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 랩의 시작과 끝, [Modern Rhymes EP]
2001년 7월 [Modern Rhymes EP]의 발매를 계기로 한국의 힙합음악은 저개발 상태를 벗어나서 유턴이 불가능한 길로 들어섰다.
어설프게 구성된 리듬과 라임, 그리고 어설픈 문장력으로 단지 "빠르게 말을 하던" 상당수의 래퍼들은 이 기념비적인 음반이 발표된 이후로 설 자리를 점차 잃어갔다.
Verbal Jint 는 이전까지 한글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미국 수준의 라임/플로우의 구성,
그와 동시에 흐트러지지 않는 문장력을 직접 작곡한 7개의 혁명적인 트랙들을 통해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Modern Rhymes EP]가 보여준 한글 랩의 청사진은 수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글로 랩을 하는 프로와 아마추어 래퍼들 대다수에게 그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당시 Verbal Jint 에 대한 반감을 표하던 뮤지션들마저 결과적으로는 그의 방법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2001년 이전과 이후의 한글 랩 작법에 있어서 일어난 변화는
인터넷으로 가사를 검색해보면 확인이 가능하다.)
*트랙소개
01. OVERCLASS
자신의 실력을 초상류층이라 칭하며 힙합계의 구조조정과 퇴출리스트를 언급하는 선언문과도 같은 트랙.
다음의 가사로 Verbal Jint 의 등장의 의의가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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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을 잘 기억해 난.
Hip-Hop 을 말하던 대다수가 거센 말투로
어색한 허우대만 찾으려하던 때
한 명의 fan 으로서 제발
어서 그 저개발 상태를 벗어나서
크기를 바랬어. 그러나 이 문화는
덧없는 언쟁과 함께 무너져갔어.
우리들 안에서 분명히 누군가는 선구자가 되어야만 했어.
02. INTERLUDE
Verbal Jint의 멜로디를 빚어내는 능력과 더불어 한글로 된 랩-싱잉 (랩과 같은 라이밍과 R&B적인 멜로디가 결합된) 에 대한 꾸준한 천착의 시작을 알리는 곡으로
이후 이러한 스타일은 '나랑 사귀자'(데프콘 featuring Verbal Jint, 2004),
'두근두근레이싱'(데프콘 featuring Dynamic Duo & Verbal Jint, 2004),
'U-Turn' (Dynamic Duo featuring Verbal Jint, 2007),
'시간' (Verbal Jint featuring VON, 2007) 등에서 완성형에 가까워진다.
03. 사랑해 누나 (featuring 휘성)
전례없이 조직적으로 짜여진 스토리텔링 랩으로 힙합문화의 겉모습에 어설프게 매료된 한 청년의 실연담을 통해 당시의 힙합 패션 코드와 인터넷 음악 동호회 문화 그리고 Verbal Jint 를 위시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뮤지션들에 대한 기성 힙합계의 반발감이 재치있게 담겨 있다.
흥미롭게도 PC통신 흑인음악창작동호회였던 SNP(Show & Prove, 쇼 앤 프루브)를 통해 인연을 맺은 휘성이 참여해 군더더기 없는 비트 위에서 Verbal Jint 의 멜로디를 불러준 트랙이다.
04. Radio
'소년을 위로해줘'(Kebee & Verbal Jint, 2003)와
'Another Silly Love Song' (Analozik with Verbal Jint, 2003) 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감수성랩'의 원형질을 이루는 이 곡은 Bjork, Smashing Pumpkins, Tony Toni Tone 등을 자신의 사춘기적 감성의 뿌리로 하는 Verbal Jint 의 진솔한 고백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당시 마초적 성향의 거친 가사 또는 암울한 언더그라운드적 자의식이 주를 이루던 한국 랩 가사에 비해 독보적인 영역을 담아내어 지금도 수많은 리스너들에게 명곡으로 꼽힌다.
05. DRAMA
Mobb Deep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비트와 그 위에 얹어진 학원폭력을 소재로 한 뒤틀린 스토리텔링 곡.
06. WHAT U WRITE 4 (featuring P-Type & The Illest I.L.L.S.)
2004년 [Heavy Bass]를 발표하며 최고의 반열에 오른 또다른 리리시스트 P-Type 과 The Illest I.L.L.S. 가 함께 한 트랙으로 다음의 가사로 2000년 조PD를 비롯한 선배뮤지션들에 대한 디스와 관련하여 겪었던 혹독했던 신고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곡이다.
Verbal Jint의 가사는 2008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려하며, 그 의미는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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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이라도 나의 가사들 안에
담겨진 이 문화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일상적인 단어들 속에 담아내려는
노력을 직접 느껴본 이들이 더 많으리라 믿어.
누군가를 씹는 rap 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어. 단 그것은 이 땅의 힙합을
썩게 만드는 인간들에게 내 나름의 심판을
내리는 것이지, 시기나 치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아둬. 지금은 비록 맨손으로
그늘진 곳에서 한없이 고단한
싸움을 하지만 내가 바라는 나의 가사는 항상
지혜롭고 강하고 아름다운 것,
I can rhyme in thousands of styles but
it's all about love.
07. HISTORY IN THE MAKING
[Modern Rhymes EP]의 작업 기간 동안의 심정을 진솔하게 풀어낸 곡으로 다음의 가사는 예언자적인 느낌으로까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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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know, 이 노래들이 언젠간
우리의 대를 이어 팽창한 힙합 세대에게
최고급 힙합의 적당한 예로
받들어지리란 상상에 또 미소를 짓게 돼.
우리가 아니면 대체 누가 이런 수준의
한국말 rhyme 을 이루어냈을까 궁금해.
나를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이르게 해 준
끈질기게도 나를 믿지 않았던 이들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고마움을 표하면서
개척의 깃발을 내리꽂네, 또 한번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