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인디 신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정체성이다. 장르, 취향을 넘어서 온전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온 역사가 몇 년 간 인디 신이 걸어온 길이다. 그 과정에서 장르는 목적에서 방법이 됐다. 정서를 쌓고 철학을 구현하는 수단으로서 장르가 활용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굳이 쌍심지를 켜고 음악적 계보도를 그리기 위한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만한 현상은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다변화다. 불과 몇 년전까지, 여성 싱어송 라이터의 이미지는 단 하나였다. 어쿠스틱 기타와 나긋나긋한 목소리. 일상, 치유 같은 테마를 노래하는 이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그들을 ‘여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고착화였다. 이는 한국 대중문화에서 여성에게 기대되는 이미지가 하나, 두 개 정도임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게 단순한가.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특히 목할 만한 결과물을 들고 데뷔하는 일렉트로닉 성향의, 주목할 만한 뮤지션들의 등장은 작지만 의미있는 흐름이다. 지난해 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신인을 차지한 야광토끼, 독자적인 두 장의 신스팝 앨범을 낸 흐른은 그런 경향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데뷔 EP <Echo>로 음악계에 조심스레 명함을 낸 유카리는 이런 여성 일렉트로닉 아티스트의 흐름을 잇는다. 하지만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 그녀의 음악은 기존에 한국에서 좀처럼 듣기 힘들었던 소리를 들려준다. 일렉트로닉의 질료로 빚어낸 드림 팝이랄까. 일곱곡의 노래는 시종일관 몽롱하다. 꿈결에서 들었을 법한 안개의 소리가 배어있다. 많지 않은 트랙수들이 각자의 울림과 또렷한 선율을 가지고 그 몽환의 바탕을 그린다면, 아침에 갓 일어나 녹음한 것 같은 나른한 목소리는 바탕안에 흐릿하게 자리잡은 주인공이다. 프레스코로 자욱하게 그려낸듯한 이 그림은, 흐트러진 소실점안에서 하나의 풍경을 묘사한다. 그 풍경은, 말하자면 슈게이징 밴드가 묘사하는 풍경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무엇이다. 몽환이라는 단어로 묘사할 수 있는 세계이지만 그 결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점이 <Echo>안에 있다. 흔히 말해지는 몽환적 음악들이 주로 담고 있는 우울함 대신 애틋함이, 서사대신 묘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애틋함과 묘사의 흐름은 유카리의 데뷔 EP에서 기존의 전형적인 여성성을 들어낸다. 그 대신, 정갈하고 정적인 그루브를 만들어낸다. 남성성은 존재하지 않되 뻔하지 않은 여성의 그루브를.
한국 일렉트로닉 팝의 2012년을 이이언의 솔로 앨범이 열었다면 유카리는 드러나지 않게, 하지만 기억할만한 음악으로 한 해를 닫는다. 형형색색의, 온기와 냉기를 고루 갖춘 음표의 눈가루를 뿌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