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음악사에 길이 남을 거인 조앙 질베르토의 역사적인 기록이 담긴 명반이자 희귀반!
최초의 보사노바 레코딩- 1958년 오데온 레코드에서 발표되었던 싱글 레코딩인 38곡의 보사노바의 위대한 유산. 더불어 20세기의 클래식으로 자리잡은 보사노바의 고전들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직되어 있는 조앙 질베르토의 'The Legendary Joao Gilberto' 라이센스 발매!
브라질 음악이 베푼 은혜로운 선물, 보사노바
커튼 틈 사이로 새어나온 햇볕 한 줌이 단잠을 깨운다. 아직 침대 위를 떠나기 싫어 피워내는 한가로운 풍경과 여유. 보사노바는 일상의 여유와 평화로운 휴식을 이끄는 가장 도발적인 의식이자 최면이다. 보사노바는 브라질의 축제 음악인 삼바 리듬에 유럽 클래식 음악의 영향, 그리고 미국의 쿨 재즈, 웨스트 코스트 재즈을 지배했던 우아한 선율이 결합된 변형적, 복합적 산물이다. Bossa Nova의 어원은 '접촉'이라는 의미의 'Bossa'와 '새로운'이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Nova'가 합성되어, '새로운 물결(New Wave)', '새로운 경향'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1960년대 재즈의 존립이 위협받던 시절, 브라질에서 비롯된 보사노바의 광풍은 미국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재즈의 이름으로, 전 세계 음악 팬들의 귀와 가슴을 사로잡았다.
보사노바의 원류는 브라질의 대중 음악이자 격렬한 축제 음악인 삼바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50년대 중엽 브라질의 노동자 계층과 서민들은 강한 타악기 반주를 강조하는 삼바음악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당시 브라질의 중, 상류층은 삼바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신분적인 격차로 인해 과한 노출, 격렬한 춤이 수반되었던 삼바를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기호에 부합하는 새로운 음악을 필요로 했고, 이러한 사회적 요청,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생산된 것이 바로 보사노바였다.
보사노바의 성공은 삼바와의 차별, 결별로 비롯되었다. 삼바가 브라질의 원주민과 흑인 사회를 위한 민중적인 음악이었다면, 보사노바는 브라질의 식민 통치를 의해 대서양을 건너온 스페인 계열의 후손들이 향유했던 음악이었다. 보사노바의 교주로 인식되고 있는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과 그의 곁에서 보사노바의 아름다움을 전파했던 조앙 질베르토는 보사노바만의 독특한 음악적 유형을 개설했다. 그들은 삼바의 화려한 리듬 체계를 약식화하여 강한 비트의 자극을 경감시키고, 다소 느릿한 템포로 음악의 안정과 평화로움을 기하였다. 또한 유럽의 클래시컬한 악상을 재즈에 흡입했던 쿨 재즈, 웨스트 재즈의 감미롭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덧입혀 한층 따스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덧입혔다. 또한 삼바의 강한 외침과 대조적으로 마치 귓전에서 나긋하게 속삭이는 고유한 보컬 스타일을 제안했으며, 가사의 내용 또한 삼바의 통속적인 멜로 드라마, 울분, 흥취를 피해 가볍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노래에 부착했다.
