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울리는 리릭시스트 커먼, 음악인생 최초의 베스트 앨범
“내가 10살일 때, 한 소녀를 만났어/그녀에겐 영혼이 있었다는 것이 가장 좋았지/(중략)/ 그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에어컨을 틀어주고/가만히 그녀의 말들 들어주었어/그녀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중략)/내가 얘기하고 있는 그녀는 바로 힙합이야”
힙합의 역사를 통틀어 이처럼 낭만적이고 감동적으로 힙합음악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곡이
또 있을까? 힙합을 한 명의 여인에 비유하여 이야기를 전개한 신선한 구성과 곡이 발표된 94년 당시 음악계를 주름잡던 갱스터 랩에 대한 반감을 담아내 화제가 됐던 “I Used to Love H.E.R.”는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힙합 팬들이 명곡으로 회자하는 곡이다. 지성파 MC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커먼(Common)이 이 곡을 발표한 지 어느덧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의 데뷔가 92년도였음을 고려하면, 커먼이 랩게임에 뛰어든 지 약 15년이나 된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비슷한 활동기간의 여느 뮤지션들이 한 번쯤은 발표하는 그 흔한 베스트 앨범 한 장 내놓지 않았다. 오랫동안 활동해온 뮤지션들 중 대부분이 전성기를 넘긴 것과는 달리 오히려 10년이 넘어서야 한창 전성기를 맞이한 그이기에 아직 과거의 결과물의 힘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근에서야 커먼의 존재를 알게 된 이들은 지금까지 그의 발자취가 궁금했을 터. 드디어 이번에 커먼의 디스코그래피에 최초의 베스트 앨범으로 기록될 [Thisisme Then: The Best Of Common]이 발표됐다.
일명 윈디시티로 불리는 시카고에서 태어난 커먼은 대부분 힙합 뮤지션들과는 달리 어느 정도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학업에 열중하던 그가 음악인으로서 삶의 노선을 바꾸게 된 건 힙합음악을 접하고부터. 그는 죽마고우였던 코리(Corey), 디온(Dion)과 함께 씨.디.알(C.D.R)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힙합퍼로서 첫 발걸음을 뗐고 얼마 후, 데뷔작 [Can I Borrow a Dollar?]를 발표하며 커먼 센스(Common Sense)라는 이름의 솔로 MC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비록, 큰 반응은 일으키지 못했지만, 진중한 가사와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랩 실력으로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2년 뒤인 1994년에 그는 두 번째 앨범 [Resurrection]으로 많은 힙합 팬의 뇌리 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처음에 언급했던 “I Used to Love H.E.R.”를 비롯한 프로듀서-당시에는 무명이었던-노아이디(No I.D)의 빼어난 비트와 커먼이 내뱉는 은유적인 어구들은 앨범을 들은 수많은 이의 가슴을 흔들어놓았고 결국, 이 두 친구가 우정과 열정으로 빚은 합작품 [Resurrection]은 당당히 힙합 클래식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단 두 장의 앨범으로 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 된 커먼은 약 3년 만에 자신의 이름에서 ‘Sense’를 떼어내고 로린 힐(Lauryn Hill), 씨로(Cee-Lo), 큐팁(Q-Tip) 등 타 지역의 스타 뮤지션들을 대동한 채 세 번째 앨범 [One Day It'll All Make Sense]를 발표한다. 전작들에 비해 세련되고 조금은 편해진 음악 스타일 때문에 일부에서는 너무 대중적인 면을 지향한 것이 아니냐며 섭섭함을 표하기도 했지만, 이전보다 한층 성숙하고 깊어진 삶의 성찰이 드러나는 가사와 양질의 비트는 보다 많은 이에게 커먼의 진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앨범은 판매량 면에서도 호조를 보였는데 이 때를 기점으로 그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이라던가 다른 뮤지션들의 앨범에 게스트로 참여하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이후에도 이제껏 몸담았던 릴레티비티(Relativity)에서 메이저 레이블인 MCA로 거처를 옮기고 발표한 네 번째 앨범 [Like Water for Chocolate]을 통해 좀 더 재지하고 소울적인 심상에 접근하며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고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세 명의 천재 프로듀서들(?uestlove, James Poyser, Jay Dee)과 함께한 다섯 번째 앨범 [Electric Circus]에서 진보 힙합의 진수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렇게 진보적인 베테랑 MC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던 커먼이 대중적으로도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바로 칸예 웨스트(Kanye West)의 음악과 결합하면서부터다. 고전 소울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데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칸예 웨스트의 지원은 확실히 강력했다. 이 둘이 1 MC 1 프로듀서 체제로 발표한 커먼의 여섯 번째 앨범 [Be]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 결과물이었고 이 앨범으로 말미암아 커먼에게는 최고의 전성기가 찾아온다. 그는 ‘스모킹 에이스’와 ‘아메리칸 갱스터’ 등 화제의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도 왕성환 활동을 선보였으며, 칸예 웨스트와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춘 새 앨범 [Finding Forever]는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 [Be]를 능가하는 반응을 얻은데다가 커먼에게 음악인생 최초로 ‘빌보드 앨범차트 1위 데뷔’라는 영광을 안기기도 했다. 이번에 발표된 베스트 앨범에는 [Can I Borrow a Dollar?]를 시작으로 [Resurrection]을 거쳐 [One Day It'll All Make Sense]까지의 발자취가 담겨있다. 한 마디로 커먼이 지금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전, 어찌 보면, 가장 순수하고 열정이 넘쳤던 시기의 음악들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자 그럼 이제부터 앨범에 수록된 주옥같은 트랙들 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서 들어보아야 할 곡들을 한 곡 한 곡 살펴보자.
