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여왕의 길을 장식한다
1998년 어느 날, 이제 막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평단의 찬사를 받던 이모겐 힙은 인터뷰 도중 불 같이 화를 냈다. 몇 번을 아니라고 말을 해도 도무지 믿지 않는 기자를 향한 분노였다. “몇 번이나 더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나요?” 문제는 PJ 하비와의 비교였다. PJ 하비, 케이트 부시, 애니 레녹스 등 20세기 록음악계가 낳은 여성 로커들을 좋아하지만, 자신의 앨범은 그녀들의 음악과 그 취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힙의 주장은 어느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논쟁과 ‘제2의 PJ 하비’가 나타났다는 등 평단의 호들갑은 그녀의 음악을 고향인 영국 뿐 아니라 유럽 전역과 미국에도 울려 퍼지게 하는 데 도움을 줬다. 물론 그녀의 마음속에는 억울함이 여전했다.
이모겐 힙 그리고 가이 식스워스와 프루 프루
음악 뿐 아니라 미술이나 그래픽 작업 등 일종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생산자 입장에서 자신의 의도가 왜곡되어 받아들여지는 상황은 부처가 되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모겐 힙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여자 아티스트가 그냥 수긍하며 받아들이기에는 쉽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데뷔 앨범 'i Megaphone'은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던 힙이 직접 곡을 쓰고, 프로듀싱까지 맡아 만들어 낸 생애 첫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i Megaphone’이란 앨범 제목 역시 그녀의 이름 철자를 새로 배열해 만들어 낸 단어다. 물론 이런 논란에는 그녀의 자만심도 상당 부분 차지했다. 피아노로 시작해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덕에 어린 시절부터 ‘천재’ ‘영재’ 소리를 숱하게 들었을 뿐 아니라 프로그래밍 등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은 독학해 능수능란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천재 이모겐 힙에게는 제2의 누구누구라는 미디어의 표현이 달가울 리 없었다. PJ 하비는 물론 PJ 하비의 할머니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열심히 자신의 천재성을 변호하던 순간, 문제는 더 큰 곳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레이블인 알모 사운드가 그녀를 향한 지원을 모조리 끊어버린 것이다. 대신 두 번째 앨범을 만들 준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서둘러 곡을 가지고 오라는 레이블의 성화에 힙은 혼동에 빠지고 침묵에 들어간다. 이제 막 연체료 물지 않고 전기세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 방세마저 내기 힘든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모겐 힙의 이름은 잊히지 않았다.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 가이 식스워스가 그토록 사랑했던 목소리 덕분이다.
지금은 마돈나, 브리트니 스피어스, 비욕 등의 프로듀서로 유명하지만 가이 식스워스와 이모겐 힙이 처음 만나던 1996년의 가이 식스워스는 실(Seal)의 앨범 몇 장을 프로듀싱한 전도유망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는 야심차게 꾸려 나가던 프로젝트 팝 그룹인 ‘아카시아(Acacia)’에 힙을 초청해 그녀의 환상적인 목소리를 넣었다. 이모겐 힙의 실질적 커리어의 시작이다. 곤란에 빠진 그녀를 구해낸 것 역시 식스워스의 역할이었다. 침묵에 빠진 그녀를 바라만 보던 그는 1999년 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이모겐 힙의 목소리가 반드시 필요한 트랙이 있다는 게 이유였다. 영국의 독립영화인 'G:MT'에 수록된 ‘Meantime’이다. 싱글이 발표되자 토트넘 출신의 일렉트로닉 힙합 그룹인 ‘어번 스피시즈(Urban Species)’도 그녀를 찾는다. 어번 스피시즈와 함께 한 ‘Blanket’은 부활의 전초전과도 같았다.
두 장의 싱글을 발표하며 그녀는 다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목소리를 드러낸다. 다음해인 2000년에는 제프 벡의 앨범 'You Had It Coming'에 참여해 목소리를 실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푹 빠진 제프 벡은 투어에 힙을 데리고 다녔다. 그녀 역시 두 번째 앨범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루 프루(Frou Frou)’가 먼저였다.