보사노바가 인종, 계층의 벽을 넘어 브라질의 음악으로 장악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1958년 조앙 질베르토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Chega de Saudade'를 녹음한 후 이내 보사노바는 브라질을 흔들었다. 1958년 마르셀 카뮈가 연출한 영화 '흑인 올훼'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면서, 영화 전반에 짙은 흡인력으로 깔렸던 낯설고 신선한 라틴 음악의 보물 보사노바의 비밀은 세계로 확산될 전조를 펼치고 있었다. 1950년대 흑인 재즈 아티스트의 화염에 밀려 일자리를 잃었던 백인 재즈 뮤지션들은 브라질의 음악 보사노바에 관심을 기울였다. 재즈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는 브라질 여행 중 보사노바의 매력에 이끌려, 동료이자 같은 처지에 있던 테너 색소포니스트 스탄 게츠에게 라틴 아메리카의 신문물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1961년 [Jazz Samba]라는 앨범을 발표하며, 보사노바를 브라질에서 미국으로 데려왔다. 이듬해인 1962년 스탄 게츠는 보사노바의 원주인인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조앙 질베르토, 그리고 순백의 목소리를 지닌 그의 아내 애스투러드 질베르토를 직접 미국으로 초대하여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조앙 질베르토의 흔적은 여전히 보사노바의 흐름에 잔존해 있었으나, 보사노바 제 2세대의 음악은 선배들이 간과했던, 브라질의 사회적 문제-국가주의, 지방주의-에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브라질의 현실을 보사노바에 담았고, 지극히 탐미적이고 관조적인 보사노바의 작풍에 싫증이 난 작사가들이 빚은 반항적이고 주제가 있는 노래들은 자유와 대중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확산과 더불어 노래의 사회적 기능은 더욱 강조된다. 1970년대 이후 보사노바 광풍은 미풍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1970년대 재즈는 록을 도입한 이른바 퓨전 재즈를 통해 새로운 생존의 비법을 체득했다. 그러나 1980년대 팝 씬에서는 여성 팝 보컬리스트 샤데이의 'Smooth Operator'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다시 한번 보사노바는 세계의 음악 팬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재즈 피아니스트 데이브 그루신의 'Bossa Baroque'와 같은 퓨전 재즈에 기초한 새로운 보사노바의 작법이 제안되기도 했다. 그리고 1994년 4월 카네기 홀에서는 지난 1960년대 보사노바의 성전으로 주옥같은 명작들을 발매했던 재즈 레코드사 버브 레코드의 창립 50주년 행사가 보사노바 부활의 기일이 되었다. 이날 공연에서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 'The Girl from Ipanema'를 연주하며, 팻 메스니와 조 헨더슨이 조빔의 곡을 매만졌다. 그 해 12월 안토니오 조빔이 사망하면서 이날의 공연은 보사노바의 역사를 일구었던 위대한 작곡가의 마지막 모습으로 각인되었고,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확산됨과 동시에 수많은 아티스트에 의해 조빔의 업적과 영향력에 헌화되는 숱한 트리뷰트 앨범들이 줄을 이었다. 살아있는 보사노바의 전설 조앙 질베르토는 2000년, [Joao] 이후 9년만에 발표한 [Joao Voz e Violao]을 통해 복귀했고, 애초 스스로 건설했던 보사노바의 순연한 음악적 정화를 새롭게 기술하고 있다.
보사노바의 신(神) 조앙 질베르토, 보사노바의 창세기 [The Legendary Joao Gilberto]
오늘날 그 자체로 하나의 스타일이, 고유한 음악의 향기가 되어버린 보사노바를 기억하면서 오직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만을 기억한다면, 당신은 보사노바의 역사에 무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은 보사노바의 탄생과 전파에 제 1 공신이었으며, 과연 보사노바의 교주라 불릴만한 거인이었다. 그러나 삼국지의 주인공이 유비만으로 일축될 수 없듯이, 보사노바의 역사에는 여기 언급하는 보사노바 역사의 첫 단추를 유장하게 꿰었던 조앙 질베르토를 비롯한 또 다른 공로자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조앙 질베르토는 브라질 음악사에 길이 남을 거인(巨人)이자 기인(奇人)이었다. 그가 남겨 두었던 비타협적인 음악성, 완벽한 음악성을 위한 고집, 편집증, 기이한 습관에 관한 소문은 전설과 신화가 되어 버렸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갑작스레 콘서트를 취소하고 불참했던 것은 차라리 작은 일화에 불과했다. 그는 녹음 스튜디오 밖에서 가늘게 새어나오는 에어콘 소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레코딩을 중지해 버리기도 했다.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을 실험하기 위해 사람들을 복도 곳곳에 세워 두거나, 심지어는 카페트보다 울림이 좋다는 이유로, 녹음 스튜디오에 페르시아 융단을 깔게 하기도 하였다. 그가 혼자 살았던 아파트에서 10여년간 식사를 배달했던 이 조차도 그릇을 주고 받기 위해 문밖으로 내미는 팔 이외는 보지 못했을 만큼 그는 철저한 은둔자이기도 했다. 그는 두벌의 바지 중 어느 것을 입을까에 대해 3시간 이상 고민하다 결국 외출을 포기하고 말았으며, 그 이유가 남겨진 한 벌이 불쌍하기 때문이라는 남다른 감성 등 조앙 질베르토에 관한 기이하고 유별난 사례는 끝이 없다.
