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ization 행간 읽기
-대중음악평론가 김반야
이 앨범은 철저히 지적 사유와 철학적 사상에 기반한다. 그래서 행간의 의미나 상징을 되씹다 보면 완전히 다른 이미지의, 각각 특정 메시지로 뜻을 세우고 사운드로 형상화된 10개의 다채로운 ‘문명’들을 마주한다. 다만, 전 곡이 직선적인 표현과 조금 더 널리 이야기를 전하자는 포부로 영어로 작사된 만큼 다소 낯설게 들릴 수 있기에, 이 소개글은 밴드 ‘그루' 2집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되었다. 허나 듣는 이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청취를 방해하지 않는 선'을 지키기 위해 작위적인 해설은 붙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음악을 먼저 듣고 가사와 ‘행간 읽기’를 보면 분명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듣는 즐거움이 더해지게 될 것이다.
1. Shadow Painter
문명의 시작이 동굴을 밝히던 최초의 불에서 출발하듯, 앨범을 여는 이 곡은 플라톤의 ‘동굴우화’를 모티브로 한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동굴 속에 살고 있는 가상의 사회에 대중을 빗대었다. 족쇄에 묶여 있는 이들은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 그 그림자의 근원인 동물들이나 횃불을 직접 볼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벽에 투사된 그림자들만이 진실이라고 믿고, 플라톤은 그 사슬을 풀고 나와 불을 직면한 철학자들이 그림자의 거짓됨을 가르치길 주장한다. 이에 대해 ‘그림자 화가’라고 직역되는 이 곡은 차라리 그림자로 그림을 그리자는 역설적인 해석을 제안한다. 끊임없이 일렁이며 타오르는 신디사이저가 마음의 불씨를 태운다.
2. Machines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는 일찌감치 인간의 기계화를 예고했다. 산업화 시대 이후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인간 또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했다. 이는 민주주의와 개인의 붕괴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간에 쫓기듯 달음박질 하는 비트를 따라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면 세상은 어느새 기계의 울음소리로 가득찬다. 가사 “So cry, machines cry”도 울음을 재촉한다. 쇳덩이처럼 차가워져가는 존재에게 가장 인간적인 행위는 바로 자신의 처지에 울분하는 것이라는 듯. 이런 복합적인 심상을 전달하기 위해 단순한 일렉트로닉 프로그램이 아니라 아날로그 소리를 기반으로 한 독특한 사운드를 선보인다.
3. Tree in the Middle of a Forest
아일랜드 철학자 바클리(Berkeley)의 핵심적인 논리는 “누군가가 인지할 때 비로소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숲 속의 나무 한 그루 또한,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른다면,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논리이다. 이는 음악, 슬픔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 소리가 들릴 때 까지 아직은 각자의 나무가 쓰러지도록 포기할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존재를 모두가 알 때 까지, 기타 소리 하나로 표현되는 씨앗이 첼로와 드럼, 신디사이저들이 더해지면서 점점 울창한 큰 숲이 되듯, 각자의 나무를 더 웅장하게 키우자고 도전한다.
4. Love Does
보컬 현상진이 친분이 있던 노숙자가 다른 노숙자와 빵을 나눠 먹는 것을 보고 만든 노래라고 한다. 삶의 비극 한가운데 속에서도 사랑은 우리를 빛나게 하고 생기 넘치게 한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이야말로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감정이고 어떤 치장도 필요없는 단순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무거운 가사 대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색감의 가사, 그리고 밝고 가벼운 코드와 연주를 사용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들뜨고 마냥 기쁜 사랑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보컬을 대조적으로 사용해 이런 조금 더 완숙한 감정을 표현했다.
5. Freud
심리학자 프로이드의 화두는 사회와 환경에 의해 억눌린 자아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자아는 여러 방식으로 변형되고 복잡다단하게 표출되어, 사람의 마음과 상태는 단색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손에 넣고 싶으면서도 파괴하고 싶은 새디즘과 마조키즘이 공존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쌓이는 감정의 찌꺼기들. 이를 비우거나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런 자아를 그림자에 빗대고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의 심리적 표출을 논했는데, 이 곡의 가사도 이런 감정의 이중성을 예술과 사랑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6. A Month
슬프고 숭고한 이 음악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부모를 떠나보내는 심정을 담았다. 가사 “And I know all the things you wanted me to be are nothing close to what I am now. (나도 알아요, 당신이 나에게 원했던 그 모습들이 지금 내 모습과는 닮은 구석이 하나 없다는 걸)” 속에는 부모와 자식이라면 누구나 느꼈던 상황, 감정을 담담히 고백하고, “Who we are is everything that’s left of all the fleeting stars. (우리는 저 사라져가는 별들의 남은 전부인걸요)”라며 마치 사랑하는 이와 바라보는 마지막 야경을 그리는 듯하다. 이 노래는 문명을 얘기하는 이 앨범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화자의 세대와, 음악 분위기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7. Inheritance
본격적인 세대와 세대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세대는 말한다. “We killed for you our blood, our friends, our dreams to fend; upon them you stand. (우리는 너희를 위해 우리의 혈육과 친구들을, 우리의 포기 못 할 꿈들을 희생했고, 너흰 그 땅 위에 서있다)” 권위적인 전반부의 메시지와 장엄한 일렉트로닉 사운드 뒤 후반부의 메시지는 전세대의 유산을 얘기한다. “We leave you now with our gift and our curse, our faith and our wars. you shall inherit the earth. (이젠 우린 너희에게 우리가 누렸던 축복과 받았던 저주를, 우리의 종교와 전쟁을 남긴다. 너희가 이 땅을 물려받으리라.)” 개인은 온전히 그 자신으로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가? 전 세대에게 받은 유산, 종교, 체제와 관습을 얼마나 현세대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세대와 세대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끊을 수 없는 연결 고리로 맞물려있다.
8. Sea Of Lights
2014년 대한민국은 통곡의 바다에 잠겼다.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하고 가슴 치게 했던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이 곡의 모티브가 되었다.
My heart's still protesting against the injustice within my soul.
And we're still contending even for all the cynics that just went home.
And we're still pretending this isn't the ending;
It's just a bit cold tonight.
(내 심장은 아직 내 영혼 속 부정에 맞서 시위중이고 아직 우린 맞서는 중이다, 집으로 돌아간 회의론자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아직 우린 버티는 중이다, 마치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그저 오늘밤이 조금 추울 뿐이라는 듯.)
9. Fifty Thousand
‘50,000’이라는 숫자는 140 년을 하루하루로 계산해 어림잡은 숫자이다. 어쩌면 우리 후세대는 140세 까지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하루하루가 “사파이어빛의 강물"과 “춤추는 오 만 그루"의 나무로 가득차길 염원하는 듯, 심장 박동같이 넘실대는 신디사이저가 한 개인, 그 삶의 이야기를 예찬하는 것 같다.
10. Utopia
유토피아의 그리스 어원에는 ‘좋은 곳' 과 ‘존재할 수 없는 곳' 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모두가 꿈꾸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 그에 비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는 아비규환의 지옥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노래는 이상과 너무 먼 이 땅 위에서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는다. 마지막 가사 “Yet this here is my home. (하지만 여기 이 곳이 내 집이야.)”는 오히려 지금 여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남기며 이 곡을, 그리고 ‘문명'이라는 이름의 이 앨범을 마친다.
1.Shadow Painter
2.Machines
3.Tree in the Middle of a Forest
4.Love Does
5.Freud
6.A Month
7.Inheritance
8.Sea of Lights
9.Fifty Thousand
10.Utop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