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 한국 땅에서 ‘여성 싱어 송라이터’를 논할 때면, 어떤 전형성 같은 것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대개 낭만과 서정을 알리바이로 삼아온 여성 싱어 송라이터 음악들 중 일부는, 정형화된 문법 속에서 과도하게 편안하거나 필요 이상의 투명함으로 저 자신을 변호하고 있었다. 미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태만하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그런 음악들의 황사 속에서, 나는 때로 숨 막혀서 불편했다.
이런 측면에서 야광토끼(본명: 임유진)의 2011년 데뷔작 [Seoulight]를 잊지 못한다. 그런 주요한 경향과는 동떨어진 외부의 서클에서 진입한 그의 음악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을 장식했던 우리 가요계의 어떤 흐름을 떠올리게 해줬다. 바로 그 당시, 절정을 향해 치달으며 인기를 싹쓸이했던 ‘걸 팝’ 사운드다.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불렀던 이지연이 인디 신에서 데뷔해 음반을 내놓는다면 딱 그런 스타일이지 않았을까. 이지연의 자리에 다음의 이름들을 대입해도 결과물은 엇비슷하다. 강수지 & 하수빈. 그렇다고 그의 데뷔작을 오로지 ‘복고’의 관점에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 정리하자면 야광토끼의 음악은, 90년대의 풋풋한 감수성과 프로페셔널한 레코딩, 그리고 2000년대 일렉트로 팝과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야광토끼는 테마를 담고 있는 부분의 멜로디와 가사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방식을 선호했다. 많은 팬들이 야광토끼의 1집을 들으며 “꼭 아이돌 음악을 듣는 것 같다”는 부기를 남겼던 이유다.
야광토끼는 자신의 첫 번째 결과물의 소리에 많은 공을 기울였다.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은 주인공은 미국인 프로듀서 클리프 린(Cliff Lin)이다. 우리에게는 게임 [콜 오브 듀티]의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임유진이 멜로디와 소스를 만들어서 보내면, 클리프 린이 이를 다듬어 편곡하고 녹음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믹스와 마스터링을 해외에서 하는 방법은 최근 인디 신에도 가끔 보이는 방식이지만, 아예 해외 프로듀서가 전담해서 제작한 케이스는 보기 드문 사례다. 자연스레 이 앨범은 아마추어리즘의 미덕을 갖춘 멜로디와 프로의식이 한껏 발현된 사운드의 결합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만듦새를 과시했다.
그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악기는 당연하게도 90년대의 걸 팝과 현재 일렉트로 팝의 공통분모인 ‘신시사이저’, 통칭해서 건반이다. 야광토끼가 솔로로 데뷔하기 전, 검정치마의 키보드를 담당했다는 사실도 이러한 논지에 힘을 실어주는 근거로서 작용한다. 아마도 야광토끼의 음반은 2011년 발표된 모든 작품들 중 몽구스의 그것과 함께 신시사이저라는 도구를 가장 현명하게 활용한 경우였을 것이다.
1집에서 그가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 첫 곡 ‘Long-D’가 대표적이다. 이 노래 하나에 지금까지 설명한 야광토끼 음악의 유전자 정보가 다 들어있다. 이 외에 그루브감이 돋보이는 ‘조금씩 다가와 줘’, 야광토끼의 개성적인 글쓰기와 캐치한 멜로디로 음반 최고의 순간을 뽑아내는 ‘북극곰’ 등도 마찬가지다. 보컬로 한정해 얘기하자면 결코 특별한 가창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운드가 연출하는 분위기와 딱 맞아떨어지는 보이스를 연출할 줄 안다.
[Seoulight]라는 타이틀이 대변하듯, 앨범의 정서는 지극히 도회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과장 없이 유연한 그루브와 담백한 사운드, 간결한 멜로디를 통해 스스로의 생존가(價)를 증명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본다. 여기에는 심지어 프렌치 팝을 연상케 하는 달달한 선율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하이 엔드’로 세공된 도시의 풍경이 살아있다. 그래서 ‘따스한 온기를 내뿜는 서울의 풍경’이라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가 1집을 통해 궁극적으로 노렸을 음악적인 과녁이다.
야광토끼의 음악적인 포커스는 이번에 발표된 미니 앨범에서 더욱 또렷하게 상(象)을 맺는다. 네 곡밖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각 트랙의 개성이 한층 완연해져서 만족스럽다. 전체적으로는 90년대 걸 팝과 신시사이저에 기반한 사운드가 여전한 만듦새로 듣는 이들을 설득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용과 형식이 유달리 꽉 붙들려있어 좀처럼 체위변경이 불가능해 보인다.
사운드와 가사쓰기 모두에서 전작인 1집과 비교하자면 다소는 어두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노랫말에서의 변화가 도드라진다. 야광토끼는 [Seoulight]에서 가사를 통해 일상다반사를 어여쁘고 슬풋한 위트로 길어 올렸다. 혀끝에서는 상큼하지만, 뱃속에 들어가고 나면 왠지 모를 쓰라림이 느껴지는 그런 위트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강도가 한층 짙어졌다. 첫 싱글로 예정된 ‘왕자님’과 베이스 연주가 강조된 ‘플라스틱 하트’가 대표적이다.
사운드도 전작보다는 확실히 ‘하드’해졌다. 이렇듯 사운드가 본진(本陣)을 이루고 그와 적확하게 매치되는 노랫말이 배수진(背水陣)을 치면서 이 작품의 탄탄한 연대를 이뤄낸다.이를 테면 ‘비누방울’은 80년대 신스 팝과 공진하면서 낭만성을 추수하고, ‘플라스틱 하트’는 타이틀만큼이나 건조한 인상의 진행을 들려준다. ‘왕자님’은 어떤가. ‘왕자님’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독설에 가까운 노랫말을 지닌 곡이지만, 사운드와 가사가 요철처럼 딱딱 들어맞는다. 박력 넘치는 도입부로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마지막 곡 ‘첫사랑’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하는 데에 있어 야광토끼의 가장 큰 매력은 아마도 솔직함에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음악에서 이 솔직함이란, 결코 위악적 포즈가 아닌, 일종의 불가피한 전략이다. 그리고 이 솔직함을 엔진과 핸들로 삼아 야광토끼의 음악은 근자에 보기 드문 기운생동(氣韻生動)을 일궈낸다. 인터뷰를 보면 대인관계가 활발한 타입은 아닐 것인데, 음악은 아마도 그에게 감정적 출구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매우 감성적이면서도 동시에 이성적이고,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서늘할 정도로 성숙한 앨범이라고 할까. 그는 결코 그리워하는 대상 때문에 처량하게 눈물 흘리지 않는다. 피동이 아닌 능동으로서 여성인 저 자신을 경영하고 개혁한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음악을 통해 아이돌을 연상케 했다면, 그것은 단지 소리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최근에 등장한 여성 아이돌들의 경향과 놀랍도록 맞닿아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성 싱어 송라이터’라는 오래된 역사에 아직도 미답지가 남아있음을, 야광토끼는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보편적 정서’와 ‘개별적 감수성’을 두루 체화한 뮤지션만이 해낼 수 있는 그 어떤 성취가, 이 앨범 속에는 분명히 녹아있다.
글, 배순탁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음악평론가, @greatt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