1931년 6월 10일 바이아 주 시골 마을 주아제이로 에서 태어나 1950년대 초반부터 리오데자네이로를 기점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조앙 질베르토의조앙 질베르토는 1958년 보사노바의 서막을 여는 역사적인 레코딩의 주인공이었으며, 또 보사노바의 미국 상륙의 시발점이 되었던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라는 위대한 작곡가가 있었지만, 조앙 질베르토는 보사노바의 미학을 구체화시킨 실험을 완성한 위대한 보컬리스트이자 기타리스트였다. 그의 공로를 찬양하는 ‘보사노바의 신(神)’이라는 수식은 조앙 질베르트의 이름 앞에서만 붙을 수 있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1957년 브라질의 미나스 제라이스 주에 위치한 자그마한 아파트의 욕실에서 고집스럽고 개성 강한 청년은 보사노바의 음악적 골격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해있던 밴드에서 불성실과 독선을 이유로 해고 통지를 받고 친척의 집을 찾았다. 욕실의 푸른 타일에 반사되는 음향을 배경으로 며칠 동안 욕실안에 틀어 박인 채 자신의 목소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나지막한 키(Key)로 흥얼거렸고 마치 듀엣처럼 속삭이듯 흐르는 기타 반주를 찾고 있었다. 이듬해 이 편집증의 청년은 역사적인 보사노바의 첫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 작곡하고, 당시 현역 외교관이자 9번의 결혼과 이혼, 지나친 음주로 외교관에서 파면되기도 했던 시인이자 작사가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가 작사한 'Chega de Saudade'가 바로 그것이다.
조앙 질베르토의 음악적 완벽성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報告)는 브라질의 저명한 음악학자 로렌조 맘미가 남긴 저서 '조앙 질베르토와 보사노바의 유토피아적 계획'이다. (아래 글은 월드 뮤직 전문 사이트인 오드뮤직(www.odemusic.co.kr)에서 '박창학의 월드 비트'의 연재 中 '조앙 질베르토와 보사노바의 유토피아적 계획 1-4' 내용 일부를 발췌, 인용한 것이다.)
조앙 질베르토는 멜로디 속에 음의 모든 요소를 재생하고자 했다. 그로 인해 목소리가 하나의 악기가 되어버리는 것은 피하고, 반대로 노래를 이야기에 가까워지게 하려 했던 것이다...조앙 질베르토의 노래는, 반주의 화음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화음이 마치 빨랫줄에 걸려 있는 옷과 같이, 노래에 매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조앙 질베르토의 불협화음은 완서법이며 협화음에 대한 부정의 부정이다. 재즈의 싱코페이션은 강한 박자를 강조하지만, 조앙 질베르토의 싱코페이션은 강한 박자를 상대화시켜, 시간적으로 서스펜션(걸림음)을 불러 일으킨다. 재즈의 음색은 화려하다. 한편 조앙 질베르토의 음색은 절약적이다. 삼바의 비트가 그렇듯이 보사노바의 비트는 다른 남미의 리듬들처럼 간단하게는, 재즈에서 유래된 표현법과 일체화되지 않는다. 보사노바의 비트, 그 중에서도 조앙 질베르토의 비트는 집 안에서의 차분한 박자이며, 우리들이 집에서 보내는 무한한 시간의 흐름과도 같은 것이다.
