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혹시……, 추천사를 써 줄 수 있을까?"
그는 언제나처럼, 조금은 쑥스럽게 머뭇거리는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거닐숨과 나는 대략 6년 정도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다. 내가 알기로 그는 언제나 음악에 푹 빠져 있던 사람이었고, 대충 2년 전쯤부터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들어서 홍대 근방을 중심으로 작곡과 공연을 하고 지냈으며, 나 또한 그의 곡을 간간이 듣고 공연을 보고는 했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에 흔쾌히 제안을 수락하였지만, 뒤돌아서자마자 마음속에선 부담과 불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난폭하고 과격하면서도 시끄러운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으며, 당장 2014년에도 무자비한 음악적 폭력을 분출하면서도 주목할 만한 몇몇 음반들이 나타나 그들을 한껏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제대로 된 글은 써 본 적도 없는, 글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내가 그의 추천사를 써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무려 첫 정규 앨범에 대한 것을? 감히?
그렇게, 많은 것들을 잊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 오래간만에 거닐숨으로부터 온 연락은 마침내 [악수]의 마스터링 과정이 끝났으며 발매일 전에 미리 음원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타인들보다 한 달 남짓한 긴 시간 전에 미리 받아 듣는다는 묘한 기쁨에 우선 쾌재부터 부르고 보았지만, ‘악수’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매혹되기보다는 불안해졌다. 내가 푹 빠져 있던 소음과 음악의 경계와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매일매일 그의 음악을 의식적으로 들었지만, 이 모든 무질서와 어쩔 줄 모르는 당혹감은 가시지 않는 듯했다(아마 거닐숨 본인은 나의 이런 당혹감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혼란과 피곤에 절여져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들 속에서, 거닐숨은 천천히 나를 감싸오기 시작했다.
거닐숨은 이 음반 [악수]에 세상과 처음 마주한 사람의 실패를 담았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나는 사실상 실패하는 것이 업인 곳에 몸을 담고 있고,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작고 불투명한 성공을 위하여 매일같이 실패를 겪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실패의 연속은 나와 나의 주변인들을 한없이 날카롭게만 만들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리고 한 사람의 안에서 일어나는 관계들은 깨져 가는 유리창 같기만 했다. 그리고 거닐숨은 지나간 일들을 회고하고, 저질렀던 잘못들을 안타까워하고,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주정을 부리고, 떠나가는 것들을 미처 잡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지만, 그 위로는 내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제법 많은 일들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잘못되었고 또 잘못되어지고 있는 내게도.
[악수]에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가 정말 좋아하는 브라질 음악의 영향이 언뜻 보이곤 하는 리듬, 명확하지만 모호함이 깃들었고 차분하지만 격정이 숨어있는 가사와 목소리, 공동으로 작업한 음악가들과 거닐숨 본인의 개성이 어우러지는 방식, 곡들이 그려내는 색채와 서사까지. 하지만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난 한 달 간 내게 가장 위안을 가져다 준 것은—심지어 그는 괜찮다고 말하기보다는 자조 섞인 회상과 뒤늦은 깨달음을 토로하는데도 불구하고—바로 이 음반 [악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악수]를 듣는 다른 청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과거의 실패와 현재의 어려움은 누구나 겪는 것이 아니었던가.
※거의 모든 글쓴이들과 같이, 저 또한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깊은 고민에 빠져 한동안 첫 글자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본 Refused의 음반 [The Shape of Punk to Come] 속지에 쓰여 있는
Patrick T. Daly의 추천사를 보게 되었고, 희미하게나마 가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유럽 어딘가에 있을
그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Thires (www.facebook.com/thiresthires)
거닐숨의 곡별 노트
1. 손
가장 처음으로 '완성한' 곡이자 '거닐숨'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처음으로 무대에서 공연한 곡. 음악적인 아이디어가 충분하지 못했던 때에 완성한 만큼 스스로도 아주 심심하게 느껴지는 곡이지만, 다음 곡들을 계속해서 쓰게 한 동력이 되어 주었고 처음으로 겪는 실패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악수]의 정서와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곡이어서 개인적으로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앨범에는 본래의 클래식기타와 보컬의 연주에 일렉 기타의 소리를 첨가하였다.
2. 자장가
'손' 다음으로 완성한 곡이고, 온전히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쓴 곡. 해석의 여지라든지, 곡이 미치게 될 미미한 영향 등을 생각하며 곡을 쓰는 지금으로서는 앞으로 이런 식의 곡이 다시 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곡을 쓸 당시에는 스스로에게 건넨 위로였지만 공연을 하면서 이 노래를 기억해 주는 분들이 늘어났고, 내가 노래로써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신감보다는 내 노래를 좋아해 주는 분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이어졌다. 언제부턴가 차분하게 공연을 끝내고 싶을 때는 이 곡을 마지막에 연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3. 아토피
주기적으로 강박증을 겪고 있다. 별로 생각하지 않고 싶은 것들이나 평소의 신념, 사상과 반대되는 생각들이 기어나오는 형태로 나타난다. 바깥으로 티가 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지만 상당한 고역이다.
