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지정 '디스코 여왕' 글로리아 게이너의 컴백 앨범 [ I Wish You Love ]
팝 음악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수많은 신종 장르의 출현, 그리고 장르간의 이종 교배를 통한 또 다른 형태의 장르의 생성과 소멸을 흔히 목도하게 된다. 이런 장르들 중에는 소수에 의해 사랑받는 마니아용으로 소임을 다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도도한 물줄기를 이루며 팝의 주류를 휩쓸었던 경우도 있다. 하지만 팝 장르의 주류 진입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중들의 호응에 좌우되는 것이고 대중들의 기호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어서 그 어떤 장르도 영원히 주류에 머물기는 힘들다. 지난 1970년대 후반 엄청난 기세로 팝 시장을 뒤흔든 디스코 음악 역시 짧고 굵게 그 생명을 마감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주류에서 밀려난 다른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디스코 역시 그 위세는 잃었다 하더라도 생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어서 자미로콰이가 그랬고 카일리 미노그가 그러했듯이 새로운 감각으로 갈아입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댄스에 기반한 팝 음악이 메인스트림을 점한 최초의 사례인 디스코는 1970년대 초반의 그루브를 지향한 음악과 흑인 음악 펑크(funk)에서 태동된 것으로 그 어떤 요소보다도 비트에 중점을 둔 음악이었다. 이 디스코의 어원은 댄스 음악을 틀던 뉴욕의 게이 클럽인 '디스코텍(discotheque)'에서 유래했는데 이들 클럽의 DJ들이 주로 틀어대던 강한 그루브를 지닌 소울과 펑크 음악들이 점차 방송을 타고 음반 시장에서 판매가 증가하면서 곧 레코드사들은 완전한 디스코 음악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팝 시장에서도 이들 음악은 히트를 하기 시작했고 DJ들은 이들 음악을 점점 더 빠른 비트로 리믹스해내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힘찬 박동수를 자랑하는 이 디스코 비트는 시장을 완벽하게 점령하고 말았다. 음악적으로는 당시 주류를 점하던 록 음악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로드 스튜어트와 롤링 스톤즈같은 베테랑 록 뮤지션마저 디스코 음악을 만들 정도로 이 장르는 확실하게 주류로 올라섰다. 데보라 해리를 앞세운 뉴 웨이브 밴드 블론디 역시 디스코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였다.
디스코 시대의 최고 스타는 누가 뭐래도 비지스. 팝 그룹으로 많은 발라드 히트곡을 냈던 이들은 1975년 'Jive Talkin''으로 댄스 밴드로 변신하며 분위기를 띄운지 2년 뒤인 1977년 기념비적인 영화 "Saturday Night Fever"의 사운드트랙으로 디스코 전성기를 견인했다. 그 외에 비지스와 쌍벽을 이루는 디스코의 주역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파워풀한 가창력을 지녀 '디스코의 여왕'으로 여겨지는 도나 서머를 꼽는데 이 앨범의 주인공 글로리아 게이너 역시 디스코 시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공식적인 유일한 '디스코의 여왕'은 도나 서머가 아니라 글로리아 게이너다. 그녀는 1975년 뉴욕 시장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디스코의 여왕' 칭호를 부여받은 바 있다).
1949년 9월 7일 뉴욕에서 태어난 글로리아 게이너(본명 Gloria Fowles)는 부모의 별거로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음악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부터 가수의 길을 꿈꾸었고 팝 스타들의 음악을 들으며 꾸준히 노래를 연습했다. 영화를 보러 가던 길에 들른 클럽에서 우연히 사회자에 의해 불려나가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낸시 윌슨의 'Save Your Love For Me'를 멋지게 소화해내 그 클럽에서 활동하던 소울 새티스파이드(Soul Satisfied)라는 그룹의 보컬로 픽업되었다. 그 뒤 소울 메신저스(Soul Messengers)에서 활동하던 중 레코딩 계약을 맺고 첫 작품 'Honey Bee'를 클럽가에서 히트시킨 뒤 1975년 잭슨 파이브의 'Never Can Say Goodbye'를 디스코풍으로 리메이크해 빌보드 차트에 신설된 'Disco Action Charts'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그녀는 이 곡을 사상 처음으로 12인치 싱글로 클럽용으로만 발매하기도 했다).
