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지의 음악은 현대 재즈계에서 보기 드문 독창성을 지녔다. 뉴욕과 고향인 한국에서 다진 경험이 원활한 소통을 이룬 것으로 보이며, 풍부한 멜로디와 화성을 갖췄다. (트럼페터 Ralph Alessi)
정답만을 강요하는 세상에 이면의 아름다움을 지닌 한 피아니스트의 데뷔작이 던져졌다. 은근하고도 치명적인 매력, 그게 현재의 이선지다. (재즈비평가 김현준)
[뮤지션]
이선지 (piano)
Ralph Alessi (trumpet)
Ben Street (bass)
Mark Ferber (Drums)
[뮤지션 프로파일]
1997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연주전공
2002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대학원/연주전공
2005 Berklee College of Music/연주전공
2006 New York University 대학원/Jazz Performance&Composition
2005 - 뉴욕등지에서 활발한 연주, 녹음활동
2008 Brooklyn에 위치한 SIM(School for Improvised Music) workshop참여 (가장 creative한 연주자에게 주어지는 장학금 수여)
현) 서울예대, 호원대학교, 동아방송대 출강
[앨범 해설]
프로듀서의 역할까지 떠안은 재즈 연주자의 데뷔 앨범은 여간해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피아니스트 이선지의 데뷔작은, 모든 면에서 아주 좋은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명의 소중한 연주자를 갖게 됐다.
풍부한 경험은 이선지의 큰 자산이다. 대학에선 불어를 전공했으나 음악에 대한 꿈이 그녀로 하여금 다시 서울예대에 진학하게 했다. 가요와 뮤지컬, 영화음악까지 범위를 넓히면서 활동이 이어졌고, 클럽에서 벌이는 연주도 병행했다.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강단에서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했지만 결국 새로운 도약을 위해 유학을 택했다. 재즈를 본격적으로 연주하겠다는 열정이 큰 몫을 했겠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갈망'이었다. 보스턴과 뉴욕대학교에서 공부하며 길 골드스타인(Gil Goldstein), 돈 프리드먼(Don Friedman), 랠프 알레시(Ralph Alessi) 등을 사사했고, 빌리 드러몬드(Billy Drummond), 조지 가존(George Garzone), 조 로바노(Joe Lovano) 등 내로라하는 음악인들과 협연했다. 재즈의 향취를 흡수하기 위해 매우 적절해 보이는 행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만의 독창성을 획득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할지에 달려 있었다.
이선지의 데뷔작 'The Swimmer'는 작곡만 가지고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이에 대해 강한 집착을 숨기지 않는다. 콜 포터(Cole Parter) 원작의 스탠더드 'So in Love'를 제외한 여덟 곡이 창작곡인데, 그렇다고 단순히 비율의 문제를 얘기하는 건 아니다. 그녀의 곡들은 대부분 포스트모던을 지향한 채 독특한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일견 우리나라 연주자의 작품이 아닐 것이란 인상이 들만큼 이질적이기도 하다.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새로운 이미지의 구축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최근 우리나라 재즈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여러 음악인들의 작품 중에서 손꼽을 만큼 시선을 끈다. 그 이미지는 구상과 추상을 오가며 매우 이성적인 면모를 과시한다. 'Unrequited Love'를 제외한 모든 곡들이 감성에 의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것이 아닌, 멜로디의 모티프와 리듬, 화성의 상관관계를 오래도록 조율하며 완성해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치밀하게 '조탁된' 작곡이라고나 할까.
'On the Fly'에서 점을 찍듯 이어가는 솔로, 'Horses on the October Night'와 'Reflection'에서 좀더 추상적으로 전개되는 연주, 그리고 리듬을 타고 넘는 'Cry'의 솔로는 앨범의 모든 것을 상징한다. 'The Swimmer'의 멜로디와 솔로에서 맛볼 수 있는 시니컬한 면모도 빼놓을 수 없다. 인상주의적으로 말하면, 여기에서 묘사된 '수영하는 사람'은 결코 잘 단련된 기술로 자연스레 물살을 가로지르는 수영선수가 아니다. 무언가에 쫓긴 듯 발버둥치며 사지를 놀려대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되레 물 속으로 가라앉기만 하는 상황이 연상되기도 한다. 일견 낯 뜨거운 우리네 삶의 모습을 희화화한 셈인데, 이렇듯 효과적으로 형상화된 이미지와 그 안에 깃든 페이소스를 포착할 수 있다면 구상과 추상 사이를 오가는 앨범의 매력을 비로소 파악한 것이다. 두 번째 곡인 'Peace'에서 넓디넓게 이어지는 모드의 흐름 또한 앨범 전체의 지향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아름다운 곡이다.
'The Swimmer'에 실린 아홉 곡 중 피아노 트리오로 연주된 'On the Fly'와 'Unrequited Love', 그리고 'So in Love'를 제외한 여섯 곡은 트럼펫 쿼텟의 편성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서 트럼펫을 맡은 이는 1990년대부터 모던 크리에이티브 계열에서 탁월한 음악성을 선보인 랠프 알레시(Ralph Alessi)다. 무엇보다 그는 이선지의 작곡이 지닌 의미와 지향을 완벽히 파악한 채 연주에 임했다. 작품의 높은 완성도를 위해 그의 역할은 매우 컸는데, 솔로의 진행 뿐 아니라 간간이 이어지는 처연하고도 냉랭한 톤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아울러, 동료들 사이에서 두터운 신뢰를 얻고 뉴욕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베이시스트 벤 스트리트(Ben Street)와 드러머 마크 퍼버(Mark Ferber)의 탄탄한 연주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렇다고 이들이 앨범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선지의 좋은 작곡이 이들로 하여금 풍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유명한 외국 음악인과 함께 녹음한 우리나라 연주자의 앨범 중, 때로 그들의 카리스마에 눌려 가진 것을 충분히 어필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는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선지는 다른 이들이 더 나은 것을 뽑아낼 수 있게 하는 조정자의 역할까지 훌륭히 해냈다. 그 여유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결과를 보장할 수 없으면서도 머나먼 여정을 택했을 텐데, 새롭지 않으면 존재가치조차 없다는 관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을 텐데, 시도 때도 없이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창조성에 대한 갈망이 되레 자신을 아프게 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The Swimmer'가 더없이 재즈적이라고 믿게 됐다. 그녀가 내뱉는 한 마디는 언제나 이면을 품고 있다. 그 이면을 들춰내야겠다는 욕망에 자꾸만 반복해서 앨범을 듣게 됐다. 정답만을 강요하는 세상에 이면의 아름다움을 지닌 한 피아니스트의 데뷔작이 던져졌다. 은근하고도 치명적인 매력, 그게 현재의 이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