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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vpatoria Report
스위스 출신인 엡파토리아 리포트(The Evpatoria Report)는 2002년 1월에 결성됐는데, 두 대의 기타, 베이스, 드럼, 그리고 바이올린과 건반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다. 비쥬얼 아트를 담당하는 사람까지 멤버로 계산하고 있다는 점이 약간 특이하며 고요한 무드와 맹렬한 감성을 교차 시키는 연주 중심의 밴드로 전세계 포스트 록 팬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다. 여러 밴드들과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국내에서도 충성스런 팬들을 몰고 다니는 일본 포스트 락 씬의 수퍼스타 모노(Mono)와 다양한 요소들을 흡수하면서 국내에서도 사랑 받고 있는 칼렉시코(Calexico), 그리고 로스 엔젤리스 출신의 포스트 락 밴드 레드 스패로우스(Red Sparowes) 등과 함께 무대에 서곤 했다. 그들의 사이트를 직접 방문해 보면 알겠지만 전 유럽을 아우르면서 투어를 다니곤 했으며 라디오헤드(Radiohead)라던가 매직 넘버스(Magic Numbers)와 같은 밴드들이 메인에 섰던 페스티발 같은데도 참여한 바 있다.
밴드는 2003년도에 EP를 발매하고 첫번째 정규 앨범인 [Golevka]를 2005년도에 공개한다. 두 곡이 수록된 EP는 이들이 자체적으로 발매했으며 [Golevka]는 2005년도에 발매됐지만 후에 아르헨티나에 있는 트와이라잇 레코드(Twilight Records)에서 2008년도에 라이센스 되기도 한다.
[Maar]
겨우 네 곡을 수록하고 있지만 러닝타임은 60여분에 달한다. 이 장대한 전개에 몸을 던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좀 부담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만 이런 종류의 음악을 애호하는 청취자들이라면 이 길고 맹렬한 여행의 패턴이 어느덧 익숙해졌을 것이다. 결국 모든 ‘장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데, 탈 장르화를 무기로 말 그대로 ‘다음 세대’의 대안으로 분류됐던 ‘포스트 록’이라는 것이 서서히 정형화 되어간다는 점은 확실히 처음의 취지와는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장르’를 즐기는 팬들에게는 그저 또 다른 신선한 들을 꺼리가 제공된다는 데에 그 의의를 두면 될 것 같다. 전세계의 인스트루멘탈/포스트 록 계보를 만들어 놓은 페이지들 마저 있으니 말이다. 영/미권, 그리고 일본이 아닌 이상에야 한나라 당 두 세 밴드가 있을까 말까 한 장르 아니던가.
Eighteen Robins Road
세가지 파트로 구성된 첫번째 트랙 [Eighteen Robins Road]는 유튜브에서도 심심찮게 라이브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마치 스매싱 펌킨즈(The Smashing Pumpkins)의 [Cherub Rock]과 흡사한 긴장감 넘치는 생톤의 기타 소리로 시작해서 조진 이후 기타 트레몰로와 가슴 아픈 현악 파트의 멜로디가 전개되고 후에는 4분의 3박자가 서서히 고조되면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특히 현악기와 분노하는 기타의 코드/멜로디 구성은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Godspeed You! Black Emperor)를 떠올리게끔 한다.
Dear Now
시작부터 잔뜩 긴장감을 머금은 채 달려나가다가 실로폰과 함께 적막한 기타 리프가 어우러지며 어둡고 무겁게 진행되다가 중반부부터 끝까지 트레몰로로 무한 조지는 파트가 결국은 듣는 이를 새하얗게 만들어 버린다.
Mithridate
한국말로 읽으면 '미쓰리 데이트'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사전을 보니 고대의 해독제 정도의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한다. 기타 하모닉스 부분의 멜로디는 전설의 국가대표 포스트 록 밴드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의 [폭우]와 흡사한데, 발매연도로 따지면 속옷이 앞서있다. 중간의 적막한 부분을 나레이션이 채워주고 있으며 미드템포로 서서히 층을 쌓아 나가다가 역시 막판에는 트레몰로로 조지면서 막을 내린다.
Acheron
아름다운 현악파트로 시작하면서 역시 아주 느리고 오랜 시간동안 물기를 머금은 서정적인 무드로 이어나간다. 중반부에는 아예 뭉개진 소리를 내면서 앨범에서 가장 잔혹한 부분이 흐르다가 조짐의 끝부분 여운만으로 대략 삼분정도를 견뎌낸다. 이후 잔잔한 기타 프레이즈가 전개되는데 너무 뻔하게 마지막에 광폭하게 끝내지 않아서-이제는 이게 뻔한게 됐다- 오히려 좋았다고 생각된다.
