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캐치감, 따뜻한 세련미로 무장한 오가닉한 '동적 세계'.
에픽하이의 타블로, MYK, 그리고 덤파운데드(Dumbfoundead)가 가세한 재미교포 무규칙 이종 힙합 아티스트
케로 원(Kero One)의 여전히 후레쉬한 세 번째 정규작 [Kinetic World]
아무래도 서구인들 기준에서 아시아계의 힙합퍼들이라 하면 랩배틀 대회에서 우승한 후 러프 라이더스(Ruff Ryders)와 계약한 진(Jin)이라던가 데프 적스(Definitive Jux)의 쿨 캄 피트(Cool Calm Pete), 필라델피아에 사는 중국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마운틴 브라더스(Mountain Brothers), 그리고 비트 정키스(Beat Junkies) 패거리들을 비롯한 각종 배틀 턴테이블리스트들을 떠올리기 마련일 것이다. 최근 길거리 랩배틀 동영상을 통해 한국에도 이름을 알린 덤파운데드(Dumbfoundead)의 경우도 그렇지만 미국의 씬에 존재하는 아시아계 힙합전사들은 대부분 이런 '기술'적인 면들이 주로 부각되어 왔다는 인상을 줬다. 만약 힙합에 기능올림픽 같은게 있었다면 아마도 아시아인들이 싹쓸어 갔을 것이 분명하다. 한국계 미국인 케로 원(Kero One)의 경우, 이런 테크니컬한 파트로 분류되는 아티스트가 아님에도 촉촉하고 재지한 무드를 만들어내면서 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런 노선은 일전에 언급했던 마운틴 브라더스와 연결 지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Kero One
캘리포니아 베이 에이리어 출신의 케로원(Kero One)은 90년대 초부터 MC와 비트 메이킹, 그래피티와 디제잉, 그리고 레코드 수집을 해왔다. 2003년 여름, 스스로 운영하는 레이블인 플러그 레이블(Plug Label)에서 자신의 첫 12인치 레코드 [Check the Blueprints]를 공개하는데, 이는 여러 로컬 라디오 스테이션과 레코드샵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놀라운 판매고로 이어진다. 여러 DJ들의 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됐고, 다양한 장소에서 스핀되기도 했다. 싱글은 DJ 미츠 더 비츠(MItsu The Beats) 또한 리믹스 했는데, 단지 싱글의 세일즈 하나만으로 정규 앨범이 릴리즈되기 이전에 일본에서 투어가 진행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재즈힙합이 일본과 한국을 점령할 무렵인 2005년도에 데뷔작 [Windmills of The Soul]을 발표했다. 실제로 서로 리믹스 해주는 사이이기도 했던 사운드 프로바이더스(SOund Providers)나 론 캐털리스츠(Lone Catalysts), 그리고 얼마전 운명을 달리한 누자베스(Nujabes)의 팬들에게 동시에 사랑 받았다. 샘플링과 실제 연주가 적절하게 매치된 한 장으로 여러 매체에서 호평을 얻고 중요하게 다뤄지면서 언더그라운드 재즈 힙합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해가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 앨범은 미국보다는 일본에서 몇 달 먼저 발매됐고, 일본에서는 HMV와 타워 레코드 등의 대형매장 힙합 차트 1, 2위에 오르며 선전했다. 한국에서도 보너스 CD를 포함한 형태로 발매됐는데, 이는 훌륭한 호응을 얻어냈다.
2006년 10월에는 [Plug Famalam Mixtape]이라는 믹스셋을 공개하기도 했다. 제이 디(Jay Dee)와 슬럼 빌리지(Slum Village), 그리고 에리카 바두(Eryka Badu) 등을 자신의 스타일로 믹스시키면서 DJ로서의 작업물을 담아낸 것이었다. 2007년도에는 레이블의 샘플러 격인 컴필레이션 [Kero One presents Plug Label]을 릴리즈 한다. 웨스트 코스트 언더그라운드에서 활약하는 크라운 시티 락커즈(Crown City Rockers), 라이트헤디드(Lightheaded)의 오메가 왓츠(Omega Watts), 그리고 달러가 필요한 스톤즈 쓰로(Stones Throw)의 알로에 블랙(Aloe Blacc) 등의 쟁쟁한 참여진들로 채워지면서 언더그라운드 팬들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2009년도에 두 번째 정규앨범 [Early Believers]를 완성한다. 역시 훌륭한 바이브를 가진 캐치한 비트로 무장했는데, 약간은 올드한 무드를 지녔던 전작보다는 좀 더 모던한 사운드를 담아냈다-이 이유가 꼭 오토튠 때문만은 아니다-. 무서운 사나이 자일스 피터슨(Gilles Peterson)과 관련이 있는 브라운즈우드(Brownswood) 레코드 소속의 벤 웨스트비치(Ben Westbeech), 북유럽의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핀란드의 싱어 투오모(Tuomo), 그리고 오메가 왓츠와 크라운 시티 락커즈의 캣 오우아노(Kat Ouano) 등이 앨범을 더욱 빛내줬으며, 한국의 에픽하이, [지구본 뮤직]에서 먼저 호흡을 맞췄던 다이나믹 듀오, 그리고 맵더소울 소속의 MYK의 이름 또한 트랙리스트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반에는 에픽 하이의 타블로가 피쳐링한 [Keep Pushin']이 추가되기도 했다.
