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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내한공연을 앞둔 Lamp의 4번째 정규 앨범
1년 반의 제작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팝의 엣센스.
70's 팝/브라질리안 사운드, 그리고 일본 유수의 고전 팝 밴드들의 영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램프(Lamp)의 네 번째 앨범 [ランプ幻想(램프환상)]
2008년 12월 3일 앨범 발매를 앞두고 램프의 마이스페이스(http://www.myspace.com/lampjapan)에 새 앨범 수록곡인 '덧없는 봄의 1막(?き春の一幕)'이 공개되었다. 인터뷰에서도 그랬고, 이후 발언에서도 '하나의 앨범으로서 들을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든다'고 했던 앨범의 곡을 한곡만 따로 공개한다? 그것도 앨범 발매 전에 풀 음원으로? 조금 놀라웠지만 찬찬히 한번을 감상하고, 다시 한번, 또 한번을 자리에 앉아 집중해서 들어보고 나니 자연스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방식을 사용하되, 지금까지 했던 것과는 또 다른 결과물을 들려주고 있었다. 이번 앨범이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어떻게 달라질지, 그리고 이들이 어떤 앨범을 만들었는지 이 한 곡을 들음으로서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램프는 이제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사실 시간을 들여 3장의 정규앨범을 차근차근 발매하고 미처 싣지 못한 결과물들을 모아 한 장의 씨디로 갈무리함으로서 하나의 이음새를 꾹 짚어주었던 밴드로서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램프는 전직 뮤지션으로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아버지로부터 자연스럽게 많은 음악을 접하며 자란 소메야 타이요(染谷大陽, 기타/건반)가 고교 1년 후배인 나가이 유우스케(永井祐介, 기타/베이스/건반)와 함께 결성한 유닛에 여자 보컬인 사카키바라 카오리(?原香保里, 플룻/아코디언)가 가세하여 결성되었다. 시부야케이, AOR, 시티팝 등 다양한 수식어가 그들을 따라다니지만, 본디 음악 매니아로서 비슷한 음악취향을 바탕으로 의기투합한 그들이니만큼 이들이 영향 받았다고 토로하는 뮤지션들을 카테고리 별로 분류하는 것이 오히려 이들의 음악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마이스페이스에 친절하게 공개된 'Influences'란을 보자. 일단 팝 밴드의 영원한 이상향인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가 눈에 띈다. 비틀즈는 말할 것도 없고(나가이 유우스케는 중학교 3학년 무렵 산 비틀즈 음반을 계기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한다), 비치 보이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정교한 보컬 하모니 역시 램프 음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다음은 싱어송라이터들이다. 먼저 대중적인 임팩트는 덜했던 대신 자기 색깔이 분명했고 적어도 한번 이상 스튜디오 레코딩과 장기간 연애에 빠진 적이 있는 서양 남자들의 이름 : 토드 룬그렌(Todd Rundgren), 마이클 프랭스(Michael Franks), 르로이 헛슨(Leroy Hutson), 션 레논(Sean Lennon). 그리고 보컬에서도 곡과 가사에서도 동서고금에 유래 없는 감성을 갖고 있었던 일본 여자들의 이름 : 마츠토야 유미(松任谷由實), 오오누키 타에코(大貫妙子), 요시다 미나코(吉田美奈子). 마지막으로는 조빔(Antonio Carlos Jobim)과 벨로주(Caetano Veloso)를 위시한 브라질리언 뮤직의 장인들과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나 마빈 게이(Marvin Gaye)같은 소울 명인들이 있다. Lamp의 사운드 및 이들이 지향하는 바를 대략 짐작하실런지?
주목할 만 한 점은 이 뮤지션들의 대부분이 70년대 혹은 그 이전을 중심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79년과 80년 생들인 Lamp이 본격적으로 음악에 빠지기 시작했을 90년대 뮤지션의 이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이들이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 흔히 따라붙는 시부야케이(澁谷系, 도회적 라이프 스타일과 세련된 문화적 코드가 맞물려 90년대 일본을 강타했던 음악조류)라는 수식어는 사실 이들에게 썩 어울리지 않는 레테르라는 생각이 든다. 트렌드를 운운하기에 이들의 취향은 지나치게 고리타분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들은 공공연히 '요즘 음악은 잘 안 듣는다'고 말한다. 이들이 즐겨 듣는 음악은 대부분 엘피 시대, 한 곡을 듣기 위해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대신 턴테이블 바늘을 손으로 내리던 시절, 음반 한 장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약속을 해서 어딘가로 모이기도 하던 시대의 것들이다. 물론 램프의 음악을 이루는 주요 요소들이 소위 시부야케이로 묶이는 사운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도 사실이다. 나긋나긋한 남녀 보컬, 보사노바 리듬과 나일론 기타. 째지(jazzy)하면서도 세련된 코드웍... 하지만 토요일 오후 3시에 신사동 가로수길 커피샵에서 패션잡지를 들추며 새로 생긴 와인바에 대한 리포트 기사에 눈길을 두다 문득 생각난 어학연수 시절의 캐나다 친구 제이미에게 안부 메일을 쓰기 위해 맥북을 꺼내면서 듣기에는 결정적인 불안요소를 램프는 갖고 있었다. 아웃도어가 아닌 인도어 성향, 여러 사람과 함께 듣기보다는 혼자 듣기 좋은 감성. 그리고 드디어 그들은 그 불안요소를 한껏 증폭시켜, 아니 그 불안요소가 전면으로 나선 앨범을 만들고 말았다. 그 결과는?
