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음울한 관능미와 최면에 걸린 듯한 몽환적인 사운드
트립합의 또 다른 진일보... 그리고 진화!
매시브 어택 7년 만의 새 앨범「Heligoland」
호프 샌도발의 보컬 피쳐링 <Paradise Circus>
데이먼 알반의 보컬 피쳐링 <Saturday Come Slow>
3D의 보컬 피쳐링 <Atlas Air> 포함 총 10곡 수록.
“이번 앨범 「Heligoland」에서도 매시브 어택의 무한한 실험 정신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아마도 두 사람이 미래의 어느 날 주고받을 마지막 손길이 대중음악에서 트립합이 차지할 최종 영역을 확정할 것이다. 매시브 어택의 바이오그래피가 곧 트립합의 역사다.”
트립합의 또 다른 진일보 그리고 진화.
Massive Attack의 7년 만의 새 앨범 「Heligoland」
2010년대에 들어선 지금 트립합(Trip-Hop)을 이야기한다면 오히려 낯선 일이다. 전자음악이 다양한 분열과 혼합을 거듭하면서 주류 음악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트립합과 같은 전자음악의 세부 장르가 과거의 영광을 그대로 잇는 경우는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다. 현재 그 어떠한 주류 매체에서도 트립합이나 브레이크비트(breakbeat), 덥(Dub), 트랜스(Trance), 정글(Jungle) 등과 같은 용어에 주목하지 않는다. 간혹 부연설명은 하되 심층연구는 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식에 대한 필요와 공급은 테크노 열풍이 거셌던 1990년대 말에 이미 집중 소진된 바 있다.
천천히 성장하던 전자음악은 1990년대에 화려한 폭죽을 터뜨렸고, 그 잔해들은 주류 음악 속으로 흩어지거나 작게나마 불꽃을 유지했다. 한때 다수의 음악 팬들이 흥미 있게 받아들였던 트립합은 꿈만 같던 세기말을 지나 다시 매니아들만의 장으로 들어갔다. 무시무시한 삼각편대를 이루던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 포티셰드(Portishead), 트리키(Tricky)도 과거보다 더딘 행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최근에 신보 「Thrid」(2008)를 발표했던 포티셰드는 예전보다 한층 다각화된 음악을 선보이며 트립합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트립합이 세가 기운 음악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여전히 이 장르는 현재진행형이고, 다수의 음악인에게 무수한 영감을 제공하는 매력적인 원천이기 때문이다.
장르의 근간이 된 영국의 지명을 따라 브리스톨 사운드(Bristol Sound)라고도 부르는 트립합은 사실 예나 지금이나 명쾌한 설명이 불가능한 장르다. 테크노, 힙합, 재즈, 덥 등이 고루 섞여 있고, 그러한 요소들이 음악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방향성에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트립합도 수많은 가지치기가 가능하다. 그래도 보편적인 특징이 있다면 미드템포 이하로 진행되는 브레이크비트와 몽환적이면서도 끈끈한 사운드, 그리고 우울한 감성을 드러내는 보컬리스트의 목소리 등을 꼽을 수 있다. 트립(Trip)이 환각제가 야기하는 몽롱한 기운을 나타내고, 합(Hop)이 흑인음악 특유의 그루브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특징은 더욱 이해가 쉬울 것이다.
물론 여러 장의 앨범을 들어야 트립합에 대한 이러한 윤곽이 잡히고 세부 요소를 따져볼 수 있겠지만 이 장르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출발선이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그 출발선이자 기준점은 매시브 어택의 데뷔 앨범 「Blue Lines」(1991)이다. 트립합 최초의 앨범이라 부르는 이 작품은 샘플링, 랩핑, 브레이크비트의 영민한 조합으로 많은 음악 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영국 차트 13위를 기록하면서 일렉트로니카의 지형을 뒤흔들었다. 특히 묵직한 스트링 편곡과 샤라 넬슨(Shara Nelson)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관통한 싱글 <Unfinished Sympathy>는 대중의 환호와 평단의 찬사를 한몸에 받으며 트립합의 이정표로 자리매김했다.