2집 공개 당시에는 블랙 아이드 피스(Black Eyed Peas)의 윌 아이엠(will.i.am)이 직접 추천하고 있는 비디오 메시지가 인터넷 상에 떠돌기도 했다. 인터뷰에 의하면 케로 원도 그가 이런 메시지를 보내준 것에 대해 무척 놀랐다고 한다. 아마 윌 아이엠의 사무실에 일하는 아는 사람이 케로 원의 음악을 그에게 추천해 준 것이 계기가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한다 밝혔다. 이후 탈립 콸리(Talib Kweli)의 [In the Pocket]을 리믹스 하기도 했으며 페니(Pe2ny)의 곡 [Wake Up]과 라샨 아마드(Rashaan Ahmad)의 [Here We Go] 등에 피쳐링 하기도 했다. 커먼(Common)의 클래식 [The Light]도 리믹스했었는데, 이 곡은 뻐킹 불싸조 또한 리믹스 한 바 있다.
에픽하이의 음반 [魂 : Map the Soul]에 피쳐링하면서, 그리고 2009년 5월에는 에픽하이의 월드 투어에 합류하면서 에픽하이의 레이블 맵더소울의 명예 아티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에픽하이 6집
Kinetic World
전작으로부터 14개월 만에 돌아왔다. 본 작은 앨범의 제목처럼 또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진화’라 불러도 무방하겠는데 점점 표현해내려는 폭을 넓혀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있다. 인터뷰에 의하면 최근에는 제이 일렉트로니카(Jay Electronica)와 라 루(La Roux)를 즐겨 듣는다 얘기하기도 했다. 이런 레퍼런스는 얼추 이번 앨범 감상 직전의 힌트가 되어주는 부분이기도하다.
그의 장기인 유려한 피아노 멜로디가 돋보이는 [Let Me Clarify]로 앨범이 시작된다. DJ 먹스(DJ Muggs), 에비디언스(Evidence), 알케미스트(The Alchemist) 등과 작업을 해왔던, 마치 모스 데프(Mos Def)의 목소리를 연상케하는 1988년 생 파샨(Fashawn)이 참여한 타이틀 트랙 [Kinetic World]에서는 브라스 파트와 역동적인 비트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소울풀한 취향을 마음껏 풍기고 있다.
제목이 마치 보이즈 투 멘(Boyz II Men)의 곡을 연상시키는 트랙으로 재즈 기타의 하모니가 상쾌한 느낌을 주는 슬로우잼 넘버 [On Bended Knee]는 감성적인 트랙들을 좋아하는 한국 팬들에게도 크게 어필할 듯 싶다. 덤파운데드와 함께 [Different Galaxies]를 작업하기도 했던 샘 옥(Sam Ock)의 감미로운 목소리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디스코 비트와 댄서블한 기타리프를 바탕으로 전작의 일렉트로한 노선을 확장시킨 [My Devotion]의 경우 케로 원이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브리티쉬 일렉트로 힙합같은 느낌을 만들어내려 했다고 한다. 이전 케로 원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약간은 급진적인 행보인데, 리프와 비트는 마치 팅팅스(The Ting Tings)의 [Shut Up and Let Me Go]를 연상시키는 구석 또한 있다.
