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감성의 피아니스트
유니크한 어번재즈로 돌아온 이발차의 두 번째 앨범 <One Pale Afternoon>
유학생활을 막 끝내고 귀국해 풋내 나는 소녀감성과 뉴욕의 잔향을 20대의 열정으로 녹여내던 이발차의 1집 앨범 <Late Night Latte> 이후 4년만에 두번째 앨범으로 찾아온 그녀는 어느덧 30대 중반의 뮤지션이 되었다.
이발차는 두 번째 앨범 <One Pale Afternoon>에서 그녀의 음악적 색깔을 꽤나 당당하게 혹은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마치 텅 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묘사에 가까운 서사방식으로, 듣는 이에 대한 과도한 친절함이나 색다른 것에 대한 강박적 크로스오버 없이, 게다가 감정의 과잉도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하지만 이렇게 태어난 곡들이 구태의연하거나 상투적이지 않게 들리는 이유는 그녀가 소품처럼 삽입한 작지만 재기 발랄한 – 혹은 파격적인 시도들 덕분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이 앨범을 마치 클래식 곡처럼 진지하고 학구적인 근래 미국의 재즈나 이미지에 천착하는 최근 한국의 재즈와는 다른 유럽의 재즈 넘버에 가까운 개성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앨범 <One Pale Afternoon> 은 생활 속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대해 편안하고 따스하게 바라보는 ‘일상성’ 이 강조되는 요즘 음악의 대세와는 다르게 스틸-컷처럼 고정된 한 장면의 감정을 올올히 풀어낸다. 이런 특징은 그림을 그리듯 지극히 묘사적인 작법과 맞물려 이 앨범의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낸다. 이런 점은 타이틀인 동명의 곡<One Pale Afternoon> 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조금 이른 봄 도심의 눈부시지만 창백한 오후의 햇살과 그 아래 조금 더 창백해 보이는 도시의 단면을 그려낸 이 곡은 요즘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개성있는 어번재즈 넘버이다.
이젠 꽤나 알려진 사실이지만 2집 앨범에 참여한 한국 재즈 1세대인 색스폰 주자 “이정식”은 그녀의 아버지이다. 첫 앨범이나 그 이후의 행보를 보면 20대의 이발차는 아버지의 후광 속에서 그림자가 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세월이 가져다 준 지혜 덕분인지 그녀는 이제 아버지의 음악과 위치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며 홀로서기에 성공한 모습을 이 앨범에서 엿볼 수 있다.
앨범에 수록된 이 부녀의 콜라보레이션은 거장인 아버지 슬하의 풋내기 딸이 아닌 어느덧 작지만 소중한 재즈라는 울타리를 함께 지켜나가는 좋은 동반자의 어깨동무마냥 자연스럽다.
“이번 앨범을 준비하며 저의 음악적 색깔을 드디어 찾은 기분입니다.” 이 말을 꺼내면서도 이발차는 "해는 당연히 동쪽에서 뜨지요." 라는듯 무척이나 편안한 모습이었다. 첫 앨범에서 보였던 조금은 치기 어린 소녀적 감수성이나 유학파로써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열정과 패기,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루키의 두려움 온데간데 없고 주변의 미혹에 흔들리지 않고 주변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성숙한 뮤지션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