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식민지 통치와 내전의 아픔을 승화한 서사시
앙골라의 음유시인 발데마르 바스토스
"나는 항상 마음이 아픈 사람이지만 항상 웃을 줄 압니다." - Waldeamr Bastos
프랑스 《Lib?ration》 선정 '2012 올해의 음반'
미국 《Amazon》 선정 '베스트 월드 뮤직 100'
음악 저널리스트 Tom Moon 저서 '당신이 죽기 전에 들어야 할 1000개의 레코딩'
미국 World Music Award 선정 '올해의 떠오르는 아티스트'
발데마르 바스토스는 앙골라, 아니 전체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목소리다. - 프랑스 음악전문웹진 《Mondomix》
「Classics of My Soul」은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에 대한 확고부동한 긍정이다.- 월드와이드 라디오 채널 《PRI's The World》
만약 당신이 로맨스를 꿈꾼다면, 그리고 그 소망이 몹시 간절하다면 발데마르 바스토스의 이 앨범이 그 꿈을 완벽하게 실현시켜 줄 것이다. - 《Jazz weekly》
* 레코딩크레딧 & 라인업
Waldemar Bastos lead & backing vocals, acoustic guitar
Derek Nakaomoto Piano, b-3, synthesizers, loops
Mitchell Long acoustic guitars
Feat. Keiko Matsui
The London Symphony Orchestra
오랜 기다림 끝에 부르는 영원한 사랑과 평화의 노래
Classics Of My Soul - 발데마르 바스토스(Waldemar Bastos)
영혼으로 부르는 노래란 무엇일까? 어둠 속에서 타오르며 스스로 빛을 밝히는 진실한 음악이란 무엇일까?
발데마르 바스토스라는 이름을 가진 검은 상처투성이의 남자가 있다. 험난한 시절 서남아프리카 앙골라 접경지 자이르에서 태어난 건장하고 콧날이 오뚝한 싱어 송 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 언제나 밝게 웃지만 음영이 드리운 그의 눈은 더없이 깊고 우수에 젖어있다. 마치 자이르 초원에서 울부짖는 카탕카 사자 같은 그의 강인한 목소리가 잦아들 때면 여리고 상처받은 자만이 간직한 고통과 회한의 신음소리가 낮게 울려 퍼진다. 발데마르 스스로 자신의 음악이 '모순의 과잉 상태'에서 기인했다고 소개한 것처럼 그의 노래는 한없이 밝지만 그늘지고, 뜨겁게 끓어오르지만 이성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을 견디며 끊임없이 삶의 희망을 역설하고 있다. 세계는 마침내 앙골라의 음유시인 발데마르 바스토스를 찾아냈고 이제 그 음악을 들어 '모든 영혼을 위한 안식의 노래'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앙골라 - 눈물과 분노로 물든 대륙
아프리카 대륙은 유구한 세월 속에서 눈물로 강을 채우고 분노로 어둠을 밝혀왔다. 오랜 박해와 고통, 유린과 박탈 속에서 아프리카는 갈라지고 봉합되었다가 매몰차게 내팽개쳐지고 억지로 추켜세워지곤 했다. 발데마르가 사랑하는 조국 앙골라에서 노예상을 가리키는 탕고마우스(Tangomaus)와 폼베이루스(Pombeiros)는 악마와 같은 의미였다. 16세기부터 사탕수수와 커피를 경작하기 위해 브라질과 카리브 섬, 리오 델 라 플라타로 400만 명에 달하는 순진한 앙골라 인이 노예로 팔려나갔다.
