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의 숙명
화악 피어오른다. 밝아졌다. 몇 번 들으니 확실히 느껴진다. 물론 멤버들의 말처럼 기존 3호선 버터플라이의 노선이
지켜지는 지점도 있다. 3호선 버터플라이 특유의 멜랑콜리와 노이즈가 있다. 허나 음반을 플레이하는 순간, 당신은 놀라게 된다. 가히 파격이라 할
만한 변화를 맛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가의 변신이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3호선 버터플라이다. 작품으로 증명해온 팀이다. 그저
들으면 된다. 기대는 충분히 채워질 테니까.
근 20년이라는 세월을 흘러온 밴드는 여유롭게 선율을 매만진다. 미리 공개되었던
11분짜리 대곡 '나를 깨우네'를 들으면 알 수 있다. 몽글몽글한 일렉트로니카의 기운이 전편을 감싸는 가운데, 리프의 되풀이를 통해 몽환적인
느낌을 강화한다. 꿈결 같은 리프가 기타와 중첩되면서고, 이내 층과 층을 형성한다. 이례적으로 긴 트랙이지만 반복을 통해 마음을 사로잡고야
만다. 여러 레퍼런스들이 공중에 떠다니지만, 들어보면 온전히 3호선 버터플라이의 것이다. 이런 훌륭한 팝송을 써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Divided by Zero]는 빛을 발한다. 멜로디의 힘.
분위기가 달라지거나 속도가 바뀌는 곳에서도 밴드는 서두르지 않는다.
남상아가 작곡한 'Put Your Needle on the Groove', 서현정이 작곡한 'Sense Trance Dance'에 집중해보라.
예상할 수 있었나? 3호선 버터플라이가 만들어내는 댄스 그루브다. 어깨와 발이 장단을 맞추고, 몸이 들썩거린다. 그것도 제대로 된 댄스. 오해할
필요는 없다. 억지로 옷에 몸을 구겨 넣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어울렸다니.
분침과 시침이 축을 기묘하게 가로지른다. 1980년대가
2010년대와 조우하고, 다시 미지의 시제가 된다. 'Ex-Life' 이야기다. 1980년대 뉴웨이브 팝에 현대성을 부여하고, 고전적 사료에
댄서블한 비트를 접합한 듯한 곡. 이번 음반에서 가장 귀에 잘 박힐 트랙 중 하나다. 그간 잘 시도하지 않았던 어덜트 컨템포러리/팝 '선물'은
어떠한지. 정말 팬들을 위한 선물 같은 트랙이 아닌가. 트롬본과 색소폰 등 관악기의 사용이 곡의 온도를 따스하게 유지시키고, 남상아의 보컬은
곡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어떤 각도에서도 곡의 퀄리티를 담보해낼 수 있는 보컬이니까.
중반부를 넘어서면 또 한
번의 변혁이 진행된다. 포스트 펑크의 에너지를 극대화시킨 트랙 '호모 루덴스'. 그 길이부터 지향점이 드러나는 트랙이다. 2분이라는 짧은 시간은
'나를 깨우네'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공습을 감행한다. 일렁거리는 보컬을 앞세운 '신호등', 날카롭게 밀고 들어오는 'Zero', 슬로우 템포로
하강하는 '내 곁에 있어줘', '안녕 안녕' 등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익숙함으로 익숙함을 넘어서는 구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랙의
배치. 그 점에서 밴드가 노련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을 터다. 양가적인 감성을 품에 안기는 '봄바람'과 '감정불구'로 마무리. 자신들이
주조해냈던 어느 앨범보다 깊은 여운을 뿌린다.
모든 것들이 소용돌이처럼 흩어지면 음반이 끝난다. 격정의 심연을 통과한 후 눈을 뜬
기분이다. 돌이켜보면 3호선 버터플라이의 음악은 언제나 그랬다. 뭔가 살짝살짝 어긋났으며, 위트와 긍정, 냉소가 신기한 방식으로 조립되어
있었다. 한 음반 내에서도 그랬고, 음반과 음반 사이에서도 그랬다. 그런 모순이야말로 3호선 버터플라이의 진짜 매력이 아니었나 싶다.
20년이라는 시간은 무게다. 무게는 머뭇거림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게가 걸리면, 부지런히 움직이고, 또 어디론가 향해야 한다. 베테랑 밴드의
숙명이자 존재 이유다. 그러한 점에서 [Divided by Zero]는 묵직하게 아름다운 작품이다. 경관을 조성하는 작품이다.
이경준 (대중음악평론가)
01. 나를 깨우네
02. Put Your Needle on the Groove
03. Sense Trance Dance
04. Ex-Life
05. 선물
06. 호모 루덴스
07. 신호등
08. Zero
09. 내곁에 있어줘
10. 안녕 안녕
11. 봄바람
12. 감정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