가사가 주는 듣는 이에 대한 정중한 배려, 기존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감성 등 다양함이 느껴진다."
방구석 1인 밴드의 실험과 도전이 이룬 놀라운 성과
하나하나 꿈을 이루어가고 있는 신인 뮤지션 규원, 그가 가지고 온 새 앨범은 분명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가 지피기 시작한 불꽃이 행여 꺼지지 않도록 그의 음악이 꼭 가치를 인정받았으면 한다. 1인 밴드의 외로움과 한계를 딛고 썩 괜찮은 앨범을 발표해준 규원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언니네 이발관'의 기타리스트, 이능룡의 추천사를 덧 붙여본다.
"겨울이 다 되어가는 계절, 한 해의 이런 저런 마무리를 하기 위해 뛰어 다니던 나를 한 친구가 불러 세우고는 수줍게 말을 건넸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사소할지 모르지만 용기라는 것이 필요하겠죠. 어른처럼 보이는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용기의 문제를 벗어날 것이라 생각하지만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쉽지만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가던 길을 계속 나아가고만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규원'이 들려준 음악에는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는 용기가 있습니다. 어지럽게 흘러가는 도로에서 자신을 잠시 내려놓고,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수줍게 입을 연 그의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여 봅니다. '규원'의 흑백 프리즘을 통해 본 세상이 어느새 익숙해지고 음악에 나의 추억을 얹게 됩니다. 그의 음악은 청자의 이야기를 예쁘게 담을 수 있는 좋은 그릇이 될 것입니다. 담담하게 자신을 노래하며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한 '규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언니네 이발관 기타리스트 이능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