발데마르가 태어난 1954년 무렵의 앙골라는 무려 5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식민 통치를 했던 포르투갈로부터 조국의 정신을 되찾고 온건히 지키자는 민족 각성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를 즈음해서 킴분두족 중심의 MPLA(앙골라 인민해방운동), 바콩고족이 모여서 만든 FNLA(앙골라 해방인민전선), 오빔분두족이 결성한 UNITA(앙골라 완전독립민족동맹)가 전열을 갖추고 본격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지배국 포르투갈 역시 극심한 혼란기를 맞닥뜨리고 있었다. 잠시 선전했던 수상 살라자르 치하의 파시즘적인 국가체제가 한계에 부딪혀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합이 창설되고 자유와 인권 보장에 대한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부랴부랴 새로운 원주민법을 공포하여 자국민들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보장하는 동화인(Assimilado) 포용 정책을 시작하지만 진정한 자유를 원하는 아프리카 민중의 거부로 결국 법령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음악가의 탄생 - 한 비범한 예술가의 시련
어지럽고 가난에 찌들었던 그 시절, 발데마르의 부모는 모두 출장 간호사로 빠듯하게 일했지만 비범했던 아들의 재능만큼은 기어이 알아채고 만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발데마르의 아버지는 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고 만다. 어린 아들이 그곳에 앉아서 한번도 가르쳐준 적 없는 콘서티나(작은 아코디언 형태의 리드 악기)로 당시 라디오에서 인기를 누리던 유행가를 멋들어지게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데마르는 아버지가 끔찍이 아끼는 악기를 만져 꾸중을 듣기는커녕 도리어 아코디언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게 한 그 작은 사건을 계기로 음악에 깊숙이 빠져든다. 당시 또래의 아이들에겐 꿈같은 선물이었던 자전거를 포기하고 음악 수업을 선택했을 만큼 그에게 음악은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치러낸 수업의 대가로 음을 듣고 이해하는 탁월한 귀와 독보적인 직관력을 얻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밴드와 연주자를 전전하며 앙골라 전역을 여행한다. 마침 당시에는 포르투갈과, 앙골라 여러 부족들 간 전승되어온 민속음악 외에도 브라질, 쿠바, 유럽과 미국의 음악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고, 그 여행을 통해 팝, 록, 블루스, 탱고, 왈츠 등 세계의 음악과 갖가지 연주 스타일을 받아들이며 시나브로 예술적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가 거장으로 인정받은 이후에 자기 음악 세계를 가리켜 몸소 겪은 삶의 고백이자 앙골라 사람들의 민족혼에 대한 찬가, 범인류적인 사랑에 대한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앙골라를 노래하지만 그의 음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하모니와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하는 것이야말로 진실한 예술의 목적이자 기능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는 앙골라 곳곳에 음악가로서의 궤적을 명징하게 새기면서 자연스레 자유와 평화에 대해 노래하기 시작했고,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PIDE(포르투갈 비밀경찰)의 첩보 대상이 되어 자신과 무관한 정치적 전단지를 근거로 감옥에 수감된다. 그가 갇힌 몸으로 음악을 만들며 식민지 시기를 견디는 동안 포르투갈에선 살라자르의 압제와 끝나지 않는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에 환멸을 품고 있던 젊은 좌파 군부 세력들이 카네이션 혁명(Revolu??o dos Cravos)을 일으킨다. 새로운 세상을 염원했던 포르투갈 국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광장으로 나와 혁명군의 총부리에 카네이션 꽃을 달아주며 열렬한 지지를 표했고, 마침내 앙골라는 그날을 기점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독립의 기반을 다진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정치 주도권을 잡으려는 독립운동단체 간의 분쟁이 야기된다. 그 중 가장 부족수가 많고, 절대적인 군사 우위를 확보하고 있던 MPLA가 혁명 이듬해인 1975년 11월 독립 선언과 함께 앙골라 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다. 소련의 지원을 받던 MPLA가 본격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펴자 미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FNLA, UNITA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그때부터 앙골라는 길고 부질없는 골육상잔의 내전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발데마르는 비록 조국이 독립 했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 예술이 정치의 시녀로 전락하고 정치 노선을 지지하지 않으면 음악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데 충격을 받고 1982년 그의 나이 28세에 포르투갈에서 열린 국제 페스티벌 FITEI에 앙골라 예술대표단 자격으로 참가해 곧장 리스본으로 망명한다. 결국 그는 반정부 예술가로 완전히 낙인 찍히고 그때부터 독일 베를린, 브라질, 포르투갈의 아조레스와 리스본을 떠돌며 그의 표현처럼 '사막을 통과하는 기나긴 여정에 오른 낙타' 같은 삶을 시작한다.
