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수많은 신인밴드들의 데뷔앨범이 쏟아진다. 그 많은 앨범들 중 옥석을 가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헌데 신인들의 데뷔앨범에는 따뜻한 시선보다 날카로운 칼날이 가해질 때가 많다. 레퍼런스로 삼은 밴드들이 거론되고, 누구와 얼마나 비슷한지, 그 안에서 얼마나 독창성을 뽑아냈는지가 평가의 잣대가 되곤 한다. 우리는 때때로 신인 나름의 특징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누구와 닮은 점을 집어내는 것에 더 열을 올리는 것 같다. 이는 지겨운 동어반복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비밀리에
‘누구를 닮았다’는 평가는 신인 뮤지션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2012년에 데뷔앨범 <비밀리에>를 발표한 밴드 비밀리에(Bimilie)도 마찬가지의 고충을 겪었다. 사실 비밀리에는 2012년에 등장한 신인밴드 중에서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팀이었다. 외양적으로는 여성보컬을 둔 여타 밴드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일 수 있었지만, 음악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비밀리에의 음악은 분명히 국내에 흔치 않던 감성이었으며,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이들의 음악은 마치 초록색 사과와도 같았다. 겉보기엔 익숙한 사과지만, 예상한 맛과는 다르고, 또 그 맛을 즐기기 쉽지 않은 음악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담고 있는 복잡 미묘한 맛을 알아버린다면, 쉽사리 빠져나오기 힘든 성질의 것이기도 했다.
비밀리에의 탄탄한 음악적 매무새를 접하고 당연히 중고신인이겠거니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비밀리에의 보컬이자 리더를 맡고 있는 혜령은 2009년 말부터 습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몇몇 취미 밴드를 거친 후 검정치마의 객원드러머였던 정경용을 만나 함께 곡을 다듬어나갔다. 혜령과 정경용은 지인들의 소개로 만난 장원일(건반), 구경모(베이스), 도정호(기타)와 2011년 3월부터 밴드의 편성으로 곡 작업을 시작해 넉 달 뒤인 7월에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2012년 1월에 데뷔앨범 <비밀리에>가 세상에 나왔다. 비밀리에의 결성부터 10곡이 담긴 정규앨범 녹음까지 10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혜령과 정경용을 제외하면 다른 멤버들은 밴드 경험조차 전무했다. 혜령은 전곡을 작사 작곡했으며 앨범 프로듀싱까지 직접 해냈다. 새파란 신인들이 모였지만 이들의 데뷔앨범에 담긴 음악은 풋풋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일부 프로페셔널한 편곡이 엿보이기도 했다. 신인이기에 가능할 재기발랄한 아이디어 사이로 성숙함도 느껴졌다.
필자는 처음 비밀리에의 1집 <비밀리에>를 듣고 시이나 링고가 이끌었던 일본 록 밴드 동경사변(東京事變)을 잠시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신인을 만났을 때 닮은 누군가를 찾아내려는 나쁜 버릇 같은 것이었다. 물론 비밀리에는 동경사변과 같이 다양한 음악 장르를 버무릴 줄 알았고, 분방한 악기 편곡, 변박 등을 선보였다. 이는 과찬일수도, 오해일수도 있었다. 비밀리에 당사자들은 이러한 세간의 평가에 대해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상처받기 말길. 그 누구보다도 긴 세월 미국 하드록의 몬스터로 군림하고 있는 에어로스미스(Aerosmith)도 신인 시절에는 롤링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아류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앞으로 만들어낼 차기작이다. 그리고 비밀리에는 1집의 오해를 깨끗이 씻을만한 새 앨범을 들고 나왔다.
<Real>
비밀리에의 새 EP <Real>은 ‘진짜’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제목은 자신들의 취향을 마음껏 보여준 정규 1집에 이어 보다 자신들만의 오리지널리티에 다가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비밀리에 구성원은 군에 입대한 도정호를 대신해 93년생인 이자헌이 새 기타리스트로 들어왔으며 나머지 멤버는 전과 동일하다. 2012년 10월부터 새 앨범 녹음에 돌입한 비밀리에는 1집 때와 마찬가지로 혜령이 곡의 뼈대를 가져오면 나머지 멤버들이 연주로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음악을 완성해나갔다. 다섯 곡이 담긴 새 앨범에서는 작곡, 악기 편곡 사운드 질감에 이르기까지 비밀리에가 ‘진짜’ 자신들의 음악에 다가가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 특히 전작보다 완숙해진 사운드의 완성도는 주목할 만하다. 신보는 전작에 비해 각 트랙의 레이어가 많아졌는데, 그럼에도 산만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는 색다른 사운드를 만들어내려는 비밀리에 멤버들의 노력이 결실을 거뒀기 때문이다. 앨범의 믹싱은 덥스텝 밴드 애프니어(APNEA)의 DJ 최승원이 맡았다.
첫 곡 ‘If’와 타이틀곡 ‘Bye Bye’는 비밀리에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곡들이다. 두 곡은 비교적 차분한 진행 안에서 세련된 사운드 이펙팅을 선보인다. 특히 겹겹이 쌓인 기타 연주를 통해 풍성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If’는 새로 들어온 기타리스트 이자헌의 센스가 돋보이는 곡이다. ‘Bye Bye’는 혜령이 우주로 보내진 강아지 라이카의 일화를 전해 듣고 만들었다고 한다. 친숙한 멜로디로 시작해 우주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이펙팅으로 여운을 남기는 곡이다. 이번 EP에 담긴 ‘상실 2부작’이라 할 수 있는 ‘눈물이 흐르다’와 ‘Heaven Can’t Wait’는 연작 형태를 띠고 있다. 비밀리에 멤버들은 ‘눈물이 흐르다’의 후주 부분을 색다르게 편곡하는 과정에서 ‘Heaven Can’t Wait’을 만들게 되었다. 비밀리에는 1집부터 이와 같은 편곡 방식을 선보인 바 있다. 두 곡들은 절묘하게 이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비밀리에가 가진 초록색 사과와 같은 매력이기도 하다. 신작에서 가장 경쾌한 곡인 ‘생선가시’는 덥스텝에서 주로 쓰이는 와블 베이스(Wobble Bass)를 이용한 곡으로 비밀리에의 톡 쏘는 매력이 응축돼 있다. 다소 공격적인(?) 가사와 어울리는 밴드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곡이기도 하다.
<Real>에서 비밀리에의 음악은 초록색 사과에서 빨간 사과에 가까워진 듯하다. 1집에 비해 보다 잘 익은 느낌이 들어서일까? 한 가지 특기할 점은 <Real>을 반복해서 들어봐도 비교할만한 다른 팀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다 탄탄해진 내공으로 돌아온 비밀리에. 재능 있는 신진 밴드가 착실히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다. 이러한 기쁨을 당신도 맛보길.
권석정 (유니온프레스 음악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