이후에도 매시브 어택은 트립합에 집중하며 「Blue Lines」에 버금가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음악 동료인 명장 넬리 후퍼(Nellee Hooper)를 프로듀서로 임명한 두 번째 앨범에서는 스트링 사운드를 강화면서 기존 음악에 변형을 가하는 대담성을 과시했다. 많은 음악 팬의 기대를 등에 업고 발표한 2집 「Protection」(1994)은 결국 1집의 약진을 이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듬해 발표한 2집의 리믹스 앨범 「No Protection」(1995)은 그룹이 이루어놓은 아성을 더욱 굳게 다졌다. 이러한 매시브 어택의 활약과 함께 포티셰드의 데뷔 앨범 「Dummy」(1994)와 트리키의 데뷔작 「Maxinquaye」(1995)는 영국 음악계에서 거대한 반향을 이끌어내며 트립합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트립합’이라는 용어도 이 무렵에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트립합의 전성기가 아닌 매시브 어택의 전성기는 1998년에 나온 세 번째 앨범 「Mezzanine」과 함께 찾아왔다.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닐 데이비지(Neil Davidge)가 넬리 후퍼가 남기고 간 프로듀서 자리를 차지했지만 신보가 거둔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한층 어둡고 무거워진 공기를 머금은 「Mezzanine」은 여러 매체의 찬사 속에서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수록곡 전체를 앨범 발표 전에 웹사이트에 공개하는 강수를 두었는데도 앨범은 영국에서 1년 동안 3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수록곡 가운데 콕토 트윈스(Cocteau Twins)의 엘리자베스 프레이저(Elizabeth Fraser)가 보컬로 참여한 <Teardrop>은 영국 싱글 차트 10위에 오르며 선전을 펼쳤다. 특히 유명 뮤직비디오 감독 월터 스턴(Walter Stern)이 만든 이 곡의 비디오 클립은 자궁 안에서 태아가 노래를 하는 영상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Mezzanine」은 2000년 Q 매거진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영국 앨범 100선 가운데 15위를 차지한 데 이어, 2003년 롤링스톤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앨범 500선에서는 412위에 올랐다. 또한 매시브 어택은 「Mezzanine」으로 영국을 벗어나 유럽 전역에서 확실한 인지도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희의 이면에는 멤버 탈퇴라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룹의 행보에 불만을 표시하던 앤디 ‘머시룸’ 바울스(Andy “Mushroom” Vowles)가 1999년 가을에 팀을 떠나면서 수년간 이어오던 트리오 체제가 무너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매시브 어택은 로버트 ‘3D’ 델 나자(Robert “3D” Del Naja)와 그랜트 ‘대디 G’ 마셜(Grant “Daddy G” Marshall)의 듀오 체제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만든 네 번째 앨범 「100th Window」(2003)는 그랜트 마셜이 개인 사정을 이유로 앨범 작업에서 손을 떼면서 로버트 델 나자의 솔로 작품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영국, 벨기에, 스위스 등지에서 차트 정상에 올랐을 뿐 신보는 「Mezzanine」이 거둔 상업적 성과를 능가하지 못했다. 그래도 샘플을 철저히 배제하고 재즈 색채를 버리는 등 색다른 실험을 펼쳤다는 점에서 평단과 마니아들은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트립합이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시도와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을 매시브 어택은 다시 한 번 증명했던 것이다.
「100th Window」 이후 매시브 어택의 존립 여부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그랜드 마셜은 2004년 매시브 어택의 투어에 모습을 드러낸 데 이어 2005년에는 스튜디오 작업을 재개했다. 그러는 동안 로버트 델 나자는 3집과 4집에서 팀과 공동 프로듀서로 활약한 닐 데이비지와 손잡고 영화 ‘더 독(원제: Danny The Dog)’, ‘트러블 더 워터(Trouble The Water)’ 등의 사운드트랙을 만들기도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정규 앨범을 기다린 팬들은 그룹의 베스트 앨범 「Collected」(2006)로 잠시나마 갈증을 풀어야 했다.