4. 이야기를 꺼낼 만한 여유
원래는 좋았으나 어떤 계기로 틀어진 관계를 다시 돌이켜보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본 곡. 작은 편성으로 할 수밖에 없는 공연의 갈증을 풀고자 하는 의도를 많이 담아 작업했다. 곡의 파트마다 리듬의 분할이 조금씩 다르게 이루어져 있어 편곡에서 각 파트의 특징을 살리는 데에 주력했는데, 그 과정에서 어느 부분에 어떤 악기로 어떤 연주를 할지 고민하는 것이 꽤 재미있었다. 결국 [악수]에서 가장 다채로운 느낌으로 완성된 것 같다.
5. 술
영감보다는 훈련의 효과를 훨씬 믿는 편이지만, 그래도 영감을 부인할 수 없는 경우가 꼭 있는데 '술'이 그러한 예이다. 정말 무심히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생각하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아, 이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 펀치감(!) 있는 후렴을 활용하기 위해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관객 분들께 따라 부르기를 권하는 곡이고, 2013년에 공연하면서 이 노래를 가장 많이 불렀다. 목소리를 취한 듯 과장하고 스트로크를 크게 하는 등(이 때문에 연주 중에 엄지손톱이 깨지는 경우도 꽤 있었다.) 퍼포먼스의 요소가 있는 탓인지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노래로 거닐숨을 기억하는 듯하다. 이 곡은 멋있게 들리는 대신에 지지리도 궁상맞고 처량하게 들리도록 하고 싶었다. 드럼 대신 지나가던 조씨의 카혼을 선택한 것이 그렇게 들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6. 부암동에서
무관심한 부암동의 풍경이 서로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하던 모습과 닮아 보여 쓴 곡. 지금은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을 때 종종 부암동을 찾고, 쓸데없이 걸어 다니면서 마음을 정리하곤 한다.
7. 오후에
하늘이 아주 맑은 어느 가을날 오후에 집에 돌아오면서, 다른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일을 하고 있을 시간에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스스로에게 굉장한 자괴감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걸로 자괴감을 느끼는 일은 없고, 졸업을 앞둔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곡을 구상할 당시부터 사운드의 변화를 이용하고자 했던 곡이고, 따라서 밴드 셋이 절실한 곡이었다. 그래서 곡 자체만으로는 아주 단순한 편이었는데도 공연에서 많이 연주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꺼낼 만한 여유' 다음으로 앨범 작업의 효용을 느끼게 한 곡이다.
8. 한 번 이렇게
상대방에게 서로 얘기를 해 보자고 제안하는 곡. 사실 이 곡처럼 서로 얘기를 해 보자는 제안을 할 수 있는 상태라면 이런 제안이 이미 필요 없는 상태일 확률이 높다. 청량하지만 차분하게 들리기를 원했기 때문에 악기를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고, 건반과 보컬이 서로 대화하듯이 주고받도록 연주했다. 말문을 열려는 조짐처럼 들리게끔 약간의 스캣(?)도 시도해 보았다.
9. 다리를 건너며
2013년 초가을 즈음에 완성했던 곡으로, [악수]의 수록곡들 중에서는 꽤 나중에 작업한 편이다. 피아노로 신나는 곡을 써 보고 싶어서 만들었다. "합정에서 당산으로"로 시작하는 가사는 친구들과 함께 통영 여행을 갔을 때 구상하기 시작했다. 서울이 지긋지긋해서 떠났는데 떠나니까 서울 생각이 났다는 건 상당히 약이 오르는 일이었다. 지금은 집에 갈 때마다 당산철교를 지나면서 이 노래를 생각하곤 한다.
10. 필요해
잘 맞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던 때에 친구가 데려가 준 카페에 가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은 경험을 각색해서 만든 곡. 그때 마카롱을 먹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디저트 중에 하필이면 "마카롱을 욱여넣"었다고 표현한 건 순전히 어감이 좋은 단어를 고른 결과였다. 나중에 먹어 보니 맛도 있고 가격도 비싸서 결과적으로 "마카롱을 욱여넣"었다는 표현은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고 있었다는 얘기로서 적합했다는 생각이 든다.
[차가운 힘]을 내고 나서 처음으로 대현 님과 같이 연주해 본 곡이기도 하다. 이펙터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대현 님의 어쿠스틱 기타는 평범한 보컬 이상으로 어조나 강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11. 남은 말
제목 그대로 상대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담았지만, 가사에 별 말은 없다. 사실 '손'과 '부암동에서'와 '남은 말'은 같은 말의 변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