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파문, 퍼져가는 공감
그의 외모와 태도에선 야성적인 열정이 감지된다. 언제나 안정적인 기교가 균형을 맞춘다. 피아니스트 박종화의 연주를 접하는 무대에서 떠오르는 생각이다.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같은 작품은 깔끔하게 처리하고, ‘전람회의 그림’에선 한없는 에너지로 부풀어 오른다.
2015년 봄, 박종화가 내놓은 화두는 ‘동요’다. ‘엄마야 누나야’, ‘자장가’, ‘꽃밭에서’, ‘섬집 아기’, ‘산토끼’, ‘새야 새야’, ‘과수원길’, ‘아리랑’, '소녀의 꿈‘, ‘우리의 소원‘ 그리고 ’고향의 봄‘... 한국인이라면 제목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제목을 몰라도 한두 소절을 들으면 알 수 있는 정겨운 곡들이다. 박종화는 이들 작품을 다양한 작곡가들의 편곡 버전으로 연주했다. 이흥렬 작곡의 ’섬집 아기‘는 작곡가의 아들 이영조가 편곡했다. ‘엄마야 누나야‘, ’꽃밭에서‘, ’산토끼‘, ’과수원길‘은 나실인이, ’자장가‘, ’새야 새야‘, ’아리랑‘, ’고향의 봄‘은 김준성이 각각 편곡했다.
새 음반에서 박종화는 왜 동요를 연주하게 되었을까? 그에게 물었다.
“30년 동안 한국 이외의 땅에서 살았습니다. 한국에 들어와서도 한국문화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점이 많았죠. 점차 적응해가면서 뿌리를 찾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감정이 점점 커졌어요. 뭔가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하려고 찾던 중에 동요가 들어온 겁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음악으로 나타내려면 국악이 가장 좋은 음악일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한국은 외부의 힘으로 만들어지고 발전하면서 서양이 주도권을 갖게 됐다. 피아노로 국악을 연주하기에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고 음악적으로 어디서 파고들어야 할지 잘 몰랐다는 그의 말이다.
클래식 외에는 노래방에 가서도 한국 노래나 팝, 민요를 전혀 몰랐던 박종화의 생각이 구체화된 것은 2년 전 두 살배기 딸아이의 그림책을 함께 읽어 주면서부터다. 버튼을 누르면 음악이 나오는 유아용 책을 함께 보다가 흘러나오는 동요를 들었다.
“그 중에 제가 몇 곡을 알고 있더라고요. 생각 못한 일이었죠. 어릴 적 한국에서 아버님이 연주해 주던 곡도 기억났어요. 나도 한국인이라서 그렇구나. 뭔가 새로운 계획의 시작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그때 떠올랐죠.”
박종화는 동요를 연주하기로 하고 선곡에 들어갔다. 이해하기 쉽고 사람들도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도록 보편적인 20세기 이후의 동요를 찾았다.
처음에는 클래식 음악 콘서트를 마치고 연주할 앙코르처럼 한두 곡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동요에 대해서 자료를 읽고 연구를 하던 박종화는 동요에 대한 애착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하여 총 18곡을 편곡했는데 이번 앨범에는 그 중 엄선한 11곡이 실렸다.
“동시에 곡을 붙여 동요로 탈바꿈한 것들을 살펴보면 시대의 고통이나 한(恨) 같은 것들도 느낄 수 있더군요. 편곡을 할 때 어떻게 이 컨텐츠를 살릴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가사가 가지고 있는 내용, 출발점이 되는 감정을 고스란히 담는 것이 관건이었죠.”
이번 연주를 들어보면 라흐마니노프나 프로코피예프, 리스트 같은 기교적 작품보다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박종화는 엄청난 어려움을 느끼며 세심하게 작업했다 한다.
