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쿠스틱 기타의 따스한 울림과 함께 찾아 온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의 기적, 이지형의 두번째 소품집
이지형 3집의 출발선을 그어줄 두번째 소품집 “봄의 기적”
꾸준히 자신의 길 한가운데를 지키며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싱어송 라이터 이지형.
정규 앨범 사이에 발표하는 포크 성향의 소품집 두번째가 “봄의 기적”이란 타이틀로 찾아왔다. 앨범 제목만 보고 ‘봄’과 함께하는 밝고 경쾌한 노래를 기대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기대에 그는 쓸쓸한 가을과 시린 겨울을 지나 찬란한 봄을 맞이하는 지순한 여정으로 펼쳐 보인다. 스산한 가을 날 집 앞 카페에서의 시시콜콜한 하루나 견딜 수 없는 차가움과 쓸쓸함이 몰아 닥친 모진 겨울에 대한 이야기들이 첫 장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한 곡 한 곡을 흐르며 시침이 똑딱이고 계절의 색이 뒤바뀌며 씨앗은 여물고 추운 겨울의 눈밭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감정은 또 다른 감정으로 변해간다. 그렇게 어쿠스틱 기타와 함께 조용히 흐르던 생각들은, 봄을 맞이하며 비로소 초록의 잎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기적의 날을 잉태시켜준 시간들에 대해 그는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다.
2007년 가을 1집과 2집 사이, 1,000장 한정으로 발표했던 첫번째 소품집 “Barista Muzic vol.1 Coffee & Tea”는 쉬어가는 의미에서 만든 간소한 음악들을 팬들과 소소하게 나누고자 시작한 이벤트성의 앨범이었다. 하지만 첫번째 소품집이 세상에 나오자 그 음악성과 희소가치는 단번에 팬들과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회자되었고, 발매 일주일 만에 품절되는 기염을 토했다. 결국 지금은 경매 사이트를 통해서만, 그것도 고가에 구할 수 밖에 없는 희귀 명반이 되어 버렸고, 처음의 소소했던 기획은 의도치 않은 큰 결과물이 되고 말았다. 다만 첫번째 소품집의 타이틀 곡인 ‘빰빰빰’이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 현재도 꾸준히 들을 수 있고, 음원으로는 스테디 셀링 반열에 오른 덕에 음반을 구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두 번째 소품집을 준비하던 그는 모든 팬들에게 공평하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조용히 꺼냈고, “이지형의 소품집은 한정반”이라는 스스로 만든 공식을 과감하게 깨가며 모두를 설득해냈다. 한정반일 수 없는 이유는 이 뿐만이 아니다. 2집 “Spectrum”의 발표 이후 흐른 1년 반이란 시간은 본인의 음악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길었음을,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만들어낸 음악들이 담긴 이 소품집이 단순히 쉬어감이 아닌 조만간 나올 3집과 앞으로의 음악들에 대한 시작임을 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솔로로 전향하며 일렉기타를 놓고 어쿠스틱 기타를 손에 들었을 때부터, 연주하면 할수록 어쿠스틱 기타가 전해주는 울림들이 그에겐 큰 만족감을 안겨주게 되었다. 이러한 울림이 있는 음악들이 진정한 자신의 색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봄의 기적”은 소품집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그의 음악 여정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는 소소한 기념의 한정반 형태로는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말하는 “봄의 기적”은 음악적 변화를 앞두고 느끼게 되는 새로움과 동시에 적잖은 안도감이다.
이지형 본인이 그러했듯 온갖 시련을 견디며 변화를 겪어오다 비로소 창문을 열고 맞이할 수 있게 된 ‘봄’은 새로운 출발, 종국에 찾아낸 따스함이다. 다시 물이 녹아 흐르고 새싹이 돋아나는 자연의 기적을 맞이하듯 자연스레 흘러 조용히 자신의 음악에 도착한 기쁨이다. 앨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타이틀 곡인 ‘봄의 기적’이 흐르며 차분히 마무리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곡을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앨범의 전체 윤곽을 잡고 그 소리들을 가시화 시키는 것은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악기 편곡을 미리 계산하고, 가사에 대한 완벽한 가이드를 잡고, 효율적인 스케쥴 안에서 반복과 수정이 없는 녹음이 빠듯하게 이어졌다. 그 덕에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찾아 온 봄’이라는 컨셉을,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있게 하나의 호흡으로 잡아낼 수 있었다. 또한 평소의 발성과 다르게 목소리에서 힘을 많이 뺐으며, 음역대를 낮추어 바로 옆에 앉아 기타를 퉁기고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느낌을 살렸다. 이는 어쿠스틱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만들어 내는 담백한 ‘힘’이 제대로 표현된 부분이다. 이러한 작법은 이번 소품집이 그 동안의 ‘이지형 스타일’이라고 정의 내렸던 많은 부분들, 어쩌면 밝고 희망찬 언제까지나 착한 심성에서 시작된, 같은 이미지들과는 더 이상 동반되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음악인으로서의 성장통을 이겨내고 있는 그가 여기 새로운 출발선을 그어가고 있다.
