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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껴 선 공간, 그곳에서 울려오는 노래 혹은 주술
말: 이승열
정리: 최세희
울림 ambience
공간마다 다른 울림이 있다. 가령,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을 좋아한다. 아쉽게도, 그 울림을 스튜디오 녹음을 통해서 얻은 적이, 내겐 없었다. 알다시피 스튜디오 레코딩은 악기와 소리를 각각 따로 녹음해 담은 후, 최종적으로 합주한 것처럼 만드는 가공적인 과정을 거친다. 그게 나쁘진 않다. 그렇지만 나의 관심사는 스튜디오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합주한 것을 레코딩할 때 공연장의 공간감을 구현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었다. 그런 공간을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을 수소문했고 최종적으로 벨로주를 선택했다. 벨로주는 작년(2012년)에 네 차례의 공연을 했던 소규모 공연장이다. 내가 실제로 연주를 한 공간이라는 점, 거기서 느꼈던 울림이 좋았다는 점이 주효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앨범의 성격을 드러내는 음악은 모두 벨로주에서 녹음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여섯 트랙을 벨로주에서, 나머지 트랙을 플럭서스(소속사)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혼돈 muddle
그런 의미에서 이 앨범은 퍼포먼스의 기록에 충실한, 일종의 라이브 앨범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연주의 각 파트가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같이 뭉쳐져서 휘몰아치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도 통상 보컬은 앞세워 강조하는 편이지만 이 앨범에선 연주의 일부로 같이 움직인다고 할까. 스튜디오 레코딩의 장점은 음악의 각 파트가 각자의 공간을 확보해 서로 다치는 법 없이 잘 보존된다는 점이다. 라이브 앨범의 묘미는 악기와 노래마다 개별 마이크를 설정하더라도 서로 얼마간 뒤섞이기 마련이다. 그 혼돈, 뒤섞임이 좋다. 분리가 되는 모듈들을 끼워 맞췄다기보다는 마구 버무린 느낌이랄까. 그런 걸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필요했다. 사실, 스튜디오에 좀 지쳐있기도 한 터였다. 그래서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는 경우에도 풀밴드full band에 원테이크one take로 녹음을 고수했다. 중간에 자르거나, 나중에 수정하지도 않았다. 레트로? 빈티지? 글쎄, 현 스튜디오 시스템의 향상된 기술성보다는 공간 자체가 주는 소리의 느낌, 다시 말해 현장감을 살리고 싶었다. 물론, 이 앨범에 담긴 현장감도 왜곡된 형태겠지만, 스튜디오 레코딩을 통해 얻은 것보다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단절 estrange
I take myself too seriously. 평소 나 스스로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나를 지탱해주면서, 동시에 나를 가두기도 하는 말이었다. 과거엔 나 자신에 대해서, 나의 윤리의식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음악에 대해서 ‘이래야만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앨범에 와선, 앞서 말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런 원칙에서 벗어났다. 물론, 지난 앨범도 나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을 거쳐 정성껏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집착한 적은 없나 하는 의문이 든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엔 전보다 더 자유롭게 나를 풀어놓을 수 있고, 나의 영감과 욕망이 이끄는 대로 갈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 원칙에 따라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면 폐기했을 게 분명한 음악을 앨범에 싣기도 했다. 가사 면에서도 이전보다 내 안의 것들을 좀 더 자유롭게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이번 가사에 영어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이다. 이른바 1.5세대로서, 내게 한국어로 가사를 쓴다는 건 보람되고 애착이 가면서도 힘겹고 긴장 되는 일이다. 그래서 이번엔 한국어로 노래해야 한다는 원칙도 버렸다. 무엇보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이번 앨범의 목적이 아니다. 언어 이전의 상태, 힘, 공명의 차원에서 다가가고 싶다.
