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일상의 소중한 뒤편을 바라보게 하는 목소리
조길상 데뷔 EP <선물같은 시간>
집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매일 다니는 그 길 중간에는 신비한 분위기의 골목이 하나 있다. 한 번 들어가 보고 싶기도 하지만 집을 나설 때는 마음이 바빠서, 들어오는 길에는 생활에 지쳐 번번이 묻어버리고 마는 질문. “저 골목 안에는 어떤 풍경이 있을까?”
포크 싱어송라이터 조길상의 음악에는 늘 지나치기만 하는 어떤 풍경이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삶에 치여 제대로 한 번 바라보지도 못하는,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기엔 아깝기만 한, 소중한 내 삶의 단편들을 그의 목소리가 하나 둘씩 훑어 낸다. 마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고등학교 시절, 스쿨밴드의 보컬리스트로 음악에 첫 발을 들인 조길상은 이후에도 밴드와 노래동아리, 통기타 라이브 아르바이트 등으로 뮤지션의 꿈을 키워간다. 학교를 졸업하고 음악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폼 나는 투잡족’으로 살아가길 바라며 취직을 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결국, 이대로 생활하며 살다간 영원히 음악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직장을 그만둔 게 2006년 5월. 만들어놓은 곡들을 주섬주섬 모아 다듬고 신곡을 작업하여, ‘바다비’와 ‘打’ 등의 홍대 라이브 클럽, 거리공연, 이런 저런 행사들을 가리지 않고 활동을 시작한다.
때로는 혼자 기타와 하모니카를 둘러메고, 때로는 프로젝트 밴드를 꾸려서 관객과의 소통에 힘을 쏟았다. 이런 3년여의 시간은 스스로 작사, 작곡, 편곡뿐만 아니라 프로듀서까지 맡은 데뷔 EP를 분만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의 음악은 노랫말에 담긴 이야기를 목소리로 전하는 포크의 본질에 더 가깝다. 이 앨범의 수록곡들이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렇게 노랫말과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고민하여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쿠스틱 기타의 명징한 스트로크와 경쾌한 리듬으로 앨범의 문을 여는 <선물같은 시간>과 조길상이 아동문학가 황현진과 함께 글을 쓴 <문득>에는 떨리는 기타 줄처럼 섬세한 서정성이 아름답게 녹아있다. <문득>의 노랫말인 ‘강을 건너는 지하철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다가 문득, 생각해’는 그러한 서정성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아무도, 아무것도>와 <왜 웃지?>에는 반어와 역설이 노래 전체를 관통한다. <아무도, 아무것도>는 누구나 느껴봤음직한 사람과 사물 모두로부터의 소외감을, <왜 웃지?>는 우리 사회 마이너리티의 면모를 모두 갖춘 듯한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아무것도>는 노랫말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밝은 멜로디와 신나는 리듬으로, <왜 웃지?>는 슬퍼하기보다는 자신을 보고 웃거나 우는 사람들에 대해 조소를 날리는 당당함으로 ‘비탄에 빠져있지만은 않은 비판’의 메시지를 표현한다. 전영호의 키보드 음색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 노래들의 기승전결을 만들어냈다.
‘난 키가 작아도 괜찮아. 왜냐하면 얼굴이 잘 생겼으니까’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마지막 곡 <괜찮아!>는 조길상의 주변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지겨운 히트곡 정도로 여겨지는 곡이자, 공연 때마다 뮤지션과 관객의 경직된 분위기를 동시에 풀어주는 노래이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만든 곡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속에 느껴지는 치기와 위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밴드 와이낫 김대우의 어쿠스틱 기타와 드러머 손말리의 타악기는 이 노래가 줄 수 있는 생동감을 극대화시켰다.
노랫말과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선물같은 하모니. 앞으로 조길상의 공연과 정규앨범에서 이 아름다운 조화가 더욱 빛을 발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