“다 아는 멜로디죠. 이걸 풍부하게 구성했는데 단순함을 유지시키면서 감정들을 극대화 시켜야 했죠. 시적인 음악 속에서 시정을 찾아내는 작업이었고요. 폴리포니 처리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연주할 때도 압축된 감정을 왜곡 없이 전달하는 것에 신경 썼고, 모양은 변화됐지만 느껴지는 감정은 동일하도록 만들고 싶었다는 그의 말이다. 피아니스트의 입장에서는 기교의 도전이 아니라 시적인 라인을 어떻게 살리느냐 하는 감성의 과업이었다.
“그 쪽이 피아니스트로서 훨씬 더 가치 있는 작업이었죠.”
세대간 공감, 정체성 찾는 음악
누구나 아는 최강의 멜로디로 무장하고 빼어난 편곡으로 마감한 앨범 수록 곡들의 면면을 보면 만듦새가 일품이다. 작품들은 통찰력이 돋보이는 박종화의 세심한 손끝에서 완성된다.
음반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엄마야 누나야’(김소월/김광수)가 나온다. 마당에 널려있던 하얀 빨래를 휘감던 바람이 코끝에 닿듯 애틋한 추억이 건반 끝으로 소환된다. 모던하면서도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편곡이 돋보인다.
다음 곡 ‘자장가’(김영일/김대현)는 흡사 류이치 사카모토를 연상시키는 전개가 아련하다.
‘꽃밭에서’(어효선/권길상)의 원곡이 시골의 꽃밭을 노래했다면 나실인의 편곡은 현대식 건물 옥상 정원의 예쁜 텃밭을 그린 것 같다.
가장 유명한 선율인 ‘섬집 아기’는 슬픈 정서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편곡되었는데 오히려 그 점이 작품 자체를 더 관조하게 만든다.
‘산토끼’(이일래)는 음반에서 가장 파격적인 곡이 아닐까 한다. 나실인의 편곡은 원곡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산토끼의 움직임을 묘사했다.
가장 오래된 선율이라 할 수 있는 ‘새야 새야’는 점차 격정과 회한이 실린다. ‘과수원길’(박화목/김공선) 역시 밀물과 썰물처럼 감정의 에너지가 이동하면서 단조로움을 막아준다. ‘아리랑’도 김준성의 편곡 덕에 전혀 진부하지 않고 극적으로 전개된다. 김준성의 창작곡인 ‘소녀의 꿈’은 수채화로 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다.
‘우리의 소원’(안석주/안병원)은 뒤로 갈수록 밝고 깜찍해 어둠을 걷어낸다. ‘고향의 봄’(이원수/홍난파)에서 회상이 진행됨에 따라 가슴이 벅차지듯 감정의 파고는 점차 높아지다가 문득 소멸된다.
박종화는 음반의 작품들이 특히 세대간 소통에 힘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다.
“할아버지와 손녀가 함께 듣고, 젊은이들과 30~40대도 들으며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취업도 어렵죠. 참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어르신들도 젊은 시절에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죠. 그럼 좀더 서로를 이해하고 따스한 마음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정치나 경제가 해주기 힘든 세대간 소통과 공감. 어쩌면 음악이 가능케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줄잡아 30년간 고국을 떠나 있었던 음악 유목민(music-nomad) 박종화. 그의 그리움이 배어 있는 연주를 들으며 서로 갈라져 있는 여러 마음들이 음악을 매개로 공감하고 정체성을 찾는 장면을 떠올렸다. 던진 돌이 연못 위에 잔잔하게, 그러나 넓게 파문을 그리듯이.
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음악 칼럼니스트)
1.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작사 김광수 작곡 [4:59]
2. 자장가
김영일 작사 김대현 작곡[3:21]
3. 꽃밭에서
어효선 작사 권길상 작곡 [4:22]
4. 섬집아기
한인현 작사 이흥렬 작곡 [4:25]
5. 산토끼
이일래 작사 이일래 작곡 [2:58]
6. 새야 새야
전래민요 [3:54]
7. 과수원 길
박화목 작사 김공선 작곡 [3:20]
8. 아리랑
경기민요 [3:49]
9. 소녀의 꿈
김준성 작곡 [4:41]
10. 우리의 소원
안석주 작사 안병원 작곡 [2:26]
11. 고향의 봄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