유배자의 역설 - 앙골라의 불씨를 전하는 프로메테우스
하지만 인생이란 얼마나 역설적인가? 유배자의 삶이라는 개인적인 비극이 결국 그의 음악을 세계라는 밝고 따스한 태양 아래로 이끌어낸 것이다. 발데마르는 브라질에서 체류하며 그 또한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반정부 인사로서 혹독한 검열과 탄압을 견뎌낸 시인이자 음악가 쉬쿠 부아르키와 교우하며 에미뻬베(MBP, 브라질 대중음악) 아티스트들의 존경과 신뢰 속에서 「Estamos Juntos」라는 걸출한 첫 번째 앨범을 남긴다. 주제곡 《Velha Xica》(늙은 시카 : 아이야, 정치에 대해 말 하지 마라)를 통해 평화에 대한 소망과 그의 독립적이고 비당파주의적 신념을 노래하는데, 리스본에서 두 번째 앨범 「Angola Minha Namorada」을 발매한 1990년, 망명 후 8년 만에 처음으로 펼친 귀국 공연에서 이십만 명의 청중 앞에서 혼신을 다해 이 노래를 부르고 격정적인 갈채와 찬사를 받는다. 그는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환호하는 조국의 청중을 보며 평화야말로 사람들이 염원하는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진실을 가슴 깊이 되새긴다.
첫 번째 귀국 공연 2년 뒤 그는 세 번째 앨범 「Pitanga Madura」를 내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앙골라로 돌아간다. 비로소 MPLA 정부와 UNITA 간의 오랜 내전이 끝날 조짐이 보이고 최초로 다당제에 의해 의원과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정 투개표를 주장하며 선거결과에 불복한 UNITA가 무력 투쟁을 재개하자 결국 대통령 결선 투표가 무산되고 다시 내전이 발발한다. 그는 극심한 절망감을 토로할 새도 없이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포르투갈 아조레스로 돌아가 6년 동안 어떤 음반 작업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이때 록 밴드 'Talking Heads'의 전 리더이자 월드뮤직 전문레이블 'Luaka Bob' 창립자, 자전거 여행광이기도 한 데이비드 번이 리스본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발데마르의 음반을 사게 되는데 이것이 네 번째 앨범 「Pretaluz : Blacklight」을 뉴욕에서 녹음하는 계기가 되고 결국 세계에 그의 마술 같은 음악의 불씨를 전하는 기회가 된다. '십 년 동안 최고의 월드 뮤직 앨범 중 하나(New York Times)', '올해의 떠오르는 아티스트' 선정 등 숱한 격찬을 받으며 그 불씨는 미국과 유럽 전역에 전해져 뜨겁게 타오른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유네스코의 'Don't forget Africa' 페스티벌의 개막 공연에 초청을 받고, 류이치 사카모토가 발의하고 달라이 라마가 정신적 지주가 되어 브라이언 이노, 김덕수 사물놀이, 아르뚜 린지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참여한 평화 프로젝트 'Zero-Landmine'에 초대 받아 협연을 하는 등 본격적인 거장의 걸음을 걷는다.
