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아닌 우울, 메마르지 않은 외로움 옛 사랑과의 마음 속 거리감을 한 뼘씩 밟아 나가는 외로운 레이스의 BGM
한희정(푸른새벽)과의 가슴 시린 만남, ‘All Right’ 수록
조용하되 깊은 소용돌이를 일으킬 2008년형 singer-song writer
조예진(루싸이트 토끼)의 피쳐링이 돋보이는 ‘deli pill’ 수록
너’에 대한 12가지 노래들을 엮어낸 파스텔뮤직의 2007년 컴필레이션 ’12 Songs about you’ 에서 유독 낯설었던 이름이 있다. 한희정(푸른새벽)의 피쳐링으로 더욱 눈길을 끌었던 화제의 곡 ‘All right’으로 참여했던 박준혁, 그의 첫 앨범 ‘private echo’가 드디어 발매된다.
언제부터인가 본명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신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떻게든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이미지를 주기 위해 멋들어진 예명을 만들어내고, 그 이름 안에 길고 긴 사연이나 남모를 의미를 담곤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만나는 박준혁이라는 이름은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은 음식처럼, 특별한 연출이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다가온다.
그 자연스러움은 그의 음악에도 스며들어, 담담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잔재주를 부린 흔적이 없다.스스로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회고하는 그는 평범하게(?) 라디오헤드와 너바나의 음악을 수혈 받았고,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매끄럽게 갈고 닦은 유리알 같은 21세기 BGM보다는 모난 구석이 있는 90년대 모던락의 모양새를 닮아 있다. 자칫 음울하게 들릴 수 있는 그림자 짙은 감성은 그런 소탈함과 만나 누그러진다.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우울이 아닌, 여백에서 아련한 그리움의 시간을 마련하는, 몽롱하면서도 산뜻한 색감을 박준혁은 보여주고 있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상처가 아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아픔을 이야기하기에 그가 들려주는 곡들은 더욱 깊숙하게 스며든다.
12 Songs about you’ 에 수록되어 익숙한 멜로디 ‘All right’은 물론, ‘IF I’, ‘소용돌이’ 등 그가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떠나감의 뒤에 남겨진 감정들이다. 그는 상실의 아픔을 잊거나 극복하려 하지 않고 더 깊고 절실하게 느끼며 자기 안에 잠식한다. 때로는 허탈한 어쿠스틱 기타의 튕김이, 때로는 일렉트릭 기타의 애절한 울림이 그의 아연한 목소리와 함께 파고들며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은 음반의 초반에서보다 후반으로 갈수록 더해지며 그리움의 동심원은 커져 간다. ‘다리가 아파’의 차가운 피아노 소리, 보컬에서 날카로움마저 느껴지는 ‘christmas tree’의 후반부 휘파람 소리는 소멸되지 않는 사랑의 빈자리처럼 가슴 속 깊이 자리잡는다.
그런가 하면, 한 편의 우화처럼 등장해서 자칫 처질 수 있는 앨범의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는 ‘porcupine’, 가벼운 리듬이 기분 좋은 ‘deli pill’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deli pill’은 단순한 멜로디를 중심으로 감각적이면서도 귀에 착 감기는 사운드를 이끌어 낸 앨범의 타이틀 곡으로, 루싸이트 토끼의 조예진이 참여해서 혼자서는 낼 수 없는 또 다른 색채를 더하고 있다. 복잡함이 없는 명료한 구성과 서너 줄 가사의 반복에서 전혀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 곡은 겉치레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간결한 박준혁식 화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문제의 해결책이나 인생의 돌파구가 아니라, 자기 안의 소리를 밖으로 꺼내어놓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느끼는 대나무 밭처럼 느껴진다. 때로, 그 안에 투영된 삶의 치열함보다 음악 자체가 훨씬 숨막히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그에 비해 박준혁의 음악은 살짝 뒤로 물러나는 여유가 느껴진다. 서늘한 외로움이 베어 있으면서도 듣고 있으면 오히려 느긋한 위로가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렷하게 들어오지 않는 가사는 그의 입에 맞는 소리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멜로디이며, 리듬이다. 잘 짜여진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느낌을 왜곡 없이 표현해내는 것, 그것이 박준혁의 ‘private echo’ 일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한 ‘private echo’는, 서두름이 없기에 급체할 염려가 없다는 점에서 여느 데뷔 앨범들과는 다른 매력을 가진다. 스타가 되기 위해 기다림을 감내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가장 가까운 소리를 내는 음악을 만들며 한걸음씩 걸어 온 결과 이번 앨범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속속들이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기 보다는 눈을 감고 잠시라도 자신의 음악에 마음을 맡겨주길 바라는 박준혁. 복잡한 일상과 지친 과거로부터의 쉼터를 필요로 하는 우리와 같은 형태의 슬픔을 가진 그만의 울림에 공명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