프루 프루는 이모겐 힙이란 이름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킨 가이 식스워스가 주축된 또 하나의 프로젝트다. 뮤지션, 시인, 미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앨범을 만들고 싶던 가이 식스워스는 자신의 노래를 부를 사람으로 가장 먼저 힙을 찾았다. 2001년 가을이었다. 힙은 식스워스의 요청에 고민할 것도 없이 날아와 이미 만들어진 노래에 가사를 붙이고 목소리를 실었다. ‘Flicks’와 프루 프루의 탄생이다. 다음 주에는 영국 댄스 음악계에서 펫 숍 보이스의 ‘Being Boring’ 못지않은 컬트 싱글로 자리 잡은 ‘Breathe In’을 만든다. 정체에 빠져있던 힙에게도 프루 프루 활동은 도움이 됐다. 그녀의 건재함이 증명됐고, 끈질기게 따라붙던 ‘얼터너티브 여신의 재림’ 따위의 헤드라인은 사라졌다. 아무도 그녀 앞에서 PJ 하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가진 가장 큰 보물인 목소리의 아름다움은 영국을 넘어 유럽 그리고 미국까지 멀리 퍼졌다.
온라인 퀸의 컴백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이 무렵이다. 지금의 이모겐 힙은 ‘온라인 퀸’이라는 별명으로 그 유명세를 더욱 떨치고 있다. 그녀의 트위터에 등록된 추종자(Follower)의 수는 65만 명이 넘는다. 마이스페이스에는 36만 여명의 친구들이 그녀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다. 프루 프루 활동을 마친 그녀는 가이 식스워스와 건전한 이별을 마치고(친구로 남지만 각자의 음악 활동에는 참견하지 않는. 물론 함께 연주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지 뭉칠 수 있는), 두 번째 앨범 'Speak for Yourself' 작업을 시작했다. 진행 과정은 그녀의 홈페이지를 통해 생중계됐다. 비록 온라인 관계이지만 관계는 오프라인과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신뢰가 필요한 공간이다. 그리고 그녀는 팬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딱 1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인 2004년 12월 그녀는 두 곡을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1년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었다. 프루 프루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딱히 금전적 여유가 충분하지 못한 탓에 그녀는 다시 자신의 아파트를 팔았다. 악기는 친구들을 이용했다. 생일선물을 모조리 악기로 대신했다. 종종 공연을 해 번 돈이 생활비로 들어갔다. 하지만 2005년 거둔 성공에 비하면, 고생은 ‘이깟 고생’에 불과했다. 오렌지 카운티 청소년들의 방황을 다룬 미국의 인기 드라마 'The O.C.'에 그녀의 노래가 삽입됐다. 몇 시즌에 걸쳐 ‘Goodnight and Go’ ‘Hide and Seek’ ‘Speeding Cars’ 등이 차례로 햇살 가득한 캘리포니아 바닷가 풍경과 마약에 절은 아이들의 표정 위로 흘렀다. 세 번째 시즌의 피날레에는 레너드 코헨의 ‘Hallelujah’를 커버하기도 했다(제프 버클리의 ‘Hallelujah’는 'The O.C.' 시즌 1의 피날레 곡이었다).
과거 레이블 때문에 겪었던 고통을 덜고자 직접 회사도 차렸다. 새 앨범 'Speak for Yourself'는 2005년 6월 그녀가 직접 만든 레이블 ‘메가포닉’에서 발매됐다. 반응은 뜨거웠다. 영국에서는 톱 10에 올랐다. 더 놀라운 것은 인터넷에서의 반응이었다. 드라마에 삽입되자마자 곡이 불티나게 다운로드 되는 경험은 새로운 차원이었다. 'The O.C.'의 두 번째 시즌 피날레를 장식한 ‘Hide and Seek’은 무려 65만 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아이튠즈 차트 상위권에서 그녀의 이름은 떠날 줄을 몰랐다. 온라인 퀸의 탄생이다. 인터넷을 통해 꾸준히 자기 자신과 팬을 관리하던 이모겐 힙의 성과가 온라인에서 꽃을 피웠다. 2006년 겨울에는 제49회 그래미 시상식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 올해의 신인과 최우수 삽입곡 부문이었다. 유명세에 비례해 할 일도 늘었다. 수많은 공연을 해야 했으며, 곳곳에서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 심지어는 디즈니 다큐먼테리를 위한 노래도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2009년 세 번째 앨범을 기약한다.
가장 황홀한 순간의 포착, Ellipse
앨범 제작 기간 중에도 그녀의 트위터와 마이스페이스는 방문자가 여전했다. 유튜브를 통해 제작 과정을 그대로 공개했기 때문이다. 2주에 한 곡 꼴로 녹음을 진행했고, 16곡 정도를 싣고 싶다고 밝혔다. 첫 곡 ‘Not Now But Soon’은 마이스페이스와 인기 드라마 '히어로즈'에 등장했다. ‘Not Now But Soon’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이모겐 힙의 목소리가 건재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앨범 작업은 12월에 끝났다. 약간 미루어지기는 했다. 3월이 되자 앨범의 윤곽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고, 4월에는 직접 자신의 트위터에 앨범 제목을 묻는 글을 올렸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그녀의 글에 반응했고, 25일 앨범 타이틀은 타원이라는 의미의 ‘Ellipse’로 결정됐다. 앨범 수록곡 중 ‘Canvas’가 홈페이지에 공개됐다. 8월 발매일 역시 이때 함께 알렸다. 6월에 모든 작업이 끝났다. 모든 것이 유튜브와 트위터를 통해 진행됐다.
