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으로 채색된 묵직한 울림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한겨울의 나뭇잎을 손에 든 느낌이랄까. 이 앨범의 첫 인상은 그랬다. 아, 어쿠스틱 앨범이 이럴 수도 있구나. 어쿠스틱이면 마냥 듣기 편할 거라는 편견이 은연중에 머릿속에 있었구나. 황보령의 어쿠스틱 작업을 간절히 기다려온 사람 중 하나인 내게, 이 앨범은 꽤 낯설고도 자극적인 기습이었다.
큰 틀에서 보면 그녀는 여전하다. 원형을 그리듯 단순하게 순환되는 모티브, 그리고 무심하게 툭툭 끊어내는 노래, 맥락보다는 이미지를 던지는 화법. 듣는 내내 사람을 끊임없이 긴장시키고, 언어를 서사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공간에 붓질을 하는 듯한 느낌도 여전하다.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부드러운 흐름을 타는 곡도 마찬가지, 모두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비트, 혹은 신경을 긁는 부분이 있다. 글로 치면 주어와 서술어의 위치를 일부러 생략하거나 흐트러트리는 식이다.
그럼 이 앨범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일까. 크레디트에 줄줄이 찍힌 이름들 그 자체다. 황보령과 함께 했거나 함께 하고 있는 Rainbow99, 서진실, 조용민, 정현서, 진선이 참여했으며, 2집 <태양륜>의 프로듀서였던 장영규가 믹싱을 맡았다. 그 외에 작곡가 방승철, 타악기 연주자 원일, 싱어송라이터 무중력소년, 피아니스트 장경아, 첼리스트 이지영,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송은지, 심지어 한희정처럼 어지간해서는 접점을 찾기 힘든 이름까지 있다. 종합선물세트가 따로 없다.
이들의 흔적은 앨범 곳곳에 독자적으로, 선명하게 빛을 낸다. 그리고 황보령은 이 많은 손님들을 어떻게 맞아야 좋은지 처음부터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와는 불협화음을 조장하고, 누군가와는 자연스럽게 밀착하며, 또 다른 누군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작곡가 방승철이 선물한 첫 곡 <매일 매일 매일>에서 황보령의 목소리는 참하다 싶을 만큼 순순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에서는 오히려 장경아의 맑고 처연한 피아노 뒤로 보컬이 한 발 물러서 있는 듯한 인상이다. 언어유희 (‘아저-씨발-냄새나’)와 송은지의 코러스가 기묘하게 뒤섞인 <밝게 웃어요>는 스튜디오 레코딩이 아닌 즉흥 퍼포먼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전ㆍ현 스맥소프트 멤버들도 예외가 없다. 마치 황보령과 한 번 붙었다가 떼어낸 것처럼 각자의 개성을 뚜렷하게 내보인다. <어디로>는 반도네온 연주자 진선의 특기인 탱고의 둔중한 완급과 황혼으로 채색된 곡이다. 2분이 채 안 되는 <곤양이노래>에서 귀를 확 잡아 끄는 것은 조용민의 촘촘한 클래식 기타 연주다.
그러니 이 앨범은 사실상 세션 없이 모든 곡이 피처링으로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황보령은 타이틀 곡 <마법의 유리병>에서 가장 강력한 임팩트를 드러낸다. 북과 카혼의 묵직한 울림 사이에서 서늘하게 부유하는 한희정의 목소리는, 황보령의 음악에서 어김없이 불거지곤 했던 특유의 텐션을 만들어낸다. 비유하자면 각종 콜라주로 이루어진 이 앨범의 명함과 같은 곡이다.
사실 황보령이라는 아티스트를 언어화하는 건 무척이나 힘들다. 그녀의 음악은 15년간 정형화된 프레임에 고정된 적이 없었고, 어떤 일정한 개념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어휘와 사투를 펼친들, 나무둥치를 끌어안지 못하고 자꾸 잔가지만 꺾게 된다. 유년기를 미국에서 보낸 뉴요커이면서도 ‘버터냄새’가 전혀 없고, 화가이자 음악가, 얼핏 보면 중성적이고 세 보이지만 잘 웃는 사람 등등. 다만 ‘이질’과 ‘충돌’, '경계' 따위 진부한 표현으로밖에 설명 안 되는 그런 다층적인 정체성이 그녀의 세계를 이루는 한 조각인 것은 분명하다.
이번 앨범은 그것에서 한발 나아가, 더 이상 가감을 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조화되어 있다. 흥미로운 시도인 한편 참으로 황보령스러운 앨범이다. “자기 서가에 없는 종류의 책을 쓰라”는 어느 작가의 격언이 문득 떠오른다. 어쩌면 익숙함을 용납하기 힘들어하는 것, 안정된 지반을 일부러라도 흔들어놓는 것이 황보령의 특이한 작가주의를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의도일 수도 있고, 직관적인 본능에 따른 것일 수도 있으며, 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재능이기도 할 것이다.
- 월간 PAPER 에디터 최승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