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앨범 <장롱뮤직>
며칠 새 잔뜩 너저분해진 책상 위를 정리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다 문득 방 한 켠에 고이 모셔둔 장롱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치 이 집이 만들어지기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이 짝 저 짝이 조금씩 갈라지고 떨어져나간 것이 한 눈에도 아주 오래된 장롱. 몇 년 새 열어본 적 없기에 아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과 함께, 잠깐 주저하다 이윽고 가만히 문을 당겨보는 것이다. 어두컴컴한 안쪽, 늙은 나무 특유의 향이 코를 찌르는 가운데 성큼 그 내부로 몸을 기울이는 것이다. 눈이 차츰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는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적의 기억들. 잔뜩 먼지가 쌓인 그것들을 조심스레 만져보다, 이내 눈자위가 살짝 붉어지는 것이다.
조용히 장롱이 흔들리는 것이다.
장롱뮤직?
2009년 여름, 홍대 앞 인디 레이블 카바레 사운드는 <인디음반 제작의 노하우를 공개합니다>라는 워크샵을 진행하였다. 음반 제작의 모든 과정을 망라하는 4개의 워크샵이 있었고 적지 않은 수강생들이 몰렸다. 워크샵이 모두 끝날 무렵,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던 수강생들에게는 그러나, 아마 마음 한 켠으로는 아쉬움이 남아있었으리라. 결국 워크샵이 쫑난 다음날, 한 수강생이 홈페이지에 올린 게시물을 계기로 함께 수강했던 몇몇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었고, 곧이어 9월 초순 신촌 모처에서 작은 모임을 가졌다. 장롱뮤직의 시작이었다.
옴니버스?
그리고 두 계절이 지났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가진 능력(?)들이 다양했다. 누구는 노래를 만들기로 했고, 누구는 디자인을 알아보기로 했으며, 또 누구는 레코딩을 돕기로 했다. 한 주에 한번씩, 적어도 두 주에는 한번씩 목요일마다 만나 함께 계획을 세우고, 진행사항을 체크하고, 아이디어들을 모았다. 대부분 처음 해보는 작업이었기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완성해냈다. 그것도 썩 괜찮은 결과물들이다. 지금 당신 손에 들린 CD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다.
음반의 포문을 여는 것은 ‘카루 문창배’의 피아노 즉흥 연주곡 <Intro>이다. 꿈꾸듯 흩어지는 피아노 선율이 인상적이다. ‘달에닿아’의 <정원>, 그리고 <별>이 이어진다. 특히 옴니버스 음반의 타이틀 곡이기도 한 <정원>은 2010년 상반기 가요계를 평정할 극강의 감성 발라드 트랙. 90년대 후반의 한국 인디록을 연상시키는 ‘Drive Away’의 모던록 <재시작 버튼을 누르다>를 지나면 ‘이은규’의<하늘 구름 사이>, 내내 제 몫을 다하는 신시사이저가 도드라지는 팝이다. ‘회기동 단편선’의 싸이키델릭한 포크 트랙 <모기목숨>까지 지나면 다시 ‘카루 문창배’의 즉흥 연주곡 <Outro>, 이로서 한 바퀴를 모두 돌아온다. 25분 남짓의 길지 않은 플레이 타임이지만 다채로운 스타일이 한데 담긴 품새가 소담하니 좋다. 단지 짧아서일까, 여운이 길게 남는다.
옴니버스(omnibus)란 말은 19세기 초반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합승마차’를 가리켰다 한다. 그렇다, 합승마차다. 함께 마차에 오른 사이다. 악기들을 모두 뒤에 싣고서, 마차는 출발한다. 출발이란 늘 다음을 기약한다. 그렇다면, 이번 음반은 그 출발의 신호탄이다. 부디 잘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누구 말마따나, “끝은 창대 하리라”.
<팀 소개>
-회기동 단편선
: 싱어송라이터 단편선을 필두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함께 연주하는 생계형포크노동자연합 ‘회기동 단편선’입니다. 주로 길거리에 나앉아 공연하고 있습니다. 1차적 욕구에 관한 음악을 종종 연주하고, 그럴 때 보통 관객들은 시큰둥해합니다. 생필품에 관심이 많습니다. 인생은 공산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의 바르게 살고 싶습니다.
-카루 문창배
: 인디뮤지션들과 유통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스터디형식으로 직접 음반 유통을 실천해 본다는 것이 굉장히 의미 있게 느껴졌으며 그런 것을 축복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Drive Away
: 정동건(리드 기타), 박신원(기타 보컬), 최승일(베이스 보컬), 박미현(드럼)로 이뤄진 4인조 밴드입니다. 얼터, 모던 성향의 음악을 추구하고, 현재 싱글앨범 준비 중입니다.
-달에닿아
: 건반과 기타를 중심으로 맑거나 탁하게 혹은 슬프거나 신나게 노래하는 보통의 두 사람입니다.
-이은규
: 어쿠스틱함에 팝과 블루스, 록을 버무려내는 퓨전 파스타 같은 아티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