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의 말]
시간이 흐르고, 사람도 흘러갑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제 손으로 모두 반짝반짝하게 닦은 음악들을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거라고, 되뇌였죠.나의 글들이, 나의 멜로디가, 나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 음악들. 큼지막하고 뾰족하고 곧바른 잎사귀를 무성하게 달고 있는 나무라기보단, 어딘가 모르게 아주 엷은 맛이 나는 봄날의 밤 같은. 자, 이게 올해 나의 선물입니다. 여느 때처럼 미소띤 얼굴로 고마워, 라고 말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래도록 지금 이대로 있을 수 있도록, 음악이 사라졌습니다.
[제작자의 말]
CD 케이스에서 적당히 한 장을 꺼내 플레이어에 올려 놓습니다. 한없이 계속될 것 같았던 음악은 돌연 끝이 나고, 갑작스레 현실로 돌아온 듯한 기분. 초침이 숫자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동안, 모리가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이대로의 음악을 하고 싶어요.”상당히 절박한 표정입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음악에 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전 그냥, 그래 라고 동의를 했습니다. 휑하고 가벼운 대화,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에 익은 서로의 생각을 찾을 수 있는 묵직한 관계. 어마어마한 집이 있었고, 멋들어진 대문 안쪽으로 화려한 정원이 있었습니다. 반듯하게 재단되어있는 듯한 거실이 왠지 썰렁합니다. 모리가 하나씩 성실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얀 벽, 하얀 천장은 사라지고 엷은 파스텔 톤의 노란 벽지가 그 위로 드리워집니다. 투명한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유리잔 대신, 작은 리본이 달려있는 소담한 커피잔이 놓여 있습니다. 작은 꽃병, 어항도 가져다 놓았습니다.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문패도 걸어 두었습니다. 알 수 있었습니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리의 음악인 것을. 눈을 감고 온몸으로 귀기울입니다. 조금의 서투름은 있지만, 정겹고 편안한 소리의 기척. 모리에게 안겨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을 타고 음악소리가 흘러들어옵니다. 틀림없는 모리의 음악입니다.“음악이 사라졌습니다.”분명, 모리가 전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상쾌한 표정이 반짝입니다. 행복해 보입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리는 이야기하기 전에 음, 하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음, 곡 보냈어요.”메일을 열어보니 서른 곡의 파일들이 도착해 있다. 플레이 단추를 눌러 세트한 음악,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볼륨으로 흐르고 있다. 결정은 눈깜작할 사이에 끝났다. 이제 됐어, 라고 나는 말했다. 금방 기억할 수 있는 음악, 생긋 웃으며 인사하는 멜로디. 살랑살랑 기분좋게 흔드는 몸짓에 만족스런 반가움이 퍼진다. 나는 그대로 이번 음반의 부제를 반짝반짝 빛나는, 이라고 지정하였다.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눕는다. 눈을 감고 조그맣게 숨을 들이쉬자, 이 아이의 음악이 내 귀를 흔든다. 어둠 속으로 구슬 같은 별하늘이 퍼졌다. 아, 사람들이 이 음악을 듣는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음악이 사라졌습니다]
모리가 할 수 있는 음악, 모리가 맛있어 하는 음악, 모리만으로도 충분한 음악. 이 세 가지의 향이 예쁘게 일도록 할 것. 지금 생각하면, 역시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번 음반은 모리의 마음과 모리의 음악이 정확하게 정비례하고 있다. 백합꽃 같은 화사한 음악이 아닌, 천진하게 웃으며, 내미는 조그만 상자와 같은 선물. 이를 꼭 닮은 모리의 두 번째 앨범“음악이 사라졌습니다.”가 햇살이 비스듬하게 비치는 어느 날, 드디어 국내에 발매된다.
[선량한 열 번의 표정]
열 트랙으로 구성된 이번 음반은 소란을 떨지 않는 자유롭고 소박한 선량한 음악들이 차곡차곡 안겨있다. 천천히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는 선율도 자상함과 부드러운 감촉의 소리도, 전부 나를 지켜 주고 있는 기분. 모리의 음악을 한 입 베어물면, 햇살의 냄새, 햇살의 소리가 입 안 가득 퍼질 듯한 기분이 든다. 짙은 화장, 풍성한 선율을 덜어내니, 좀 감상적이고, 좀 편안해지고, 좀 솔직해진, 진솔한 노래들. 그녀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는 음악. 곡 여기저기서 모리의 진심이 빛나고 있다. 이번 음반은 전 곡의 작사, 작곡은 물론 편곡까지 모리의 손길이 닿아, 그녀의 유연한 감수성이 음반 전체에 흐르고 있다.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고, 그래서 곡을 쓰지만 그렇다고 음악이 전부는 아닌. 이런 당돌한 생활도 괜찮다, 고 생각했다.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듯 또렷한 표정을, 이렇듯 매력적인 그녀의 이야기를.
[햇살의 향기, 적당히 들으세요]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스치고, 진심을 전하는 말이 압도적인 지배력을 지닌 채 다시 찾아왔다. 음악 한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버린 모리. 향긋한 그녀의 향기가 뾰로통해진 마음에 말을 건넨다. 아, 차라리 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 나도, 당신도 도망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이번 만은 태연히 나를 맡기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