우선 다시 앨범의 첫 트랙인 [덧없는 봄의 1막]의 얘기로 돌아와보자. 음악을 한다는 것, 좋은 앨범을 만드는 것. 이것을 빼면 딱히 이렇다 할 삶의 의욕이 없어 보이는 듯한 Lamp의 세 사람에게 있어 봄의 이미지란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로 죽을 듯이 나른하다. 떠밀리듯이 시작되는 아코디언의 도입부에 이어 담담히 끼어드는 께느른한 멜로디...꽤 달콤하다. 하지만 곡이 끝날 때까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보컬이 됐든 악기가 됐든 이 곡의 어떤 멜로디도 반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버스(verse)도 후렴(chorus)도 브릿지(bridge)도 없다. 놀랍지 않은가. A파트가 끝나면 B파트, C파트, D파트가 저마다 다른 진행으로 이어진다. 아니 어디서부터가 무슨 파트인지의 경계도 모호하다. 그렇다면 기승전결은 있는가? 텐션이 높아지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그 직후에 바로 오프 템포(off tempo)로 풀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안티 클라이막스도 아니다. 따라 부르라고 채근하는 훅도, 귀를 환기시켜줄 리드미컬한 섹션도 없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원 코드 싸이키델릭 넘버인가? 오히려 그 반대다. 흡사 아무렇게나 줏어든 나무토막을 쥐고 수십 명의 적 앞에 질끈 눈을 동여맨 검객처럼, 팝 밴드로서의 자신들이 가질 수 있는 무기를 다 버린 이들이 들려주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현란한 코드의 향연이다.
무서운 것은 [덧없는 봄의 1막]은 물론 대부분의 앨범 트랙들이 결과물로 놓고 봤을 때 '이지 리스닝'이라는 점이다. 이 점이 램프를 다른 과시형 송라이터들과 갈라놓는 지점이다. 별도의 이론 공부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많은 곡을 들으며 얻은 다채로운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작곡에 임하기 때문일까? 램프의 두 송라이터 소메야 타이요와 나가이 유스케가 만드는 곡들은 그냥 들어서는 절대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 앨범에서는 그런 면모 또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보다 정교하고 보다 까다로운 작업방식을 통해 결과적으로 가장 수수하고 심심한 이지 리스닝을 이룩한다... 이율배반적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비효율적이기도 한 듯한 이런 방식을 통해 이들은 지난 앨범들이 가지지 못했던 더 큰 소득, 다름아닌 '무드'를 획득한다. 소설이 되었든 영화가 되었든 기억에 남는 구절 한 줄 인상에 없이 끝났는데도 오래동안 그 특유의 '무드'가 마음에 남아있는 작품이 있지 않은가? '아 이 노래 멜로디가 너무 좋아'라던가 '이 가사는 꼭 내 얘기네'같은 것 말고 노래가 흐르는 동안 그저 어떤 강렬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 노래나 가수와는 무관한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볼 수 있는 것 말이다. 리더 소메야 타이요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애초에 이 앨범에 대해 가진 아이디어의 원점은 '물거품기담(泡沫綺譚, 비정규 앨범 [잔광] 수록곡)'과 '스무살의 사랑(二十歲の戀, [램프 환상] 수록곡)이라는 곡들입니다. 모두 1집 앨범 전인 2001년 정도에 만든 곡인데요, 그런 정취를 곡 단위가 아닌 앨범 단위로 내보고 싶었습니다. 이 아이디어 역시 1집 제작 이전부터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두 곡은 해피엔드(はっぴいえんど)의 앨범 [카제마치 로망(風街ろまん)'의 가사가 구축한 세계나, Harpers Bizarre의 노래 [Me, Japanese Boy]의 분위기, 이를 테면 그런 것에서 출발한 것이죠. 또한 사운드적으로는 Caetano & Gal의 [Domingo]에서 들을 수 있는 Dori Caymmi의 편곡과 영국의 60년대 그룹 Nirvana식 편곡의 영향도 있습니다. Piero Piccioni도 빼놓을 수 없죠."