Take It EZ_ 첫 앨범의 첫 번째 싱글로 키보드와 색소폰의 조합이 소울풀함을 극대화시키는 곡이다. 커먼이 지금과는 달리 당시 유행하던 텅 플리핑(Tongue Flippin’:혀를 빠르게 굴리면서 구사하는 랩스타일) 래핑을 구사하는 것을 듣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Breaker 1/9_ “Take It EZ”에 이어 발표된 두 번째 싱글. 지금까지 많은 힙합 트랙에서 샘플링된 아이즐리 브라더스(The Isley Brothers)의 명곡 “Between The Sheet”과 전설적인 트럼페터 도날드 버드(Donald Byrd)의 "Black Jack"을 기가 막히게 버무린 비트가 일품이다.
Soul By The Pound_ 첫 앨범에서 세 번째 싱글로 발표된 곡이다. 아이즐리 브라더스 못지않게 힙합 뮤지션들의 단골 샘플링 대상인 드바지(Debarge)의 명곡 “I Like It”을 비롯한 여러 고전 소울에서 샘플링한 투박한 비트와 그 어느 곡에서보다 다이내믹하고 힘찬 커먼의 래핑이 인상적인 트랙이다.
I Used to Love H.E.R._ 많은 힙합 팬에게 힙합클래식으로 칭송 받는 두 번째 앨범 [Resurrection]의 대표곡.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힙합을 여인에 비유하여 전개하는 가사가 전 세계의 힙합 팬을 열광케 했고 커먼이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리릭시스트(Lyricist)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곡이기도 하다. 꼭 가사를 음미하며 들어볼 것을 권한다!
Resurrection_ 두 번째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으로 마일즈 데이비스가 가장 좋아했다는 재즈 피아니스트 아마드 자말(Ahmad Jamal)의 명곡인 “Dolphin Dance”를 비롯한 여러 재즈 명곡들을 샘플링하여 재지함의 극치를 선사한다. 또랑또랑한 피아노 샘플의 중독성 또한 최고.
Thisisme_ 이번 베스트 앨범의 타이틀과 동명인 이 곡은 커먼의 여유로운 래핑과 휀더 로즈 샘플이 주는 아련함이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트랙이다. 후반부에 케알에스 원(KRS-One)의 랩을 이용한 스크래칭이 듣는 맛을 더한다.
Retrospect for Life_ 세 번째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알앤비/힙합의 여신 로린 힐(Lauryn Hill)과 듀엣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흑인음악계의 두 전설 도니 헤더웨이(Donny Hathaway)의 “A Song for You”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Never Dreamed You'd Leave in Summer”를 샘플링한 서정적인 비트 위로 흐르는 로린 힐의 보컬과 지난날을 회상하는 커먼의 가사가 큰 감동을 안긴 곡이다.
All Night Long_ 필라델피아 출신의 걸출한 힙합 밴드 더루츠(The Roots)가 프로듀싱과 세션으로 참여하여 라이브 재즈힙합의 진수를 들려주는 트랙이다. 특히, 네오 소울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에리카 바두(Erykah Badu)의 참여가 돋보인다.
G.O.D_ 국내 대중에게는 날스 바클리(Knarls Barkley)의 멤버로 알려진 씨로(Cee-Lo)가 남부 힙합그룹 구디맙(Goodie Mob)의 멤버였을 때 참여한 곡으로 씨로는 이 곡에서 랩이 아닌 보컬리스트로서 능력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정의하는 것들에 대한 두 MC의 철학적인 가사가 아름다운 비트를 타고 흐른다.
High Expectations_ 이번 베스트 앨범에 수록된 곡 중 유일하게 정규 앨범 외에서 선곡된 곡이다. 농구 선수 케니 존스(Kenny Jones)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Soul In The Hole’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됐던 곡으로 일반 벌스(Verse)에서 규칙적으로 등장하던 스크래칭이 후렴구에서 소울 샘플과 어우러지는 구성이 이 곡의 백미다.
대중 입장에서 베스트 앨범은 단지 한 뮤지션의 히트곡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뮤지션에게는 지금까지 자신의 발자취를 정리하는 의미 있는 결과물임과 동시에 그동안 이룩한 업적을 과시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물론, 개중에는 얄팍한 상술에 의해 기획된 앨범도 있지만, 여하튼 잘 기획되고 만들어진 베스트 앨범은 해당 뮤지션과 그 뮤지션의 팬들 모두에게 분명 의미 있는 한 장의 결과물로 다가올 것이다. 이번 커먼의 [Thisisme Then: The Best Of Common]은 후자에 해당하는 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약, 커먼을 뒤늦게 알게 되어 그의 음악적 뿌리가 궁금했던 이들이나 90년대 초•중반의 소울풀하고 재지한 힙합의 진수를 느끼고픈 이들이라면, 본 작은 더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오늘날 어찌하여 커먼이 세계 힙합 팬들의 인정을 받는 MC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한 장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