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일상을 노래하는 프렌치팝의 요정 Berry(베리) 데뷔 앨범 [마드므와젤]
사랑의 단상과 일상의 풍경을 까페 오레처럼 부드럽고,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오렌지처럼 새콤하게 노래하다! 베리가 선사하는 살긋한 프렌치 팝의 세계!
비처럼 쏟아지는 현악기의 인트로가 인상적인 앨범 동명 타이틀곡 'Mademoiselle', 평화로운 연인의 정경을 노래한 'Belle Comme Tout',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느의 시에 노래를 붙인 'Cheri', 'Les Heures Bleues'와 히든 트랙 'Mon Automobile'까지 총 12곡 & CD-Rom 실행시 전용 플레이어 Opendisc 제공.
길어야 몇 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의 주파수가 맞는 음악을 듣는 이의 황홀은 이 순간을 지키고, 또는 순간을 기꺼이 놓아버릴 수 있는 자유에 다름 아니다. 치졸한 현실이 허무해서 여기보다 어딘가에 있는 안식처로 떠나고 싶은 욕구들은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정말로 비행기나 배를 예약하지는 않더라도 마음은 벌써 이국의 이름모를 사막 위를 걷고 있거나 이방인으로 가득한 도시의 저녁을 방황한다. 그래, 마음은 떠나고 몸은 여기 있기에, 음악은 필요하다. 여지없이 여행자가 되지 않는가. 언어와 풍토와 상식이 다른 차원에서 유랑하는 어느 음유시인이 멀리서 보낸 영감, 색깔, 냄새, 이야기가 바람과 공기를 타고 날아와 공명한다.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드는 한 젊은 예술가가 파리와 브뤼셀을 오가며 기록한 우리시대의 풍경이고 우화들이다. 사랑, 헤어짐, 외로움, 권태, 욕망, 환상, 노동. 일상의 체험이 담긴 이야기들을 노래한 그 풍경 속에 잠시 들어가 볼까. 그 시어들이, 그 살긋한 프랑스어 발음이 바람처럼 지나간다.
인생, 떠나고 돌아오는 일의 반복 또 반복
사랑을 잃어버린 지, 혹은 거지같은 사랑을 보내고 마음 비운지 몇 달쯤 된 아마도 서른 두셋의 여자.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평화와 힘, 그리고 사랑의 가벼움을 알고 있지만 늘 헛헛한 내일을 꿈꾼다. 레고, 강아지, LP, 오지 않는 잠을 소비하고 우유, 팬케이크를 먹는 둥 마는 둥 해보지만 역시 오늘은 공허하다, 내일이 올까? 온다, 그저 창밖의 실체를 알 수 없는 빛, 저 무망한 오후의 빛만이 내일을 말한다. 내일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란 걸.
세르주 갱스부르(Serge Gainsbourg), 프랑소와즈 아르디(Francoise Hardy), 케렌 앤(Karen Ann) 역시 그랬다. 그리고 베리(Berry). 울울한 프렌치 팝의 시학을 잇는 새로운 인물의 이름치곤 단순하다. 베리. 달콤한 블랙베리일까. 섹스어필이나 공연한 클리셰 따위는 거추장스럽다. 오직 어쿠스틱 포크록 스타일의 음악 열한 곡으로만 설명할 뿐이다. 세상의 치열한 경쟁과 전쟁 같은 속도감에는 신경을 꺼버렸다. 아니 일종의 조롱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게으르고 느린 권태로 둘러싸인 일상의 고독과 맥주 거품 같이 허무하고 가벼운 연애를 탐닉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자조적인 몽상가, 그리고 내일 어디로 또 떠날지 알 수 없는 이방인의 넋두리들이 틈틈이 끄적였을 시에, 끈적하진 않지만 메마르지도 않은 목소리에 뒤섞여 있다.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았어도/우린 내일은 만나지 못할 거예요/물처럼, 공기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한 시간/아, 마치 당신의 맥주에 떠 있는 거품처럼 부드럽고 가벼워요...’
-‘Plus Loin(더 멀리, 트랙 7)’ 중에서-
‘행복을 두려워하지 말아요/그건 여기에도, 다른 데도 존재하지 않는답니다../우린 내일 죽음을 맞을 거예요/.../사람이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는 건 참 안 된 일이죠/그건, 내게 있어서의 당신의 존재처럼 주어진 기쁨의 시간이에요’
-Le Bonheur(행복, 트랙 2)‘ 중에서-
따뜻하게 웃는다. 실은 누굴 향해서도 아닌 일상을 향해서, 인생의 허무를 향해서 가볍게 웃는다. 음악은 시작하고 끝이 날 뿐, 길고 장중한 전주 따위도 거추장스러워 단출하다. 심장을 자극하지 않고 수채화처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기타와 하모니카, 로즈, 드럼과 나란히 앉아 그냥 기차여행 하듯 노래하는 것이다. 저렴한 브런치를 파는 파리 어느 변두리 동네 까페에 고즈넉이 앉아, 떠나고 돌아오는 일의 반복이 가르쳐주곤 하는 순간에 관한 기억 혹은 흔적의 농도와 의미를 자조적으로 읊조린다. 따뜻함인가? 차가움인가? 굳이 규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만, 역설적으로 듣는 이의 부박한 삶을 반영하고, 위안을 주는 건 분명하다.