그가 의도한 무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이해하기 위해 저 레퍼런스를 다 찾아서 들어볼 수도 있겠지만 훨씬 더 간단한 방법을 소개한다. 잠시 이 해설지를 덮고 앨범 자켓을 보시기 바란다. 거기엔 유화풍의 그림 - 일러스트레이터 야마자키 아스카(山崎明日香)의 작품이다 - 과 함께 앨범 타이틀 [ランプ幻想(램프 환상)]가 써 있을 것이다. '환상'이다. 실제와 유리된 생각과 이미지.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고, 괴었다가는 떠내려가는 신기루를 음악으로 표현하면 이럴까. 달콤하다고 생각한 순간 조가 바뀌며 멜로디는 뇌리에서 사라진다. 클래식 기타와 현이 있던 자리엔 어느새 울리쳐(Wurlitzer) 건반과 드럼이 들어와 있다. 카오리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가이의 보컬이 들어와 대선율을 받고 가사의 화자도 남자로 변해 있다. 계속 언저리에서 맴돌지만 그 어떤 핀으로 고정할 수 없는 나비처럼, 분명히 저기에 걸려 있는데 아무리 가도 닿을 수 없는 무지개와도 같이 이 앨범은 너무나 다채롭고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환상은 기억에 뿌리 내리고 그리움으로 피어 난다. 역시 예전 어느 때보다도 모호하고 불분명한 가사들도 ‘기억’과 ‘그리움’의 코드로 이해하면 한결 간단하다. 물론 여기에서 ‘간단하다’는 말은 청자 각자가 구체적인 자신만의 심상으로 바꾸기 쉬울 것이라는 이야기일 뿐, 가사의 정해(正解)에 보다 쉽게 닿을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 앨범 가사들의 올바른 독법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쓰임새가 적은 한자를 거의 편집적으로 찾아서 사용하는 특유의 버릇들은 여전한데다(이런 효과를 한글로 옮기기란 무척 어렵다) 종결형과 관형형이 똑같은 일본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고 있어 수식관계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함께 수록될 필자의 번역도 하나의 제안에 불과할 뿐 본 앨범 가사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이 원하는 무드로 흘러갈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애피타이저에 불과할 뿐 해석 방향은 무한히 열려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소메야 타이요 역시 '가사를 아는 즐거움도 있지만 가사를 모르고 듣는 즐거움도 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편이 더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 음반이 이들의 예전 음악에 비해 확 귀에 꽂히는 맛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걸기 좋은 낱곡들도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 어쩌면 예전 앨범들만큼 폭넓은 사랑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지금까지의 어떤 램프 앨범들보다, 아니 그 어떤 아티스트의 그 어떤 작품과 견주어도 하나의 ‘앨범’으로서 소중하다. 이 앨범을 들으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옛날의 어떤 기억이 떠올라 흠뻑 그리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굳이 남에게 표현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개인적인 기억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앨범을 손에 든 당신에게도 분명 그런 기억들이 있을 터이다. 나처럼 꿈꾸고 깨고 다시 그 깨어진 꿈을 꾸고, 붙잡았다 놓쳐버리곤 그 난 데로 다시 헛손질을 해 보며 수십 년을 살아왔다면 말이다. 별 것 아니지만, 정말 별 것 아니지만 이 세상에 당신 밖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소중하고 벅차고 애틋하고 감미로운 기억들이 꽃잎처럼 흩날리고 빛과 그림자가 한데 어울려 쏟아지는 아래 그리운 향기가 코를 알싸하게 메워오는 경험을 이 앨범이 선사해 줄 수도 있다. 단, 조건이 있다. “꼭 혼자서 차분히, 그리고 여러 차례 들어보셨으면 합니다.”(사카키바라 카오리)
*본 해설을 쓰기 위해 별도의 짤막한 이메일 인터뷰와 함께 다음 자료들을 참조하였음
1. 웹진 후무후무(ふむふむ)의 기획기사 [Lamp 롱 인터뷰 ‘바람부는 거리의 음악’] (http://www.humu-humu.net/tokushu/lamp/yokoku/index.html)
2. 음악 커뮤니티 Ooops와의 인터뷰 (http://www.humu-humu.net/tokushu/lamp/yokoku/index.html)
3. 2008년 내한시 인터뷰(2008. 10월 1일자 문화일보, 나일론 2008년 11월호, 마리 끌레르 2008년 12월호)
4. 일본 소속사 Motel Bleu 측의 공식 보도자료
2010년 2월 정바비(Julia Hart, 가을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