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차분하고 깊어진 전기뱀장어의 새 앨범, <너의 의미>
처음 이들의 이름을 들었을 땐 ‘참 재밌는 밴드명’이라고 생각했다. 록 밴드에 ‘전기뱀장어’라니. 뭔가 찌릿한 전기처럼 ‘쎈’ 음악을 할 것만 같았다. 예상은 빗나갔다. 1집 <최고의 연애>를 들어보니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음악들로 가득했다.
“니가 잘라주는 돈까스가 좋아/ 너의 손가락이 좋아”라고 노래하는 ‘송곳니’는 상큼했고, “니가 앞머리를 자르고 내 앞에 나타났던 어느 날/ 나는 끝까지 알아채지 못했고/ 니 표정은 조금씩 굳어만 갔지”라고 노래하는 ‘그녀의 모든 것’은 공감지수 200%의 미소를 자아냈다. 앨범의 거의 모든 곡이 나의 애청곡이 되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밴드 이름이 만들어진 연유는 이렇다. 밴드 이름조차 정하기 전인 어느날 황인경(보컬?기타)과 김예슬(기타)이 낙원상가에 가던 중 어느 하나가 장어구이집 간판을 보고 한마디 툭 던졌다. “밴드명으로 전기뱀장어 어때?” “그거 괜찮은데.” 음악적 지향점과는 전혀 관계없는 밴드명 전기뱀장어는 그렇게 태어났다. 데뷔 EP <충전>(2011), 두번째 EP <최신유행>(2012)에 이어 마침내 정규 1집 <최고의 연애>(2012)를 발표한 전기뱀장어는 승승장구했다. EBS 스페이스 공감 ‘헬로루키’, KT&G ‘밴드 인큐베이팅’, 한국콘텐츠진흥원 선정 ‘케이루키즈’에 잇따라 뽑혔다. 케이루키즈 연말결선에선 6팀 중 1위를 차지했다. 갈수록 팬들이 늘어난 건 말할 것도 없다.
1집 발표 이후 꽤 오랫동안 침묵하던(물론 공연은 종종 했지만) 전기뱀장어가 새 EP <너의 의미>를 발표했다. 앨범에는 모두 6곡이 담겼는데, 전작들에 비해 좀 더 차분해지고 깊어진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첫번째 곡 ‘술래잡기’에 가장 끌린다. 1집에서 특히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인 ‘별똥별’과 느낌이 비슷한 슬로우 템포 곡으로, 좀 더 아련한 정서를 담아냈다. 어릴 때 좋아하던 아이와 술래잡기를 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 노랫말은 전기뱀장어의 가사쓰기가 어디까지 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가늠좌다.
“좋아했던 너에게/ 두 손 모두 잡혀버린 난/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어/ 너의 두 눈만/ 한없이 바라보았어/ 너의 두 눈 속에 내가 비친/ 10초 동안의 골목길.”
브라스 사운드가 사랑스러운 ‘꿀벌’(항상 입고 있던 줄무늬 카라티 때문에 꿀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넌 마치 별똥별처럼/ 나의 우주를 가로질러와”라고 노래한 ‘별똥별’과 일맥상통하는 듯한 노랫말(“너는 내가 처음 보는 외계인/ 혼자였던 나의 우주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너”)이 인상적인 ‘야간비행’은 무척 경쾌하다. ‘싫으면 말고’는 앨범에서 가장 스트레이트한 록 넘버다. 1집의 ‘화살표’나 ‘거친 참치들’의 맥을 잇는다. ‘흡혈귀’에선 황인경 대신 김예슬이 리드보컬을 맡았다. 나른한 기타 아르페지오 선율 위로 느긋하게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듯 흐르는 그의 목소리는 전기뱀장어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가을방학의 계피가 코러스로 참여한 마지막 곡 ‘사랑의 자전거’에서는 보틀넥 주법이 색다른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미끌어지는 기타 사운드는 마치 자전거를 타고 미끌어지듯 달리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함께 손을 잡고 있는 한 잊을 수는 없겠지/ 자전거 은빛 바퀴 위에 부서지던 웃음과/ 한쪽 페달을 니가 밟고 있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쓰러지지 않을 거야.” 당장 그녀(또는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러 나가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 서정민(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너의 의미 ? 곡 소개>
술래잡기 - 친구가 들려준 유년시절 경험담을 담은 노래입니다. 한 번은 동네 친구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했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첫사랑(?)인 남자애도 있었다고 해요. 술래였던 그 애에게 손을 붙잡혔는데 그 순간 어색할 정도로 오랫동안 눈을 마주친 채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일상적이지만 초현실적인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꿀벌 - 재수학원에서 만났던 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학 진학 이후 다른 지역에 살면서 얼굴은 못보고 일년에 한두 번 소식만 주고받다가 그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소식을 듣기 한 달 정도 전(새해 첫 날) 친구가 보냈던 '니 밴드 노래 잘 듣고 있어, 어떻게 지내니. 니 공연 보러 서울 한 번 가야되는데'라는 문자메시지가 머릿속에 맴돌더군요.
야간비행 - 늦은 밤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 떠오른 생각을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행위가 연애 초기에 서로에게 빠져드는 감정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야간비행을 연주할 때면 그 때 느꼈던 두근거림이 다시 느껴지는 듯 합니다.
싫으면 말고 -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주말 저녁의 거리가 늘 반갑지만은 않은데요, 홍대의 밤거리를 걷던 어느 날인가 그 풍경이 따뜻하고 인간적이라고 느껴지는 때가 있었어요. 반짝이는 불빛들 사이로 걷고 있는 연인의 모습을 생각하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흡혈귀 - 이 곡에서는 본래 기타를 맡고 있는 김예슬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밤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풍경화에 담듯이 담담하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곡을 들으면서 어둠이 다정하게 드리운 거리와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떠올리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랑의 자전거 - 지인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를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만들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신랑 신부의 사연의 받아 노래를 만들고싶어 둘 사이의 기억에 남는 경험들을 적어달라고 숙제를 내줬는데, 사연들 중 부산에서 시작해서 낙동강을 따라 올라갔다던 두 사람의 자전거 여행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축가 덕분인지 두 사람은 잘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