기존의 팬들이 사랑할만한 멜로우한 비트로 채워진 [Missing You], 플러그 레이블 소속인 톤즈(The Tones)가 피쳐링한 피치카토 주법이 주를 이루고 있는 애수어린 소울넘버 [Time Moves Slowly], 부드러운 기타와 싱그러운 휀더 로즈, 경쾌한 보컬, 그리고 오토튠이 공존하는 상쾌한 바이브를 가진 [Let's Ride] 등의 곡들이 청자들에게 비교적 익숙하게 다가가고 있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짐작 가능한 더티 사우스 비트를 가진 [Asian Kids]에는 그야말로 '아시아의 아이들'로 채워져 있다. 이전부터 함께 해왔던 스탠포드 졸업생 타블로(개콘의 샘 해밍턴은 MBC [무월관]에서 그의 영어를 두고 이태원에서 몇 년 살면 할 수 있는 영어라고 언급했다만.)와 MYK, 그리고 지금은 한국을 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 ex-2PM의 재범군과 함께 자신의 곡 [Clouds]를 작업하기도 했던 웨스트 코스트 넘버원 배틀 MC 덤파운데드가 한자리에 모였다. 약간은 진지하고 격양된 모양새로 이루어졌으며 미국국적으로 살아가는 아시아인들의 성찰을 담으려는 듯한 컨셉을 가진 듯 보인다. 신시사이저의 톤은 마치 노래방반주 같은데 이건 더티 사우스 간지 보다는 일부러 '한국적'인 무드를 위해 의도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것은 '남한' 출신의 영어권 아이들이 만들어낸 더티 '사우스' 트랙이다.
케로 원의 진지한 애티튜드를 상냥하게 감싸는 에스나 윤(Esna Yoon)의 보컬이 인상적인 일렉트로 튠 [The Fast Life], 그리고 비교적 캐치한 훅을 가진 휀더 로즈와 혼섹션의 조화가 흥겨운 [We Stay Fly]에는 라이트헤디드의 오델로(Othello)와 디마이너(Dminor)가 피쳐링해주고 있다. 사-라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즈(Sa-Ra Creative Partners)를 연상케하는 첨단의 일렉트로 사운드를 표방하고 있는 [Remember All That]으로 이 ‘키네틱’한 앨범이 종결된다.
피바인(P-Vine)에서 발매된 일본판의 경우 DJ 데크스트림(DJ Deckstream)이 리믹스한 [Remember All That]이 보너스로 실렸는데, 한국판 역시 보너스트랙이 하나 추가됐다. 2집 [Early Believers]에 들어있는 트랙 [Goodbye Forever]의 리믹스 넘버가 추가됐는데, 또 다른 재미교포 출신 아티스트인 초이스 37(Choice 37)가 리믹서로 참여했다. 그가 한국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개인적으로 통화했던 적이 있었는데-그 당시에도 케로 원의 소개로 연락했고, 실제로 이들은 미국에서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현재는 YG에서 활동하면서 G-드래곤의 앨범에 삽입된 [소년이여]를 비롯한 몇몇 트랙들을 프로듀스/리믹스 하기도 했다. 작년에 펼쳐진 글로벌 개더링(Global Gathering)에서 그는 G-드래곤과 투에니원의 무대에서 디제잉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부드러운 휀더 로즈를 중심으로 벤 웨스트비치의 보컬이 깔렸던 원곡은 롤링하는 라이브감으로 무장한 거친 드럼톤과 일렉트릭 기타로 대체됐다. 이번 보너스 트랙을 통해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아시안 키드’들의 약진을 본 앨범에서 무차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전작의 방향성을 한층 더 강조한 앨범이다. 이전 작의 '블루프린트'가 비교적 명확해진 구석이 있는데 보컬파트의 비중이 늘었다는 것 또한 단순히 힙합으로 분류하는 것을 주저하게끔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힙합의 테두리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여러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스무스한 정서를 이어가고 있지만 푸근한 흑백사진을 컬러로 색칠해 놓은 듯한 질감을 선사하고 있다. 일전 케로원의 재즈 힙합 부분을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그의 다른 부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아티스트가 정체되지 않은 채 진일보하고 있다는 것은 음악팬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음악에서도 그의 정신적인 여유를 감지할 수 있다. 힙합 음악의 팬이 아닌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만한 다양한 내용물들 또한 담겨져 있다. 일단은 듣기 쉽고 신선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앨범을 감상하는 이들의 마음 또한 여유롭고 가볍게 만들어줄 것이다.
인터뷰에 의하면 앞으로 MYK와의 프로젝트, 그리고 자신의 프로덕션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소울 싱어의 작업 등등이 대기중이라고 한다. 그의 팬이라면 케로 원의 풀랭쓰 앨범 이외에 새로 전개되는 다른 여러 프로젝트에도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름의 저녁 노을과 맥주가 함께할 무렵 이 앨범이 당신의 풍요로운 감성을 더욱 칠아웃 시켜줄 것이다. 힙합의 색채를 넘어선 컬러풀한 원더랜드가 여기에 있다.
- 한상철 (불싸조 http://myspace.com/bulssaz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