앙골라에 울리는 발데마르의 노래
2002년에 반군지도자 사빔비가 사망하고 앙골라 정부군과 UNITA 시민군이 휴전 협정을 맺자 비로소 27년 간의 끔찍했던 내전이 멈춘다. 국민의 3분의 1에 달하는 400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한 아프리카 역사 상 가장 긴 내전이 끝나고 마침내 앙골라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이듬해 4월 앙골라 루안다 국제경기장에서 전쟁의 종식을 선포하는 성대한 공연이 열리고 비로소 앙골라 정부는 공식적으로 발데마르를 초대한다. 마침내 평화와 조건 없는 인류애에 대한 그의 한결 같은 염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앙골라가 평화를 찾은 이후에 발매한 다섯 번째 앨범「Renascence」의 재킷엔 그가 조국 앙골라의 낮은 산과 평원을 바라보며 평온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실려있다. 간절한 몸부림 끝에 찾은 기쁨과 평화를 숨가쁜 리듬과 서정적인 멜로디로 노래한 「Renascence」는 그가 남긴 여섯 개 앨범 가운데 가장 밝고 따스하다.
Classics of My Soul - 오랜 기다림 끝에 부르는 영혼의 노래
「Classics of My Soul」은 발데마르 바스토스가 조국을 떠나 유배지를 떠도는 한과 눈물,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찾은 평화와 기쁨의 순간을 총 열한 곡의 노래로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 앨범은 진실과 평화를 추구해온 한 영혼의 독백이자 잔혹한 역사 속에 오직 인내와 희망의 여린 불꽃만으로 삶을 이어온 앙골라 인의 숨결이다. 모든 노래가 한 순간도 의심할 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과 예술적 완결성으로 채워져 있으며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열강에 의한 분단 등 현대사의 여러 가지 정황이 중첩되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도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 음악이란 국경이 없고 다양한 문화를 이어주는 통로로써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열쇠가 된다는 그의 신념을 완벽하게 증명해낸 앨범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 대한 헌신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록 밴드 'U2'에 바치는 헌정 앨범 「In the name of Love-Africa celebrates to U2」에서 인연을 맺었던 세계적인 프로듀서이자 작곡가 데렉 나카모토가 참여한 이 앨범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숭고하고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더했다.
《M'biri M'biri》 는 장중한 현악 오케스트레이션을 뚫고 힘차게 퍼지는 보컬의 힘이 돋보이는 완벽한 첫 선곡이다. 《Humbi Humbi Yangue》, 《Velha Xica》는 오랫동안 사랑 받아온 그의 변함없는 대표 곡으로 첫 앨범에도 수록된 바 있다. 그를 세상에 널리 알린 「Pretaluz」에 발표한 바 있는 《Muxima》는 앙골라 인들에겐 우리 '아리랑' 같은 민족의 노래로써 이 노래가 연주될 때마다 관객들은 한마음이 되어 후렴을 따라 부른다. 킴분두 어로 '심장'을 뜻하는 'Muxima'는 콴자 강가에 있는 마을 이름이자 그곳에 세워진 성당 'Nossa Senhora de Muxima'(Our lady of Muxima)를 가리킨다. '정녕 나를 마녀로 여긴다면 성 안나(Santana) 앞에 데려가라'는 마녀 고발에서 비롯된 노랫말이 비장한 슬픔을 안겨준다. 그의 세 번째 앨범에도 수록한 《N'duva》엔 '빌보드 재즈 차트 1위'의 피아니스트 케이코 마츠이가 참여해 감성적인 색채를 더했다. 발데마르는 이 앨범에 자신의 개성적이고 비범한 예술성을 드러내기보다 앙골라 인과 인류를 축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를 간곡히 바랐다. 그런 바람이 존중 받아서 미국과 유럽에 앞서 앙골라에서 처음 앨범을 발매하게 되었다.
「Classics of My Soul」은 모든 영혼을 위하여 발데마르 바스토스가 부르는 삶의 찬가이다. 영혼으로 부르는 이 진실한 노래들은 이데올로기와 국가를 초월하고 전쟁과 유배의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타오르며 스스로 빛을 밝힌다. 앨범 'Thank you to' 리스트에서 정적에 의해 살해된 그의 장남 발테르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용서를 선택했고 분노와 응징 대신에 평화와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다. 발데마르 바스토스는 모든 인류와 앙골라 인에게 이 특별한 앨범을 헌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