사람과 함께한 기적의 순간들
10곡 중 4곡은 영어 가사를 채용하여, 직접적인 내용의 전달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의 전달에 더 주력하기도 하였다. 유난히도 라이브 무대에서 진가를 발휘하던 곡들 중, 1집 “Radio Dayz”에서 ‘Nobody Likes Me’를 2집 “Spectrum”에서는 ‘Beatles Cream Soup’을 어쿠스틱 버전으로 새롭게 편곡하여 수록하였고, 거기에 미국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공동 작사 작업을 한 ‘Let Me Light In’과 ‘Limeade in the Shade’, 이렇게 두 곡의 신곡이 수록되었다. 작곡할 때 흥얼거리던 느낌 그대로를 영어가사로 담아 작업을 시작했을 때의 처음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듣는 이로 하여금 이지형의 곡 작업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운드적인 측면에서는 역시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실력파 연주인들과의 다져진 팀워크를 손꼽을 수 있겠다. 2009년, 연극 무대를 표방한 소극장 장기공연 “THE HOME”을 기점으로 구축된 강민석(드럼), 임영조(피아노)와의 작업이 그것이다. 곡을 만들 때부터 그들로부터 편곡에 대한 섬세하고 아낌없는 도움을 받았고, 수 차례의 실제 합주를 통해 여러 실험을 해 나갈 수 있었다.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포근하게 감싸주는 드럼과 촉촉하게 펼쳐지는 피아노의 음색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이 세 사람의 완벽한 호흡을 느낄 수 있다. 구체적인 앨범 작업들을 모두 함께했기에 벌써부터 그들과의 공연이 기대가 된다고 하는 이지형. 올 가을 “THE HOME”의 두번째 시즌을 준비 중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세렝게티’의 베이시스트이자 보컬인 ‘유정균’이 전 곡에 베이스로 참여하여 무게를 실어 주었고, 트럼펫 ‘배선용’, 플룻 ‘김지석’, 첼로 ‘성지송’이 어쿠스틱 악기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화음과 공간감을 만들어 전반적인 소품집의 분위기를 다듬어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은 틈만 나면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나누었던 잔잔한 소통의 기억들과 윤기 가득 반짝이는 열 가지 이야기들
첫 트랙 ‘Ordinary Day’는 이별의 방황 후 다시 예전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따뜻한 날씨의 휴일이지만, 유별나게도 아무 약속이 없는 어느 날에 대한 노래이다. 다시 한번 사람과 사랑에 대한 기대를 해보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어느 평범한 날을 첼로와 오르간의 풍부한 음색으로 표현해냈다. 모든 뮤지션들에게 그러하듯 이지형에게도 특별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Beatles’. “그녀는 비틀즈를 들으면 크림스프가 생각난다고 했다.”라는 다소 엉뚱한 후렴구로 시작하는 이 ‘Beatles Cream Soup (Acoustic)’은 2집 “Spectrum”의 수록곡이다. 특히 해외 영화의 주인공 테마송으로 러브콜을 받았을 정도로 매끄럽게 잘 만들어진 ‘팝’임을 이미 검증 받은 바 있다. 본 소품집에는 공동 작사자인 ‘라이너스의 담요’의 ‘연진’과 함께 대화형식으로 편곡한 버전을 실어 원곡과 다른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Elliott Smith’의 빈자리를 채워 줄 신예 싱어송 라이터’란 극찬을 받았던 미국의 포크 뮤지션 ‘Denison Witmer’. ‘Let Me Light In’은 ‘Denison Witmer’의 ‘Everything But Sleep’과 영화 'Let Me In'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곡이다. ‘Everything But Sleep’의 엔딩 멜로디 네마디를 직접 허락을 받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Denison Witmer’와는 GMF2009에서의 협연을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현재도 꾸준히 서로의 신곡을 주고 받으며 모니터 해주는 사이라고. 