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간 한 트렌드가 독식하다보니 우리 음악계의 그룹들은 편의를 위해 이합집산을 수시로 하며 어제의 스타가 오늘 잊혀져버리는 일회성 상품으로서의 인기인들이 너무 많이 득세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TV만을 이용하여 시청자의 눈을 유혹하기에만 혈안인 가수들뿐인 것 같지만 소위 록을 하는 그룹들은 댄스가 주류가 된 이후의 역사보다도 더 끊임없는 성실함을 보여왔다. 잦은 팀 멤버의 교체가 있긴 했지만, 시나위나 부활 혹은 블랙신드롬같은 중년 베테랑 팀들은 새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자신들의 위치를 재확인시키며 우리 음악계를 지켜온 거두들이다. 거기에 빼놓을 수 없는 그룹이 4집 이후 최강의 라인업이라 부를만한 블랙 홀이다.
이번 앨범은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세기말에 대한 불안한 징후들을 성경의 요한계시록에서 따온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다. 녹록치 않은 스피드와 탁월한 멜로디에 대한 감각은 변함없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떤 벽을 뛰어넘지 못한 느낌이다. 영어 버전을 동시에 실은 '어둠 속의 빛'은 어느 쪽의 가사로 들으나 어색하지 않고 둔중한 기타 사운드로 시작하는 '거지에서 황제까지'는 그들의 계보를 충실히 잇는 곡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개봉한 <사무라이 픽션>의 주인공이자 음악 감독인 토모야스 호테이의 곡 '스릴'을 신나는 신세대 버전으로 편곡하여 3집의 '신세대'를 연상시키는 '접속 2000'과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전체주의 국가의 독재자를 상징하는 말에서 따온 'Big Brother'는 대중적인 어필이 가능한 곡이다. 그러나 역시 그들의 파워를 느낄 수 있는 곡은 '천지 창조'나 '생명의 서'와 같이 속주를 바탕으로 하는 귀에 쏙쏙 박히는 주상균의 트레이드 마크인 보컬이 함께 녹아나는 멜로디가 있는 곡들이다. 여기에는 그들의 이름 그대로 한번 빠지면 절대 되돌아 나올 수 없는 암흑 같은 괴력이 있다.
세 명의 멤버로만 꾸려나갔던 4집 [Made In Korea]를 정점으로 그들의 마력이 한풀 꺾인 감이 없지 않지만 앨범 곳곳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익숙함과 친숙함은 일정 기간 단련된 팀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시나위나 백두산과 같이 거의 초창기 메탈 세대에 음악을 시작한 이들이 벌써 15년을 넘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블랙 홀은 부활의 매니저 백강기에 의해 발탁되어 첫 앨범을 낸 이후 지금까지도 정규 앨범을 꾸준히 내며, 쉽게 몰락하고 사라지는 우리 음악계에서 인내의 등불이 되어 오늘도 전국에서 록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절체절명의 지존임을 이번 앨범에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 거지에서 황제까지
2. 어둠속의 빛
3. 접속 2000
4. 피라미드
5. BIG BROTHER
6. 카오스의 아이들
7. 천지창조
8. 생명의 서(誓)
9. 끝과 시작
10. BELIEVE IN LOVE (어둠속의 빛-ENGLISH VERSION)
11. OUT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