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거지의 EP 앨범 [상상]
상상력 작업 일지 [상상역으로 가는 줄줄이 열차]
첫 번째, 싱어송라이터 ‘김거지’ 이야기
노래를 쓰고 부르는 사람이 된 후로 언제나 기억과 경험에 의지해왔다.
기억과 경험은 노래가 되기위해 언제나 수첩에 기록되었고, 그 기록들도 나는 기억과 경험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니까 나는 여태까지 기억과 경험으로 노래를 써왔다고 믿은 셈이다.
하지만 이번 작업을 하면서 내 기억과 경험이 수첩에 옮겨지는 순간, 혹은 노래가 되기위해 그 기록들이 다시 읽히는 순간부터 내 기억과 경험은 이미 상상의 영역으로 옮겨온다는 것을 느꼈다.
[상상] 속의 너, [잠복근무] 속에서의 걸어오는 너, [사진첩] 속에서의 청춘, [나와 빈집]에서의 기다리는 이, [왜, 그냥] 에서의 따뜻한 침묵의 이유. 모두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라 마음껏 상상하며 노래를 썼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모든 노래들이 어떤 [상상]으로 들려온다.
듣는 이들의 머릿속에도 갖가지 추억들이 [상상]의 나래를 펴길 바래본다.
두 번째, 포토그래퍼 ‘곽동혁’ 이야기
1. 오늘로부터 약 한 달 전, 거지가 보내 온 사진 속 글자들.
‘뱀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고막은커녕 귓구멍도 없다. 대신에 땅의 진동을 아래턱과 내이로 듣는다. 소리가 아니라 진동으로 듣는다 이거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손잡은 그이가 떨고 있을 때, 그이는 내게 말을 건네는 거야’(꼬리치는 당신/ 권혁웅)
다 읽을 무렵 도착한 말들. “새 앨범 타이틀은 상상이고, 느낌은 이런 느낌이에요” 그렇게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2. 며칠 뒤 지금 이 앨범의 커버를 장식한 공간에 나는 있었다. 먼지가 많아 앉을 엄두는 못내던 내 발 밑에 치이는 찢어진 그림들, 구겨진 사진들. ‘그럴 때가 있지. 내게 말을 건네는 거야’
뒹구는 이미지들을 만들던 사람들과, 하필이면 그 이미지들을 이 공간에서 소비했던 사람들을 유추해본다. 나는 비교적 강한 진동으로 내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미지들만 몇 장 모아 나만의 이야기로 재배치해 사진을 찍었다.
3. ‘상상’이라는 단어에 집착해온 최근의 나는 ‘상상력’이 현실에 꽤 단단하게 묶여져 있는 힘이란 생각을 했다. 결과물로 만든 사진에 여전히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거지의 현실과 내 현실이 만나 진짜 상상의 영역이 열렸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역을 또 한번 넓혀줄 디자이너 기훈이에게 사진들을 첨부해 메일을 보냈다. ‘너 상상대로 만들어줘’
세 번째, 디자이너 ‘반기훈’ 이야기
그간의 작업과는 달리 앨범에 실릴 대부분의 곡을 듣지 못한 채 앨범 디자인을 시작했다. 동혁이형의 사진 네 장과 타이틀곡 ‘상상’을 기워가며 작업했다.
나는 커버 사진 가운데 있는 교탁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때는 선생과 학생을 위해 자리했지만 이젠 쓰임을 잃은 교탁. 사진 속 그 교탁은 쓰임을 잃고서야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뒤늦게 배운 상상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타이틀곡 ‘상상’을 반복해서 들으며 거지가 이번 앨범 작업에 앞서 했을 결심이 느껴졌다. 마음 속 세계를 필터링하는 일을 이제는 그만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감성적인 우울함이 아니라 무서움까지 깃든 마음의 밑바닥을 퍼올리는 일을 이제는 시작해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거지가 첫 앨범 <밥줄>을 냈을 때 나는 앨범 소개글 끝에 이렇게 적었다.
"그가 낯선 귀를 찾아가는 음악을 만들기보다 지금처럼 스스로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뮤지션이 되길 빈다."
그 바람이 이번 앨범에서 이루어진 것 같아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