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수의 휴일(Bugler's Holiday) 트럼페터 배선용
트럼펫은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된 악기다. 초기에는 음악 연주가 아닌 부족들 간의 신호를 알리기 위해서였지만, 15세기경에 벌써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악기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가장 대중적인 관악기가 된 색소폰이 1800년대에야 만들어진 것에 비하면 트럼펫은 오랜 세월을 묵묵하게 지켜온 악기인 셈이다. 색소폰에 비하면 대중성이 낮고 솔로 악기로 부각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트럼펫은 음악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악기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에게는 ‘What A Wonderful World’로 널리 알려진 루이 암스트롱, 재즈라는 장르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리게 되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대표적인 트럼페이터이며, ‘My Funny Valentine’의 쳇 베이커와 파퓰러한 연주를 선보이는 크리스 보티처럼 대중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는 트럼페터도 있다. 특히 재즈에서는 트럼페터에만 방점을 찍어도 굵직한 재즈사는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의미가 있는 악기가 트럼펫이다.
한국 재즈계의 차세대 트럼페터, 배선용
첫 앨범 ‘Bugler's Holiday’을 발표한 배선용은 몇 해 전부터 한국 재즈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트럼페터다. 재즈훵크밴드 JSFA,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 재즈파크 빅밴드 등에서 활약해왔고 2009년에는 재즈 월간지 재즈피플이 선정하는 라이징스타(Rising Star)로 선정되었다. 2007년부터 시작된 라이징스타는 한국 재즈계를 짊어질 젊은 연주자를 소개하는 기획으로 피아노, 베이스, 드럼의 리듬 섹션과 보컬, 기타, 색소폰 연주자가 주로 선정된다. 그 외 악기들을 선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연주자가 워낙 드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앞서 언급한 악기 연주자를 선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2009년 라이징스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몇 년 전부터 재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트럼페터가 있다”는 추천을 받았다. 재즈 연주자 및 관계자들에게 물어보니 재즈계에서 활동한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라이징스타로 선정하기에 충분한 연주자라고 했다. 그가 바로 배선용이었다.
배선용은 초등학교 때부터 드럼과 트롬본을 시작했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트럼펫을 연주했다.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의 배경이 된 학교가 배선용이 나온 중학교이기도 하다. 트럼펫을 시작한 그는 연주에 두각을 드러내며 대한민국 관악경연대회에서 초중고 종합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전도유망한 클래식 트럼페터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1999년 우연한 기회에 재즈 빅밴드에서 연주하며 재즈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군 제대 후에는 서울예술대학에 입학하면서 클래식이 아닌 가요 레코딩과 라이브 연주자로 활약했고 정통 브라스 스카 밴드인 킹스턴 루디스카에서도 활동했다. 이후 차츰차츰 재즈로 무대를 옮겨 김지석(색소폰), 이지영(키보드), 최은창(베이스), 김승호(드럼), 정재원(기타) 등과 재즈 훵크 밴드 JSFA, 베이시스트 서영도가 이끄는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로 활동하며 재즈팬들의 눈길을 끌게 된다. 2010년에는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에 JSFA와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의 멤버로 각각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제는 ‘재즈 트럼페터’로 자리매김한 배선용은 재즈의 매력으로 ‘자유로움’을 꼽는다. “클래식을 연주할 때는 항상 악보를 보면서 집중해야 했지만 재즈는 악보에 얽매이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배선용의 첫 번째 앨범, 나팔수의 휴일
요즘은 디지털음원이나 싱글 발매처럼, 정규 앨범이 아니어도 음악을 세상에 내놓기가 무척 쉬워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배선용의 이름으로 발매된 앨범이나 음원은 찾아볼 수 없다. JSFA와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의 멤버로 각각 ‘Jazz Snobs Funk Addicts’(2009)와 ‘Random Line’(2010)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의 이름 앞에는 피처링(feat.)이 붙어있다. 그가 자신의 첫 리더작 ‘Bugler's Holiday’를 발표한다. 이 앨범을 위해 1집에서부터 함께 해온 밴드 세렝게티의 멤버들(기타 정수완, 보컬&베이스 유정균, 드럼 장동진)과 피아니스트 윤석철과 진한서, 기타리스트 박주원이 힘을 보탰다. 재즈 피아니스트 윤석철은 ‘Humback Whale’를 비롯해 인상적인 피아노 연주를 담아냈고 클래식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진한서는 ‘My Room’ ‘Voyage’ ‘Journey’ 등에서 서정적인 연주를 선보인다. 기타리스트 박주원은 ‘The Lady Of Seba’와 ‘Dove Train’에서 강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경쾌하고 감성적으로 풀어낸 트럼펫 앨범
앨범의 시작은 팝적인 멜로디가 인상적인 ‘Nonverval’이다. 말하고 싶었지만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어지는 ‘My Room’는 베이스 연주를 맡은 유정균의 곡으로 서정적인 흐름에도 반짝이는 멜로디가 돋보이는 곡이다. 이제 앨범은 맑고 경쾌한 곡 ‘Dove Train’과 장동진의 드럼 연주가 인상적인 ‘Holiday’로 이어진다. ‘Dove Train’은 어린 시절 레슨을 받으러 가는 길에 자주 탔던 ‘비둘기호’를 타이틀로 붙인 곡인데, 박주원의 기타가 더해져 한층 산뜻함을 더한다. 박주원의 기타 연주는 이어지는 ‘The Lady Of Seba’에서도 만날 수 있다. 곡을 쓸 때부터 박주원과의 연주를 염두에 두었던 집시 스타일의 곡으로, ‘세바(Seba)’라는 곡목은 이국적인 풍경과 고즈넉한 재즈가 어우러지는 제주도의 명물 카페 세바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The Lady Of Seba’와 함께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곡은 ‘Humpback Whale’이다. 혹등고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 만들었다는 이 곡은 여덟 마디의 단순하지만 경쾌한 멜로디로 이루어졌다. 윤석철의 반짝이는 피아노 연주와 함께 배선용의 재기발랄한 솔로를 만날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이 끝난 뒤에는 다소 차분한 트럼펫 솔로가 흐른다. 곡을 쓰려는 의도 없이 연습하면서 흘러나온 선율을 담은 곡으로 ‘Prayer’라는 제목을 붙였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트럼펫 선율이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이어지는 ‘Voyage’와 ‘Journey’로 서정적인 감성이 빛나는 곡들이다. 앨범을 마무리하는 ‘Goodbye Victoria’는 JK 김동욱이 캐나다 빅토리아 여행에서 작곡한 곡으로, 잔잔한 선율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노랫말이 있어도 좋을 듯한데 실제 이 곡과 유정균의 'My Room’은 JK 김동욱과 유정균1집의 신보에 각각 실릴 예정이라고 한다.
첫 앨범을 발표하는 연주자들은 욕심이 많다. 자신의 색깔을 모두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페터 배선용은 이번 앨범을 통해 가요와 팝, 재즈를 넘나드는 편안함을 보여준다. 어느 휴일 오후, 약간의 나른함을 즐기며 듣게 될 것 같은 음악들이다. 그렇지만 그의 연주는 편안함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첫 앨범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원숙하면서도 노련하게 풀어낸 연주는 그의 실력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든다.
안민용 | 월간 재즈피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