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선율로 그려진 한 청년의 첫 번째 일기장
최준 - <First Love>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 발달장애나 지적 장애를 지닌 이들 중 2,000명에 1명 꼴로 드물게 암기·계산·음악·미술·기계수리 등의 분야에서 기이할 만큼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현상.
올해 24살의 청년 최준. 젓가락으로 밥그릇을 쳐서 나는 소리가 F음이라는 것을 구별해내고, 한번 들은 곡을 음정, 박자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피아노로 연주한다. 14살이 되던 지난 2003년부터 지금까지 이미 7번의 개인 발표회를 가졌다. 3시간짜리 판소리 흥보가를 외워 완창하고, 몇 년간 자신이 작곡한 곡들을 악보 한번 보지 않고 피아노로 연주한다. 이런 그에게 굳이 7살의 지능을 가진 ‘발달장애’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지난 10여 년간 판소리를 해오며 이를 피아노 반주와 접목시키려는 다소 독특하고 꾸준한 시도를 해온 그는 마침내 ‘피아노병창’ 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직접 만들어내며 지난 2008년 피아노 & 판소리 앨범 <音, 소리에 빠지다>를 발매하여 젊은 세대에게는 우리의 판소리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하고, 국악인들에게는 완성된 음악 장르로 인정받게 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보다 친근하게 피아노 선율로 자신의 일상과 감정을 전한다. 그에게 있어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은 말도 글도 아닌 음악이다. 종이 위에 문자 대신 음표들로 빼곡히 일상을 기록한다. 오선지가 그에게는 곧 일기장인 셈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고 추려진 14편의 음악 일기들이 모여 <First Love> 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태어났다.
발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시냇물, 떨어지는 벚꽃 잎들,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의 노랫소리 등등, 그냥 지나칠법한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음악의 주제가 된다.
어릴 적 살았던 동네를 돌아보고 아름다웠던 기억들을 ‘정릉길 가다’로 만들어내고, 광화문 광장 분수의 부서지는 물방울을 보고 ‘광화문 광장의 분수’를 만들어내고, 유난히도 반짝이는 평창의 밤하늘을 보고 나서 ‘평창의 밤하늘’을 그려낸다.
이렇듯 그의 연주를 들을 때는 꼭 제목을 함께 음미하며 듣기를 권한다. 음표들과 멜로디 하나하나가 시각화 되어 마치 그 곳에 있었던 듯 각각의 이야기와 그가 느꼈던 감정들이 눈앞에 그려지고 마음에 전해진다. 책꽂이 한 켠의 그림일기장을 몰래 열어보는 기분이다.
정말로 일기를 작성하듯 그 날 하루를 돌이켜보며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한 곡 한 곡을 써내려 갔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노라면 절로 미소를 머금게 된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넘쳐나는, 조금은 특별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최준의 순수한 음악 세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흘러가는 대로, 지금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이야기를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