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 Record Everywhere About Life
일상의 모든 공간에서의 녹음과 기록.
‘일상의 모든 공간에서의 기록은 가능한가?’ 라는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 최고은의 시도는 3번째EP [REAL]의 발매로 현실이 되었다. 2012년 겨울부터 시작하여 2013년 새해가 시작될 때까지 진행된 최고은의 유럽투어를 고스란히 담아 만든 이번 앨범은 5곡의 음악이 담긴 CD와 5개의 영상이 담긴 뮤직비디오 DVD로 구성되었다. 촬영과 녹음을 모두 원테이크(중간에 끊어감 없이 한 번에 담아내는 방식)로 작업했던 이번 앨범은 실제 유럽의 겨울이라는 계절만 고려했을 때 사실상 야외작업은 불가능 한 수준이었다. 실내작업 또한 시시각각 달라지는 환경에서 매번 그 공간의 독특한 질감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녹여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래서 [REAL]의 모든 트랙의 질감은 각양각색이다. 상황들이 모두 생생하게 담겨있다. 그래서 더욱 REAL 하며 일상의 공간에서의 소리와 영상을 동시에 사실대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또한 REAL 하다. 최고은의 3번째EP [REAL]은 아티스트 최고은에게 자신의 음악을 고민하는 과정의 랜드마크이자, 정규앨범 작업으로 향하는 하나의 장치가 될 것이다.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다운 Beautiful as you are 아티스트 최고은
(한현우 조선일보 기자)
최고은이 독일 음악기획사 초청을 받아 유럽으로 음악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일말의 걱정이나 우려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음악과 뮤지션에 상대적으로 열려있는 외국으로 어떻게든 진출하는 것이 좋을 것이었다. 물론 연주와 연출, 무대, 섭외와 홍보, 그리고 숙식까지 모두 뮤지션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이번 투어가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2012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등지를 직접 운전해 다니며 수많은 낯섦과 맞닥뜨린 그녀는 음악적으로나 한 인간으로서나 한층 성숙해졌을 것이다.
그녀의 새 음반은 이 두 달간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은 녹음의 결과물이다. 때론 가정집에서, 때론 창고에서, 간혹 또 클럽에서 열린 마라톤 공연을 치르면서도 착실하게 녹음을 진행한 최고은 일행의 청년정신에 진지한 경의를 바치고 싶다. 이 음반에는 그간 발표했거나 유럽 투어에 맞춰 녹음했던 곡들이 새로 녹음돼 있다. 음악 트랙이 5곡, 영상과 함께 녹음한 것이 5곡이다. 음악과 영상에서 북쪽 나라들의 차고 건조한 공기가 코를 시큰하게 울린다. 숙소와 세탁소, 베를린 장벽 앞 등지에서 찍고 녹음한 음악 영상은 모든 젊음이 오로지 젊다는 이유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고은은 이번 녹음에서 리버브(reverb)를 거의 쓰지 않아 음색의 찰기를 제거했는데, 이것은 그녀의 매력적인 창법이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얼마나 빛을 발하는지 보여주는 장치가 됐다. 기름을 두르지 않은 날것의 음성은 그녀의 음정이 얼마나 정확한지, 비음(鼻音)과 두성(頭聲)을 얼마나 능숙하게 오가는지 생생하게 들려준다. 음악은 더욱 미니멀해졌고, 그것이 현장감을 더욱 살려주고 있다.
모든 곡은 한 테이크(take)를 온전히 살린 것으로 보인다, 첫 곡 ‘봄’에서 최고은은 자신이 연주하는 기타 한 대에 기대어 처연하게 노래한다. 아무런 음향효과가 없어 메마르게 들리는 이 곡은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왜 숲이 아닌가/ 어느 누군가/ 멀리 있는 봄”이란 가사에서 기품을 드러낸다.최고은의 노래들은 대개 싱얼롱이 어렵지 않은 멜로디를 갖고 있으나, 그녀처럼 부르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다시 말해 노래방에서 부르기보다는 무심한 척 흥얼거리는 편이 낫다). ‘Beautiful As You Are' 같은 노래가 특히 그렇다. 이 노래 중간에 등장하는 느린 스캣을 따라하려면 매우 수준 높은 내공이 필요하다. 그것이 최고은의 포크음악을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최고은은 목청을 열어 터뜨릴 것 같은 대목에서 오히려 절제함으로써 노래를 고급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데, 'Sunrise'의 고음에서 일부러 닫힌 소리를 내는 것이 좋은 예다.
영상이 딸려있는 다섯 곡은 최고은의 유럽 투어가 어떠했을지 가늠케 해준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연출 덕분에 짧은 단편영화를 보는 느낌마저 든다. 세탁기 도는 소리, 발자국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바람 소리까지 자연스럽게 담은 녹음이 최고은의 유럽 투어에 함께 따라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된다.
특히 브레멘 숙소에서 찍은 ‘Beautiful As You Are'는 잘 만든 뮤직비디오로도 손색 없다. 방들과 부엌, 욕실이 빙 둘러서 배치된 거실 한 가운데서 카메라가 서서히 돌아가는데, 카메라가 노래 길이에 맞춰 한 바퀴 돌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보인다. 맨발로 침대에 걸터앉아 노래하는 최고은으로부터 시작해 짐을 다 싸놓고 TV를 보는 사람, 쪽잠을 자다가 누군가의 노크소리에 벌떡 일어나는 사람, 배낭을 메고 욕실에서 이를 닦는 사람의 풍경이 차례로 등장한다. 특히 칫솔(toothbrush)로 이 닦는 소리는 말 그대로 브러시로 스네어를 연주하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노래가 끝나면 이들이 숙소 밖으로 나와 유럽 곳곳을 타고 누볐을 스테이션 웨건에 악기며 전기밥솥을 싣고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다운(Beautiful as you are)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