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가능성을 향한 우아한 첫 걸음
R&B와 팝의 편안하고 여유로운 조화
허니지(Honey G) 1집
2012년 가을을 달구었던 ‘슈퍼스타K’의 네 번째 시즌. 여기에서도 다양하고 흥미로운 사연들과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이들이 등장하여 많은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다. 말 그대로 ‘슈퍼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여러 참가자들은 멋진 노래 솜씨와 비범한 감성과 개성, 남다른 열정으로 무장한 채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한껏 뽐냈다. 그리고 ‘슈스케 4’의 첫 방송으로부터 약 1년이 지난 후, 월등한 가창력과 아름다운 보컬 하모니로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던 3인조 보컬 그룹 허니지가 음악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본격적인 출발점에 섰다. 이미 ‘슈퍼스타K 4’를 통해 등장한 여러 아티스트들이 정규 앨범과 미니 앨범, 싱글 등을 발표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허니지의 데뷔는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오랜 움츠림처럼 보인 이들의 시간은 도약을 위한 숙성의 기간이었다. 이제 무르익고 다듬어진 그 순수한 감성은 세련되고 매력적인 옷을 입은 채 듣는 이에게 즐거움과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휴먼 드라마의 강조’라는 ‘슈퍼스타K’ 방송의 정체성은 늘 여러 이야깃거리를 동반해왔는데, ‘방송을 통한 결성’이라는 전례 없던 과정을 통해 탄생된 허니지는 그 출발점부터 흥미로운 드라마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애초 배재현과 권태현, 한찬별로 구성되었던 보컬 그룹 허니 브라운과 뉴욕에서 온 박지용, 토니의 팻 듀오는 지역 예선을 통과한 슈퍼위크 진출자들이었다. 뇌수막염으로 인한 하반신 마비라는 장애를 가진 한찬별과 앞니가 빠진 채 오디션에 참가한 권태현, ‘슈스케 3’에서 고배를 마시고 파트너를 바꾸어 참가한 박지용 등 각각의 사연을 지니고 있던 이들은 슈퍼위크에서 탈락한 후 제작진과 심사위원들에 의해 새로운 기회를 부여 받았다. 두 팀의 구성원 중 배재현, 권태현, 박지용이 하나의 팀이 되어 무대에 오른다는 조건으로 생방송 진출 자격을 따내게 된 것이다. 새로운 트리오의 이름은 허니지(Honey G; ‘허니 브라운’과 박지용의 ‘G’의 결합)로 결정되었다.
방송에 의해 만들어진 팀이라는 결성 배경은 어찌 보면 그룹에 있어 꽤나 부정적인 요소로 자리하게 될 개연성이 큰 부분이다. 음악 그룹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구성원의 (합목적적) 동질성에 바탕을 둔 결속력과 조화 즉 ‘팀워크’인 탓에, 프로그램의 필요에 의해 의도된 조합이 야기할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60년대에 NBC TV의 시트콤을 위해 기획된 밴드인 몽키스(Monkees)의 성공 사례나 철저한 기획에 의해 만들어지는 대다수의 보이 밴드와 댄스 그룹의 경우와 달리 단발성으로 그칠 가능성 또한 배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조합은 성공적이었고, 3회의 생방송을 통해 허니지가 보여준 모습은 걱정과 우려가 아닌 더 큰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짧은 기간 동안 완벽한 균형과 팀워크를 갖추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들이 방송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소울의 감성 충만한 박지용과 깔끔한 고음의 배재현, 안정감을 전하는 권태현의 목소리의 조화와 함께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흥을 전해주었다.
가창의 재능과 더불어 각 멤버들이 지닌 강한 개성과 거부감 없는 친근한 이미지는 허니지의 강한 매력 포인트로 자리한다. 얼굴 생김새가 쌀알을 닮았다는 이유로 ‘쌀알신’이라는 별명을 지닌 박지용이나 빠진 앞니 탓에 ‘이빨신’이라는 별명을 얻은 권태현, 잘 생긴 외모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그룹의 막내 배재현의 어우러짐은 예상 가능한 긍정적 화학반응(chemistry)의 결과를 위한 최상의 조합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근의 국내 음악시장에서 신인으로서는 흔치 않은 ‘정규 앨범’의 형태로 그 첫 걸음이 시작되었다. 사실 이들이 어느 정도 검증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완연히 무르익은 실력이나 천재적 재능을 갖춘 완벽히 준비된 아티스트는 아니다. 때문에 디지털 싱글이나 미니 앨범이 아닌 정규 앨범 데뷔라는 점은 그 바탕에 자리한 뮤지션과 소속사의 마음가짐과 자세에 대한 짐작을 가능케 한다.
우선 신뢰와 자신감이다. 허니지는 이미 ‘슈스케’를 통해 일정 수준의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한 뮤지션이고 데이터에 기반한 대략적인 시장 반응도 유추해낼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상위 그룹으로서 화제의 중심에 자리했던 것도, 강력한 팬덤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아티스트의 실력과 가능성에 대한 강한 믿음과 프로듀서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이러한 결과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불어 제작사는 시장과 트렌드 분석이나 소비자 행태에 근거한 전략에 의거하지 않은, ‘아날로그적’ 태도를 바탕으로 한 음악 작업을 통해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시장과 정면 승부의 방식을 취했다. 마지막으로 아티스트의 정체성 확립에 대한 의지다. 한두 곡이 아닌 정규 앨범으로 데뷔를 장식한다는 의미는 각각의 개별 곡들에 들이는 더한 노력과 거기 담긴 색채 및 향기,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로 아티스트의 기본 성향과 본질을 내보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수반되는 높은 위험성을 감수할 정도의 매력은 허니지의 활짝 열린 가능성을 말해준다.