모습을 드러낸 이모겐 힙의 새 앨범 'Ellipse'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원하는 것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피아노를 치고, 혼자 랩톱을 매만진다. 사운드의 질감은 크게 달라졌다. 기존 사운드가 컴퓨터와 피아노 앞에서 뚝딱거려 만들어 냈던 것이라면, 이번에는 실제 악기를 폭넓게 사용했다. 첼로나 바이올린 등 현악기의 사용이 두드러졌을 뿐 아니라, 과거 샘플러나 신서사이저를 이용해 대신했던 드럼과 같은 악기를 녹음에 실제 사용하기도 했다. 모든 작업은 18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고택에서 진행됐다. 에섹스에 있는 그 곳은 그녀의 가족이 소유한 부동산이다. 그녀는 그곳에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주변 환경은 나아졌으나 “작업에 매진한 2년 동안 항상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내 자신을 의심했다”고 할 정도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었다. 에섹스에서의 작업은 어린 시절 그곳에서 뛰어놀며 가졌던 꿈을 현실로 펼쳐낼 수 있게 도와줬다. 앨범 전체를 휘감고 있는 오케스트라 편곡이 그렇다. 클래식 피아노를 치면서 꿈꿨던 오케스트라의 꿈이 작지만 앨범 곳곳에 펼쳐진다. 13곡으로 이루어진 한 장의 앨범 'Ellipse'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반복되는 것이 없다. 샘플, 템포, 코드 등이 그렇다. 완전히 독립된 13개의 노래는 13개의 악장과 다름없다.
'Ellipse'는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말끔히 다듬어진 팝 앨범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에 환상적인 이모겐 힘의 목소리가 얹혀 그 가치를 더욱 높인다. 복잡하게 얽힌 듯한 샘플과 연주는 목소리로 하여금 하나씩 정리되고, 악몽을 연상케 하는 음울한 분위기는 편곡 덕에 야릇한 분위기의 꿈으로 변한다. ‘Bad Body Double’은 가장 놀라운 트랙이다. 이 한 곡은 이모겐 힙의 현재와 'Ellipse'가 담고 있는 모든 사운드를 설명한다. 그녀가 항상 자신의 특장점 중 하나로 꼽는 가사 역시 만만찮다. 휴대폰 액정화면에 뜬 남자의 이름을 가지고 엄청난 속도로 사랑에 빠지는 황홀한 순간을 담아낸다. 재능과 천재성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Ellipse'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앨범의 공식 첫 싱글인 ‘First Train Home’에서 시작해 ‘Half Life’로 끝나는 48분 정도의 시간 동안 'Ellipse'는 자기 발전과 변태를 거듭하며 시간을 보낸다. 앨범 전체를 봤을 때 가장 놀라운 것은 변치 않는 그녀의 취향이다. 그 정도 성공이라면 더 말랑말랑한 멜로디를 담아낼 법도 한데, 그녀는 하고 싶었던 것을 시도하는 정공법을 선택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앨범과 노래에 이모겐 힙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겨 놓는다. 이번에는 어떤 노래가 어떤 드라마나 영화 속에 삽입될 수 있을까?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은 듣는 우리의 몫이다.
무엇보다 'Ellipse'가 가지는 의미는 이모겐 힙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경계로 작용한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녀 앞에서 과거 얼터너티브 여전사의 이름을 꺼낼 수 없다(앨러니스 모리셋을 닮았다는 것만 빼고). 그렇다고 해서 비슷한 분위기의 트립합을 언급하기도 위험하다. 과거 4AD 레이블, 콕토 트윈스(Cocteau Twins) 등. 이름은 꺼낼 수 있겠지만, 그녀를 비교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에 가깝다. 이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진 힘이다. 동시에 'Ellipse'는 온라인 퀸 이모겐 힙의 명성을 더욱 견고히 지켜줄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목소리에 매료돼 트위터와 마이스페이스 그리고 유튜브에 그녀의 이름을 입력한다. 앨범 발매와 함께 그 수가 더욱 늘어날 것은 뻔하다. 물론 이것은 음악의 힘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진 힘이라고 해도 좋다. 다만 목소리 하나만 놓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것이 많다. 그래서 지금 이 앨범을 손에 들고 있는 당신은 현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