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장석남은 연작시 `배호`를 통해서, `배호`라는 쓸쓸한 이미지를 탁월하게 빌려온 적이 있다. 아니, 인터넷 시대에 웬 배호, 김정호인가? 이 케케묵은 목소리들의 이미지를 이제와서 들먹이는 이유는? 답은 없다. 단지 지금 지상에는 없는 그들의 육체성이 그리워진다. 그들은 과연 우리와 같이 이 지상에 존재했던가? 유일한 증거가 저 목소리뿐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쓸쓸해진다. 당신은 존재 했는가. 무엇이 당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김정호의 쓸쓸한 삶을 기억할 것이다. `하얀 나비`, `날이 갈수록`을 듣다보면, 금방이라도 삶이 아스라히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물론 김정호의 이 대책없는 슬픔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대적 상황을 생각한다면 그의 이런 슬픔은 명백한 현실도피의 마취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씩 우울해 지고 싶다.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는 어쩌면 우울과 슬픔이 힘이 될 지도 모른다. 지금, 죽은 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가득하다. 갑자기 삶과 나의 관계를 사춘기 소년처럼 묻고싶다. 김정호의 `하얀 나비` 누군가 묻는다. 저 지는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