그 이후 그녀의 활약상은 디스코의 흥망과 궤를 같이했다. 데뷔 이후 1981년까지 매년 음반을 발매해 차트 히트시켰는데 역시 그 정점을 이룬 것은 1979년 빅 히트를 기록한 'I Will Survive'의 대성공.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진주의 노래 '난 괜찮아'가 더 친숙하겠지만 글로리아 게이너의 오리지널 'I Will Survive'는 디스코 시대를 대표하는, 아니 댄스 음악을 대표하는 명곡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0년 "VH1"이 뽑은 '역대 최고의 댄스 음악 100곡(100 Greatest Dance Songs)'에서 'I Will Survive'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1위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I Will Survive'는 디스코 시대의 송가인 동시에 그 인상적인 가사와 멜로디로 인해 여성들의 주제가처럼 대접받은 명곡으로 지금까지도 수없이 불려지고 또 리메이크되었지만(이 노래는 아랍어를 포함해 무려 20여개 이상의 언어로 불려진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곡의 메가톤급 히트는 오히려 글로리아의 발목을 죄는 족쇄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곡은 1980년 열린 그래미 시상식에서 신설된 '최우수 디스코 레코딩' 부문을 수상했지만 이 무렵을 기점으로 디스코의 열기는 급격히 식어갔고 결국 이 부문도 이듬해부터는 폐지되어 'I Will Survive'는 유일한 수상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디스코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기도 한데 글로리아 게이너는 이 곡을 능가하는 히트곡을 내지 못한 채 1983년의 하이 에너지(Hi NRG)풍의 유로 댄스 싱글 'I Am What I Am'의 히트 외에는 이렇다 할 인상적인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해 마이너 레이블을 통해 음반을 내기도 했지만 디스코의 시대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와 더불어 글로리아 게이너 역시 기억 속으로 묻히는 듯 했다.
하지만 세기말을 지나며 팝 음악계에도 불어닥친 복고의 바람은 마침내 디스코 리듬을 새롭게 주목받도록 만들어주었다. 몇 몇 뮤지션들이 그들의 음악에 디스코 비트를 가미해 히트시키기 시작했다. 디스코 시대 최고의 스타 도나 서머도 VH1에서의 라이브를 갖고,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신곡을 합쳐 음반을 발매했다. 마이너에서 활동하던 글로리아 게이너 역시 새롭게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I Will Survive"란 자서전을 냈고 2000년대 들어 몬테카를로에서 열린 월드 뮤직 어워즈에서는 'Legend' 부문 상을 받았고 브로드웨이 장기 흥행 뮤지컬 "Smokey Joe’s Cafe"에 출연하기도 했다. TV 시리즈인 "That ‘70’s Show", 그리고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앨리의 사랑만들기(Ally McBeal)에도 모습을 나타냈고 영화 "Men In Black II"의 사운드트랙에서 'I Will Survive'가 리메이크되기도 했고 그 외에도 많은 영화에 이 곡이 등장했다. 공연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가수로서도 활발하게 다시 활동을 시작했는데 2001년 'Just Keep Thinkin' About You'가 빌보드의 댄스/클럽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그녀가 살아있음을 알렸고 디스코 시대의 유명한 프로듀서 겸 작곡가 조지오 모로더 트리뷰트에 실은 'Last Night'이 유럽 지역에서 차트 1위에 오르며 결국 이렇게 메이저를 통해 세계 시장에 음반을 내기에 이르렀다. '난 살아남을 거야(I Will Survive)'하고 외쳤던 글로리아는 결국 이렇게 팝 시장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 음반은 미국 시장에서는 지난 2002년 가을 발매된 것이다. 미국 발매반에는 여기 실린 곡들 이외에 브라질에서 레코딩된 'I Will Survive'의 라이브 버전과 스패니시 버전 등이 보너스로 실려있었는데 한국 발매반에서는 제외되었고 그 대신 미국 발매반에는 들어있지 않은 스패니시로 불려진 라틴 넘버 'Pena'가 추가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번 앨범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변화는 그녀의 창법이다. 'I Will Survive'에서 들을 수 있었던 고음의 내지르는 발성에서 벗어나 마치 셰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다소 두터워진 보이스 컬러로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댄스곡들이다. 세련되게 다듬어지긴 했지만 역시 익숙한 디스코 리듬이 관통하고 있는 첫 트랙 'Gotta Be Forever'는 앨범에서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곡. 타이틀 트랙 'I Wish You Love'와 'Gone Too Long', 'Just No Other Way', 'Just Keep Thinking About You', 완연한 복고풍의 'No One Can Love You More', 'All The Man That I Need', 댄스 플로어를 휘어잡은 하이 에너지풍의 'I Never Knew'의 리믹스 버전 등이 그런 댄스 스타로서의 관록을 과시해주고 있는 곡. 하지만 달라진 보이스 컬러만큼 글로리아 게이너가 과거의 영광에만 안주하며 댄스 음악으로만 일관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팝 발라드 버전으로 실린 'I Never Knew', 펑키하기는 하지만 세련된 리듬을 가미해 놓은 'Stronger', R&B 발라드 넘버 'Let It Rain'과 'I'm Here For You', 트렌디한 R&B 리듬이 가미된 'You Keep Running',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라틴 넘버 'Pena'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장치는 적지 않다.
십 수년의, 아니 국내 팬들에게는 거의 20여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돌아온 디스코의 여왕 글로리아 게이너. 예전 레퍼토리를 울궈먹는 식이 아니라 전곡을 신곡으로 채워넣고 그 안에서 나름의 변화의 시도를 모색하고 있는 모습은 진정한 아티스트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자료제공: B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