간소한 악기 구성으로 방안에서 혼자 노래하며 기타치는 컨셉의 ‘전화’. 소품집 녹음을 시작하는 첫 날에 녹음된 곡이라고 한다. 올 가을에도 역시 예정되어 있는 이지형의 장기 공연 ‘THE HOME’에 가장 잘 어울릴 만한 곡으로 추천한다. 인트로의 기타 연주가 마치 첫 번째 소품집의 ‘Café Fermata’를 연상시키는 ‘내가 없는 하루’. 나른하고 평평한 멜로디에 숨어 있는 기타 바운스는 이지형의 장기라고도 할 만한 특유의 플레이즈이니 유심히 들어보자. 다이어리에 있는 일기를 그대로 발췌하여 2004년 즈음에 만들었다는 ‘불면의 기행’. 1집 “Radio Dayz”때부터 수록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담아내지 못했다. 그 이후 소품집과 2집, 그 어떤 컴필레이션에도 수록되지 못한 탓에 가장 눈에 밟히는 곡이기도 했다고. 이번 기회에 첼리스트 ‘성지송’의 연주와 함께 무사히 앨범에 안착하였다. 수록된 10곡 중 가장 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늘 묻고 싶던 말’. 편곡, 믹스, 녹음, 마스터링 등 모든 과정을 통틀어 이지형이 가장 만족하는 곡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훌륭한 편곡 덕분에 6분 30초에 가까운 시간을 실제로는 체감할 수 없는 버라이어티한 곡이다. 미국인 친구 ‘Forest Ian Etsler’의 영어 가사와 위트있는 ‘임영조’의 피아노가 돋보이는 ‘Limeade In The Shade’. 처절하고 유치한 싸움 끝에 헤어진 전 여자친구를 헤어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우연히 만나 또 다시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가사 안에서 영어 속담 문구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원래는 3집에 수록하려고 준비 중인 곡이었지만 이번 소품집의 컨셉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미리 수록했다고. 올 가을 안에 발표할 예정인 3집의 분위기를 좀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트랙이라고 할 수 있겠다. ‘Nobody Likes Me(Acoustic)’은 1집 “Radio Dayz”에 수록되어 있는 ‘Nobody Likes Me’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다시 녹음하였지만 사실 이 어쿠스틱 버전이 2004년 이 곡을 처음 만들었을 당시의 오리지널 버전이라고 한다. 마지막 트랙이자 이 소품집의 타이틀곡인 ‘봄의 기적’. 이야기 하듯 읊조리는 목소리와 잔잔한 쓰리핑거 주법으로 녹음된 이 곡이 가장 마지막 자리를 선점한 이유는 이미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다.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찾아 온 봄’이라는 컨셉을 담은 이 앨범을 첫 트랙부터 마지막까지 듣는 리스너들에겐 앨범의 심상이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란 기대도 담겨 있다. 피아노의 ‘임영조’와 공동 편곡 작업을 하였다.
현재까지 두 장의 정규앨범과 두 장의 소품집을 발표하게 된 이지형에겐 모든 앨범들이 같은 무게감으로 존재한다. 단지 컨셉이 다르기에 나누어졌을 뿐, 모든 앨범들에는 정확히 같은 노력과 정성이 같은 밀도로 진하게 담겨있을 수 밖에 없다. 또 이번 두 번째 소품집 “봄의 기적”에서는 그의 가장 일상적인 어느 하루들을 엿볼 수도 있다. 고독에 몸부림쳤을 늦은 밤과 차가운 새벽에 숨쉬었던 외로운 공기, 눈부시게 빛나던 아침의 따뜻한 햇살을 보았을 순간들을 말이다. 마지막까지 차분히 음악을 듣고 나면 어쩌면 이런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미색의 종이에 인쇄된 가녀린 활자체를 읽다 문득 산들거리는 봄바람에 길가에 난 작은 풀잎들과 시선을 마주치는 그런. “봄의 기적”의 결론에는 몽글거리는 시작의 기운이 담겨있다. 그것은 전혀 색다른 시작이 아닌 그 동안의 시간들을 이어오다 한껏 도약하는 희망찬 기운, ‘봄’이 만들어낸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