정규 활동 안팎으로 꾸준한 창작력을 과시한 매시브 어택은 4집 발표 이후에도 수많은 아티스트와 녹음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높은 완성도와 알맞은 방향성을 지닌 노래들을 엄선해 다음 앨범을 구성했다. 따라서 7년 만에 나온 신보 「Heligoland」는 매시브 어택 나름의 후기 베스트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앨범 제목 ‘Heligoland’는 독일에 있는 한 군도(群島) 지명을 따른 것이다. 로버트 델 나자는 “이것은 앨범에 담긴 다채로운 면을 포괄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사물이나 문장 또는 단어를 쓰기보다는 특정 장소를 앨범 제목으로 쓰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해 나온 결과”라고 말했다. 해당 지명의 과거 명칭인 ‘Helgoland’는 ‘성지(holy land)’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앨범 제목이 적힌 재킷 이미지는 그래피티 아티스트이기도 한 로버트 델 나자의 작품이다.
지난 네 장의 앨범과 마찬가지로 「Heligoland」에도 여러 음악인이 자신의 이름을 크레딧에 올렸다. 우선 매시브 어택 앨범의 단골인 레게 뮤지션 호레이스 앤디(Horace Andy)를 비롯해 TV 온 더 라디오(TV On The Radio)의 툰데 아데빔프(Tunde Adebimpe), 엘보(Elbow)의 가이 가비(Guy Garvey), 트리키와 작업해 잘 알려진 마르티나 타플리-버드(Martina Topley-Bird) 등이 작품에 목소리를 제공했고, 브릿팝의 터줏대감 데이먼 알반(Damon Albarn)은 <Saturday Come Slow>에서 보컬리스트로 나선 것은 물론 가이 가비가 노래한 <Flat Of The Blade>에서 베이스를, <Splitting The Atom>에서는 키보드를 연주하며 앨범의 감초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Saturday Come Slow>에서 기타를 연주한 포티셰드의 에이드리언 어틀리(Adrian Utley)도 눈에 띄는 이름이다.
이번 앨범은 닐 데이비지가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한 매시브 어택의 세 번째 작품이기도 하지만 머시룸의 탈퇴 이후 남은 두 멤버가 머리를 맞댄 첫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매시브 어택은 과거의 답습이 아닌 또 다른 변신에 주력했다. 무엇보다 트립합의 차가운 공기는 유지하되 그 형태에서 벗어난 모습이 인상적이다. 기타, 베이스, 드럼 편성에 기댄 <Girl I Love You>나 <Saturday Come Slow>는 포스트펑크 곡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트립합을 설명하는 데 꾸준히 따라다니던 브레이크비트나 샘플, 재지한 색채도 숨을 죽였다. 그나마 2009년 10월에 소개된 EP의 타이틀곡이기도 한 <Splitting The Atom>, 멤버들이 곡을 완성하는 데 가장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하는 마지막 곡 <Atlas Air>, 미국의 중견 싱어송라이터 호프 샌도발(Hope Sandoval)이 목소리를 삽입한 <Paradise Circus> 등이 트립합의 전형에 가깝다. 멤버들이 템포나 편곡을 과하게 몰아가지는 않았어도 앨범 전반에서 발산되는 기운은 5장의 앨범 가운데 가장 드세다. 매시브 어택은 「Heligoland」를 통해 트립합의 새로운 변이체를 구성한 것이 틀림없다.
매시브 어택은 트립합을 그 안쪽에서 둘러보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거시적인 안목으로 바라본다. 멤버들은 1988년 결성 이후 지금까지 매 순간 새로운 실험에 목말라 했다. 구성원 사이의 의견 갈등이 멤버 탈퇴라는 최악의 상황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결국 매시브 어택 음악의 업데이트에는 좋은 약이 되었다. 네 번의 다리를 건너 다섯 번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트립합이라는 기본 틀 안에서 갖가지 시도를 반복하며 그 경계선을 절묘하게 넘나들었다. 이번 앨범 「Heligoland」에서도 매시브 어택의 무한한 실험 정신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아마도 두 사람이 미래의 어느 날 주고받을 마지막 손길이 대중음악에서 트립합이 차지할 최종 영역을 확정할 것이다. 매시브 어택의 바이오그래피가 곧 트립합의 역사다.
글 김두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