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고 많은 이름이 존재합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이들만큼 많은 이름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 많은 이름 중에는 다음과 같이 억울한 운명을 가진 이름도 있습니다.
자신은 평범한 데 왠지 위대해야 할 것 같은 ‘개츠비’가 있고, 권총 따위는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 행복한 노년의 ‘베르테르’가 있는가 하면, 일기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안네 프랑크’, 중요한 미팅에 지각해도 시간을 되돌릴 길이 없는 ‘벤저민 버튼’, 용돈을 안 주는 아버지는 결코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는 ‘길동이’, 이탈리아인 ‘조르바’까지….
이들의 이름은 어떤 대명사적 성격을 가지는 바람에 정작 자신의 단독성을 잠식해버렸습니다. 이름이 개개인의 고유성을 나타내기 위해 붙여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여러분은 ‘앨리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아마도 여러분은 ‘앨리스’라고 하면, 그녀가 토끼굴을 통해 떠났던 어떤 나라를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저에게 앨리스는 ‘시나 쓰는 앨리스’입니다.
[시나 쓰는 앨리스]는 ‘시나 쓰는 앨리스’와 ‘노래나 하는 한상훈’으로 이루어진 2인조 음악팀입니다. ‘시나 쓴다’라는 조금은 자가비하적인 수식어를 저희 두 맴버는 모두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사실 곡을 쓰는 저로서도 스스로 노래’까지’하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노래’나’ 하는 조금은 한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거든요. 시나 쓰고 노래나 하는 두 사람은, 스스로 하는 일이 바보 같다 느껴지더라도 그만둘 수 없었고, 그렇게 계속 노래를 하고 시를 쓰다가 태어난 작품이 바로 [시나 쓰는 앨리스 1집, ‘별이 붕어빵보다 싸서 좋다’]입니다.
선물이라는 것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은, 주는 사람이 떨릴 때입니다. 지금 듣고 계신 이 음반에는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주고받은 11곡의 시와 노래가 담겨있습니다. 이 글을 천천히 읽고 계셨다면, 지금쯤 서로 다른 박자로 연주되는 8개의 악기가 만드는 1번 트랙 [기현상]이 끝나가고 있거나, 아니면 제가 유일하게 가사를 쓴 2번 트랙 [플라스틱 소년의 사랑고백]이 시작하고 있겠네요. 그렇게 두 개의 트랙이 지나가면, 저희의 첫 번째 꼴라보레이션 곡, [별이 붕어빵보다 싸서 좋다]가 건반 멜로디를 쏟아놓으며 여러분을 [시나 쓰는 앨리스]의 세계로 데려갈 거에요.
예쁜 커버 그림을 그려준 ‘까치’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처음 의뢰할 때는 시디를 담는 조그만 종이봉투에 들어갈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는데, 결국, 정식 케이스로 포장된 음반이 나와서 조금은 놀랄듯합니다. 책장을 열고 뒤적일 수 있는 시집과 같은 느낌을 주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모습의 두툼한 앨범이 되었네요.
저에게 앨범 작업은 항상 ‘마지막’이라는 꼬리표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하던 오랜 송라이팅작업을 마무리하자는 생각으로, 녹음기 한 대와 음향조절 프로그램으로 만든 [집에안가요? 1집(2011)], 2년 동안 한 곡도 쓰지 못하며, 이젠 정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여 옛 노래들을 끄집어내 만든 [집에안가요? 2집(2014)]. 얼마 전까지도 ‘집에안가요?’의 마지막 작업으로 계획하던 두 번째 싱글까지…. 사실 이 음반에도 ‘마지막’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로 정식으로 유통되는 정규앨범 형태의 음반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시나 쓰는 앨리스’의 최대 강점은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해체되거나 활동이 중단되는 일 없이 지속해서 노래를 만들어 갈 거라는 것입니다. 앞에 ‘마지막’이라는 낱말을 남발해 놓고 이런 결론은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결국 저의 음악생활은 어떻게든 계속되리라는 걸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거든요(양치기 소년의 최후를 보는 듯합니다). 혹시 저희의 노래를 듣고 다음 활동을 기다리는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안심하셔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네요. [시나 쓰는 앨리스]의 창작활동은 현재 100곡까지 계약되어 있으니까요.
-노래나 하는 한상훈 올림
1. 기현상
2. 플라스틱 소년의 사랑고백
3. 별이 붕어빵보다 싸서 좋다
4. 마음이 차가운 날
5. 눈꽃
6. 궁금해
7. 핑
8. Happy maps
9. 아무것도 아닌 나
10. 나무이고 싶어
11. 맨날 보통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