허니지의 데뷔 앨범은 팝과 스무드 소울(smooth soul), 펑크(funk)의 요소를 담은 컨템포러리 R&B 사운드로 채워져 있다. ‘슈스케 4’의 생방송에서 선보인 세 멤버들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뛰어난 보컬 하모니, 인상적인 혼 섹션(horn section)으로 특징되었던 허니지 특유의 스타일은 앨범에서 고스란히 이어진다. 하지만 지난해의 ‘비켜줄게’, ‘왜 그래’, ‘오래 된 친구’와 이 앨범의 곡들이 전하는 감성과 느낌은 사뭇 다르다. 이전의 허니지가 다소 불안정한 균형감과 거친 약동감을 내보였던 반면 수 개월이 지난 후의 이들의 모습은 매끄럽고 세련된 태도와 외양을 갖춘 댄디(dandy)를 연상케 한다. 편안한 안정감과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각각의 목소리가 이루는 부드러운 조화는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울림이 되고, 여러 곡들에서 펼쳐지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브라스 사운드는 상쾌한 감흥이 되어 몸을 휘감는다. 그리고 이 부분은 앨범의 가장 매력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대중음악에서 혼 섹션은 재즈와 R&B, 소울, 블루스와 펑크(funk), 그리고 록 음악에 이르는 다채로운 스타일에 풍성함과 화려함을 더해주었다. 일반적으로 현악 오케스트레이션이 여성적 섬세함과 감수성을 담은 풍요로움으로 특징된다면 색소폰과 트럼펫, 트롬본, 프렌치혼, 튜바, 클라리넷, 플루트 등으로 대표되는 관악기들의 어우러짐은 보다 직선적이고 강렬한 남성적 에너지를 뿜어낸다.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의 역동적 사운드와 화려하기 짝이 없는 리듬의 향연을 보라. 80년대 이전 시카고(Chicago)의 현란하고 자유분방한 에너지는 또 어떠한가. 대체로 브라스 사운드의 흥겨운 울림은 R&B와 소울, 댄스 음악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며 ‘몸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요소로 자리한다. 즉 (약간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멜로디와 가사, 곡의 구성 등이 청각을 통해 이성과 감성을 작동시키기 이전에 이미 그 특유의 울림이 신경세포를 물리적으로 자극하여 마치 무조건반사와 같은 육체적 감흥을 전해준다는 의미다.
이 앨범에서 혼 섹션은 불독맨션, 스윗 소로우 등과 작업한 바 있는 김명기(색소폰)와 서대광(트럼펫), 우성민(트롬본)이 맡아 몸을 절로 들썩이게 하는 흥겨운 사운드의 향연을 선사한다.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1988년 싱글 ‘Turn On (The Beat Box)’을 멋지게 리메이크 한 ‘그대’를 비롯하여 허니지 특유의 감성과 섬세한 표현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연가 ‘바보야’, 풍성한 리듬감에 실리는 익살스러운 노랫말과 랩이 인상적인 (허니지의 자작곡) ‘배고파’ 등을 가득 채우는 브라스의 펑키한 선율과 그루브는 더할 수 없는 짜릿함으로 다가온다. 2인조 그룹 포이트리(Poetree)의 서정진은 ‘She’s Mine’과 ‘바보야’, 그리고 ‘열대야’ 등 서정적 감성 충만한 곡들을 작곡했다. 그 중 ‘열대야’는 2012년 포이트리가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영준과 함께 노래했던 작품의 리메이크로, 감미로운 슬로우잼(slow jam) 스타일의 곡 전개를 통해 부드러운 허니지의 매력을 전해준다. 아련한 감성을 담은 예스러운 팝 발라드 ‘술이 그립다’는 박지용의 자작곡으로 작곡가로서 그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외에 여러 OST 작업을 통해 실력을 인정 받은 작곡가 김지수와 작사가 김지향, 이 앨범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이효리, 버스커 버스커의 앨범을 프로듀스 한 김지웅, 이효리의 5집 앨범을 통해 작사 데뷔를 이룬 민동숙, 그리고 영국의 작곡 콤비 바나비 피니(Barnaby Pinny)와 제임스 리더(James Reader) 등이 곡자로 참여했다.
이 앨범은 과거와 현재, 투박함과 세련됨, 치밀함과 소박함 등과 같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얼굴들은 반목과 갈등이 아닌 자연스러운 조화 속에서 듣는 이에게 원초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여러 수록곡들의 바탕에 자리한 감성은 과거와 맞닿아 있지만 현대적 감각의 세련된 옷을 입고 있으며, 실력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된 드러냄과 꾸밈 대신 은근하고 수줍은 절제를 통해 소박하고 담백한 매력을 뿜어낸다. 박지용과 배재현, 권태현의 개성은 ‘허니지’라는 이름으로 우아한 하나가 되었다. 마치 하얀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 내려가듯, 충실한 기본기에서 출발한 이들은 예쁘게 쓰인 글씨를 시작으로 넓게 펼쳐진 백지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갈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시작이다.
글/김경진 (대중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