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의미와 의식을 버리면 보이는 것들
밴드의 첫 정규 앨범은 중요하다. 중요한 만큼 욕심을 부리게 되고, 앨범을 내는 데 모든 것을 소진한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그렇게 되기 쉽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가’와 같은 것들이다. 파라솔의 첫 정규 앨범은 그런 부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많은 고민과 시간을 쏟은 결과물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계속 음악을 해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파라솔에 공감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지금의 우리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알 수 있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지금은 비록 우리가 하고 싶은걸 하다 보니 이렇게 만들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지만.
깔끔하고 정제된 사운드에 대한 의지를 버리다.
전 곡은 합주실에서 마이크 몇 개와 노트북, 합주실의 악기들을 사용해 녹음했고 믹싱 역시 지윤해와 김나은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2014년의 EP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녹음을 했었지만 기타를 추가함으로써 3인조 사운드의 약점인 여백을 채우려 했다면 정규앨범은 그 여백을 살리는 데에 집중했다는 점이 EP와는 다른 점이다. 밴드의 첫 정규앨범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거나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나 의지도 없었다. 밴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다는 원칙만 있었을 뿐.
앨범 커버 아트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자 했다.
커버아트는 파라솔의 드러머 정원진이 길거리에서 고양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김나은이 찍은 사진이다. 설명 그대로일 뿐 파라솔의 음악과 앨범 전체의 이미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물(우산, 양산 등)로서의 ‘파라솔(Parasol)’이 주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벗어나 음악과 상관없이 멤버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진을 앨범 전면에 배치한 것이다. “우리가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원칙이 앨범 디자인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으면 했고, 곳곳에 그런 고집스러움이 숨겨져 있다.
‘나’와 ‘세상’을 의식하지 않는 듯한 가사와 멜로디, 그게 파라솔의 음악이다.
혹자는 파라솔 1집을 두고 무관심의 음악이라고도 표현한다. 너무 쿨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정도라고. 몇 년 전부터 인디씬에 퍼지기 시작한 슬프고 무기력한 청춘을 노래하는 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표현하지만 거기엔 어떠한 감정도 배제되어 있으며 심지어 청춘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화자가 늙은이인지 젊은이인지,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모호하며 사랑인지 미움인지도 분간하기 힘든 감정들이 무덤덤하게 흘러간다. ‘나’라는 존재는 음악 속에서 철저히 비워져 있고, 그 안을 채우는 건 타인에 대한 상상인데 그마저도 엄격하게 제한된 채로 존재한다.
1. 법원에서
2. 미끼
3. 뭐 좀 한 것처럼
4. 너의 자세
5. 부러진 의자에 앉아서
6. 어느 거리에
7. 빌리
8. 친구
9. 언젠가 그 날이 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