파탈 emancipate
경계가 지워진 소리를 찾고 싶었다. 수학적으로 구분이 가능한 음, 스튜디오 레코딩이 요구하는 정확한 음이 아닌 다른 음을 찾아 나섰다. 이 앨범에서 그런 음을 찾아내기 위해 방법론적으로 고민하고 시도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음악적인 아이디어를 구체화해 작곡을 하면 레코딩에 들어가기 전에, 무대에 가지고 올라가서 선을 보였다. 그렇게 무대라는 새로운 공간과 분위기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을 계속 덧붙여 나갔다.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과정을 거꾸로 밟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무대에서 선보이는 음악은 레코딩이 끝난 완성된 형태가 대부분 아닌가. 하지만 나는 레코딩이 되기 전의 음악을 들고 공연과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으니. 그런 의미에서 당연히 모험이었고, 시행착오도 각오해야 했다. 그렇지만 내 개인적으론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애초 나의 음악적인 아이디어가 유기적인 과정을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었다. 이런 과정은 그런 의미에서 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track by track
1. minotaur
앨범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쓴 곡이다. ”satin camel"과 “we're dying"과 더불어 한 달 안에 다 썼으니 놀라울 정도로 빨리 썼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의 Le Hoai Phuong이 단보우로, 모로코의 Omar Sbitar가 프랑스어 내레이션으로 참여했다. 프헝과의 인연은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의 한 클래식 방송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연주를 듣고 만나서 합주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음악에선 중간의 미디 컨트롤러로 전환한 기타 연주와 함께 중요한 축이 되었다. Omar의 경우, 인트로에서 낭독을 하고 싶다고 해서 당시 내가 인상 깊게 읽고 있었던 <이방인>(알베르 까뮈 지음)의 한 구절을 프랑스어로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제목은 맨 나중에 결정했다. 데모 버전을 한 친구에게 들려줬더니 터너Turner의 폭풍 그림이 연상된다고 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내친김에 구글링을 해서 보다가 찾은 그의 [미노타우르스 호의 난파, The Shipwreck of the Minotaur]라는 작품에서 착안하게 되었다. 신화 속의 미노타우르스는 어머니의 수간을 통해 태어난 괴물로 사람을 잡아먹고 살았다. 그런 속성이 ‘추잡하다’라는 가사와 상통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는 부모의 죄로 나면서부터 동굴에 갇혀 살았던 비극적인 존재이다. 내가 ‘추잡하다’라고 썼을 땐 혐오 못지않게 연민과 절망의 감정도 있었다. 그런 양가적인 면을 미노타우르스가 갖고 있다고 보았다.
2. we are dying
데모시절 제목이 "danbau"였을만큼 처음부터 단보우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다. 처음 프헝의 단보우 연주를 들었을 때, 그 에너지가 매우 록rock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에너지를 내 음악 안에서 구현해보고 싶었다.
3. who? ( veloso live )
두 개의 버전 중 cafe Veloso에서 녹음한 것이다. 앞서 말한 공간의 차이가 소리를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4. 개가 되고
“minotaur"와 함께 오마르가 보컬 임프로비제이션에 참여한 곡이다. 여기선 아랍어로 참여했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문’처럼 들려서 좋다. 그 덕에 음악 색깔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단보우와 좋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적당하게 ‘저쪽’으로 가준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론 녹음하면서 가장 재미있게 한 곡이다. 스튜디오에서 했다면 아마 채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구애받는 것 없이 자유롭게 했다.
5. satin camel ( 바다였던 )
이곡이 만들어진 과정은 사실 나로서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인트로의 기타 진행과 내 노래는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사막과 바다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제목부터가 부조리하다. 상충되는 아이디어들이었지만 나로선 지극히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멤버들과 합주를 해 나가면서 보완해 나갔다.
6. fear ( don't let it get the best of you darling )
피아노로 곡을 쓰는 걸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 기타로 시도한 걸 피아노로 옮기는 과정을 즐기는데 이 곡은 애초 건반으로 출발했다. 원하는 보이싱에 맞게 코드를 진행한 후 멜로디를 붙여 나갔다.
7. who? ( fluxus studio live )
Veloso에서 녹음한 후 보컬 면에서 다른 걸 시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노래를 좀 더 부각시킨 ‘친절한’ 버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Fluxus 스튜디오에서 재녹음했다. 풀밴드, 원테이크 녹음에 가공적 효과를 배제한 건 여전하되, 노래만 새롭게 불렀다.
8. secretly (wouldn't you like to know...)
[why we fail]의 “솔직히”의 영어버전이다. 한국어로 가사를 옮기면서 낮아진 키를 원래대로 높여서 불렀다. 스튜디오 레코딩에서 제거되기 마련인 ‘흠’까지도 들려주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장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반적으로 흠으로 여겨지는 것들도. 해상도가 낮은 화면으로 볼 때의 거칠지만 편안한 분위기.
9. bluey ( feat. 장 필순 )
4. 5년 전에 쓴 음악이다. 나로선 부록 개념으로 이 앨범에 끌어들였다. 음악을 시작한 계기가 블루스를 듣고 연습을 하면서였다. 내 나름대로는 언젠가 블루스의 개념에 충실한 앨범을 내고자 하는 꿈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다. 블루스도 내 음악의 한 지분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나의 블루스 연작의 첫 출발이 한대수와 함께 한 “그들의 블루스”이다. 두 번째가 이 곡이다. 제목도 그래서 blues의 blue를 넣었다. 한대수 다음으로 여성 뮤지션이랑 하고 싶었다. 그러다 20대 때 좋아했던 장필순을 떠올리고 부탁했다. 듀엣 작업은 원격으로 이루어졌다. 연주와 내 보컬이 들어간 음원을 온라인으로 보냈고, 장필순은 제주도에서 작업해 다시 보내오는 식이었다. 사전에 내 쪽에서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도 어떤 질문이나 요청 없이 보컬을 입혀 보내왔다. 결과는 아주 마음에 든다.
10. cynic
처음 완성했을 땐 내 나름대로는 다음 번 앨범을 예고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냥 열린 엔딩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타 사운드의 튜닝 사운드가 특이한지 주변에서 벤조냐, 만돌린이냐, 심지어 시타르냐고 반응한 것이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