조앙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음질이다. 그것은 계측할 수도 없으며, 기능적이지도 않다. 그가 연습했던 욕실타일의 잔향이 그 이유라는 사실은 모르면서도, 우리들이 목욕탕에서 왠지 노래를 부르고 싶어지는 그 음질이다. 또한 소리가 발성되기 직전, 목 언저리에서 소리가 만들어 내는 진동을 우리들이 맛 볼 때의 음질인 것이다. 조앙 질베르토는 그의 신체와 음악도 결코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그에게 퇴보적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미래를 지향하며, 유토피아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노래 부르지 않고 머리 속에 떠올리는 멜로디에는 애매하며 인상주의적인 성격이 존재한다. 조앙 질베르토의 어떤 녹음에서, 필자는 그 멜로디가 명확하게 객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노래 부르지 않고 머리 속에 떠올렸을 때처럼,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심오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발견하였다. 재즈가 힘의 의지라고 한다면, 보사노바는 행복의 약속이다. 결국, 프루스트도 침실에서 나온 적은 없었다.
여기 소개하는 앨범 [The Legendary Joao Gilberto]는 전술했던 보사노바의 신 조앙 질베르토에 관한 모든 신화와 전설이 시작되는 근원지이며, 더 이상 브라질의 음악이 아닌, 세계인의 음악이 되어 버린 보사노바의 장대한 시작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기록이다. 여기에는 수차례 언급되었던 최초의 보사노바 레코딩-1958년 오데온 레코드에서 발표되었던 싱글 레코딩- 'Chega de Saudade(No More Blues)'를 시작으로 38곡의 보사노바의 위대한 유산이 빼곡이 진열되어 있다. 더불어 20세기의 클래식으로 자리잡은 Desafinado, Samba de Uma Nota So (One Note Samba), Bim Bom, Insensatez (How Insensitive), Corcovado, Meditacao (Meditation), Manha de Carnival (Carnival Morning), A Felicidade (Happiness)와 같은 보사노바의 고전들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직되어 있다. 이 찬연한 기록의 시점은 1958-61년까지이며, 이는 보사노바가 미국으로 수출되기전까지의 과정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목격하는 것은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가 브라질 여행에서 찬탄했던 보사노바의 마력을 그대로 체험하는 것과 같다.
앨범을 들으며 내내 감탄스러운 것은 내가 듣고 기억하고 있는 보사노바의 음악적 미학이 그 출발점에서부터 견고하게 확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니, 보사노바가 미국으로 상륙해서도, 스탄 게츠와 무수히 많은 아티스트의 음악 속으로 흡수되면서도 그 본질은 진화되지도, 훼손되지도 않았다. 짐작컨대 조앙 질베르토,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그리고 그밖의 소중한 작품들의 작사, 곡의 주체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aes), 도리발 카이미(Dorival Caymmi), 아리 바로소(Ary Barroso)와 같은, 오직 브라질의 아티스트들만이 구현 가능했을 음악적 발견을 일찌감치 완성했음을 시사한다. 물론 그 성과의 대부분은 몇 번이고 전술했던 괴팍하고, 편집증적인 기질과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보사노바를 구체화시킨 조앙 질베르토의 몫이다.
십년전 쯤, 어느 레코드 샵에 진열된 것을 만지작 거리다 끝내 집으로 가져오지 못했던,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얼마전 비로소 들어볼 수 있었던 보사노바의 창세기 [The Legendary Joao Gilberto]. 이 앨범은 본 작의 라이센스 권리를 지니고 있는 레이블 담당자가 주변을 아무리 수소문해도 구할 수 없다가 해외 인터넷 사이트의 경매에 올라온 앨범을 직접 구매, 리마스터링해서 국내 발매하게 되었다. 이런 값진 정성과 수고가 아깝지 않은 불후의 명작이다. 이 앨범을 들으며 보사노바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바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차분히 보사노바라는 음악의 신비에 대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솔직한 고백이다.
[ 글: 하종욱 (재즈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