리버브를 잔뜩 머금은 아름다운 기타 멜로디, 그리고 특히 트레몰로 주법을 무진장 좋아한다면 앨범에서 마르고 닳도록 나오는 트레몰로의 바다에 풍덩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사실 가사가 있다거나 한 음악이 아니라서 이런 음반에 대한 글귀는 그저 추상적인 감상의 편린들 정도가 나열될 뿐이다. 물론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의 경우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소리의 형태로 구체화 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장르의 특성상 허공에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만드는 사람들은 단지 이 멜로디가 좋아서, 혹은 이 사운드가 좋아서 그렇게 만드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테커(Autecher)가 어느 특정 마디에서 스물 네 박으로 쪼개는데 무슨 정치적 의도 따위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여러분들도 지금 읽고 있는 이런 글 따위는 읽지 마시고 그저 자신의 감상과 경험에 충실하시길 바란다. 그게 비교적 현명하고 정확하다.
사실 서정미를 가진 기타 위주의 포스트 락은 이제 약간 정형화된 면이 없지 않다. 비슷한 방식과 구조로 곡들이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하고있지 않는 장르라는 표현이 약간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확실히 지금 쏟아지는 기타 중심의 서정계 포스트 락은 다소 몰개성적이다. '양식미' 라는 단어가 존재하듯 정해진 패턴이라는 것은 확실히 특정 층의 감성을 흔들어 대곤 한다. 기타연주 중심으로 이루어진 포스트 락의 경우엔 리버브를 잔뜩 걸은 후 쉴새없이 흔들어대는 트레몰로 주법이라던가 후반부에 뻗어나오는 장렬한 기타 노이즈의 홍수가 만들어내는 확실히 듣는 이들-특히 이쪽에 취향이 맞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곤 한다. 모과이(Mogwai)나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 등이 사람들을 끌어 모은 이런 방식의 전개는 근 10여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서서히 진부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요소-이를테면 특정한 사운드-를 이런 류의 전개에 끼워 넣었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교배 실험이라던가 아니면 완전히 색다르거나 독특한 특유의 센스들이 결국 현재 이런 음악들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 같다.
이들의 마이스페이스 페이지(http://www.myspace.com/theevpatoriareport)를 방문해 보면 약간은 아쉬운 글귀를 발견할 수 있다. "엡파토리아 리포트는 오랜 시간동안 휴지기 상태이며 긴 시간동안 어떤 공연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질문이 있으면 겟 어 라이프! 레코드(Get A Life! Records)와 상의 하시라" 라는 문구가 바로 그것인데,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이들의 라이브 퍼포먼스를 보면 실제로 비주얼 아티스트가 만들어내는 화면과 화려한 현악파트가 있는 상당히 볼만한 쇼를 만들어내곤 했다. 물론 그런 대규모 인원이 펼치는 내한공연이 국내시장의 사정상 쉬운 일은 아니다만 어쨌든 1퍼센트의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 것은 약간 아쉬울 따름이다.
오늘은 극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영화 시작 전에 나오는 바즈 루어만(Baz Luhrmann)의 신작 [오스트레일리아]의 예고편 전반부에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explosions in the sky)의 [The Only Moment We Were Alone]이 흘렀다. 이전에 [행콕]을 봤을 때 흘렀던 레이첼스(Rachel's)의 [Water From the Same Source]를 비롯해서 영화의 심상을 화면에 옮겼던 이런 일련의 포스트 록 트랙들이 역으로 영화에 삽입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장르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까지 수면에 떠오르고 있다는 것으로 이런 상황을 해석할 수도 있겠는데, 실질적으로 따지면 현재는 처음의 임팩트에 비해 약간 진부-혹은 지루-해져 가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상처 받은 영혼들, 그리고 리버브 걸린 트레몰로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애청자들이 넘쳐 나고 있는 한, 이런 류의 음악들은 단순히 헐리우드의 영화 사운드트랙이 아닌 그들 인생의 사운드트랙이 되어 줄 것이다. 더구나 약간은 좀 너무했다 싶은 작금의 실용정부의 정책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그러니깐 무슨 해외에다가 음반한번 주문하면 IMF 당시의 금액이 카드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는 이 음악들의 절절함이 당신의 뼛속까지 파묻히게 될 것이다. 자연과 기술이 어우러진 복지국가 스위스에서 날아온 이 불타오르는 포스트 락 앨범이 복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변모해가고 있는 작금의 대한민국에 어떠한 임팩트를 줄까. 과연 우리는 음악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도 종래에 타오르는 새하얀 빛을 보게 될까.
한상철 (불싸조 http://myspace.com/bulssaz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