십대 시절부터 극장 무대에 올라 연기자가 되고자 했던 베리. 그녀가 인생의 빛과 어둠에 대해 기록한 글들은 시가 되고 노랫말이 되었다. 그 시에 곡을 입히고 색채를 가미한 작곡가, 프로듀서는 마누(Manou)와 리오넬 뒤도뇽(Lionel Dudognon). 그리고 소박한 자주 제작으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음미하던 베리의 메이저 데뷔 앨범 작업에는 유럽 최상급의 세션들도 참여했다. (프랑소와즈 아르디와 벤자민 비올레이(Benjamin Biolay) 앨범에 참여했던) 베이시스트 로랑 베르네리(Laurent Vernerey)를 필두로, (포티셰드(Portishead)와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와 협업한) 영국의 드러머 클라이브 디머(Clive Deamer)와 함께 또 한 명의 드러머로는 (스테판 아이허(Stephan Eicher)와 케렌 앤과 작업한 바 있는) 드니 베나로슈(Denis Benarrosh)가 참여했다. 그리고 플루트 연주와 디렉션을 담당한 유미르 데오다토(Eumir Deodato)는 뷔요크와 크리스토프의 주요한 사이드맨이며, 피아니스트 로랑 드 윌드(Laurent de Wilde)와 미디 프로그래머 야닉 퐁드리(Yannick Fonderie)도 가세하여 안정적이고 절제가 돋보이는 앙상블로 베리의 나직하게 읊조리는 보컬을 든든히 받쳐주고 이 흥미로운 이야기들에 적절한 온도를 맞추어준다.
방랑아 폴 베를렌느를 닮았지만 도시적인 시와 노래들
고답적인 것에 콧대를 세우던 19세기에 상징주의의 시학을 들고 나와 환상적인 음률과 음악 그 자체를 즐긴 시인이 있었다. 어린 랭보를 만나 망가져 생은 불행했고 시는 아름답기 짝이 없던 방랑자 폴 베를렌느. 베를렌느의 시에 곡을 입힌 트랙도 두 개 있다. ‘Chéri'(내 사랑)와 ’Les Heures Bleu‘(파란 시간들). 환상적이고 부드러운 상징들은 때로 경쾌하기까지 하지만 절망과 허무가 숨어 있다. 그리고 못지않게 거침없고 유려한 베리의 노랫말에 담긴 상징과 고백들. 그리고 기교 없는 보컬. 굳이 말하자면 케랜 앤보다 밝고 프랑소와즈 아르디나 카를라 브루니(Carla Bruni)보다 냉소적이며 담백하다. 베리. 흥미로운 음악가임에 틀림없다. 따뜻하고 담백하게 미소 지으며 조용히 노래하지만, 그게 다 역설이다.
앨범 타이틀이기도 한 ‘Mademoiselle(아가씨)’은 마치 비처럼 쏟아지는 현악기의 인트로가 인상적이다. 마치 구두에 붙어 있는 오래된 풍선껌처럼 가벼운 사랑에 대한 씁쓸한 넋두리를 담은 곡이다. 오지도 않을 행복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자조가 담긴 ‘Le Bonheur(행복)’ 역시 평화롭고 밝은 멜로디 뒤를 지나가는 스산한 하모니카가 복선이다.
구름들도 폭풍우도 지나가듯 인생도 지나간다는 걸 잘 아는 평화로운 연인의 정경 ‘Belle Comme Tout(무엇보다도 아름다운)’에는 우쿠렐레와 퍼쿠션이 만들어내는 경쾌하지만 조금 바쁜 리듬이 마치 마지막 피크닉을 떠나는 연인들이 누리는 유한한 기쁨을 상징한다.
사랑이란 게 별건가.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때론 연인을 돌볼 줄도 아는 것인데, 그걸 끝내 안한 나쁜 자식에 대한 얘기를 우아한 멜로디와 경쾌한 미디엄 템포로 노래한 ‘Enfant De Salaud(나쁜 녀석)’은 은은한 분위기에 격정적인 저주를 담고 있다.
유일하게 영어로 노래한 ‘Love Affair'는 독특하게도 훵키한 리듬을 부여함으로써 조금은 부황한 느낌을, 속도감 있게 읊조리고 있다. ’Plus Loin(더 멀리)‘에 등장하는 연인의 쓸쓸한 탄식은 극도로 최소화하여 단순 반복되는 아르페지오와 멜로디, 그리고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정말 마지막 시각이 코앞에 다가온 연인의 애무처럼 들린다.
이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이며 베리의 음악성이 잘 배어 있는 트랙인 ’Demain(내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의 수백 가지 항목들을 중얼거리고 있지만 똑같은 내일이 다가올 뿐인 허무를 경쾌한 비트에 잘 담았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유스 방다의 아프리칸 코러스가 짧지만 묘한 울림을 자극한다. 신기루처럼 쓸쓸하게 사랑이 식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읊조리는 ’Inutile(쓸모없는)‘은 은은하고 잔잔한 멜로디와 섬세하게 쪼개놓은 리듬이 여운을 남긴다.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느의 허무한 사랑에 관한 탄식이 담긴 시에 곡을 붙였지만 낄낄대는 부황한 술 파티 분위기를 연출하는 ’Chéri(내 사랑)‘의 색소폰과 드럼이 이끄는 그루브감은 정말 역설적이고 흥미로워서 이 베리라는 아티스트의 센스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베를렌느의 시를 노래했지만 정반대로 마음 맨 밑바닥에 내려놓은 듯 차분하고 쓸쓸한 느낌의 ’Les Heures Bleues(파란 시간들)‘은 지독한 사랑과 지독한 절망이라는 주제에 걸맞는 여운이 남는 곡이다. 그리고 약 3분이 넘는 여백 뒤에 등장하는 히든 트랙 ’Mon Automobile'은 의외로 잔잔하고 일상적이다. 일상. 생각해보면, 평온하고 잔잔한 겉모습 안에 꼭 악마 하나쯤 숨기고 있는 멋진 이름이긴 하다.
2009. 2
강민석 /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