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닌 어느 소년의 현재형 도큐먼트.
한국 재즈계를 돌이켜볼 때, 최근 몇 년 새 벌어진 가장 의미 있는 현상으로 나는 주저 없이 신세대 연주자군의 등장을 얘기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음악인의 저변이 눈에 띄게 넓어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새로운 세대의 존재 자체가 특별할 것은 없겠다. 그럼에도 이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성장 과정에 있다. 크게 세 가지 특성이 눈에 띈다. 첫째, 대략 20대 초반에 걸쳐 있는 이 연주자들은 이미 10대 중후반에 재즈를 자신의 운명으로 선택했다. 빠르게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부터 연주를 시작한 경우도 있다. 둘째, 다수의 재즈지망생들이 선호했던 제도권의 학습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면서도 나름대로 제 목소리를 갖췄다. 셋째, 부모의 역할이나 도움 등, 환경적으로 재즈와 매우 친숙한 여건에서 자랐다.
이들의 윗세대를 형성하며 현재 한국 재즈계의 중심축을 이루는 3, 40대 연주자들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이들과 ‘출신성분’이 다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재즈보다 록이나 팝, 혹은 클래식 음악의 그늘에서 10대를 보냈고 20대 초반에 재즈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해외유학 등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뒤 서른 살을 전후해 데뷔한, 후천적인 환경을 스스로 조성해 재즈의 길을 걷게 된 연주자들이다. 서설이 길었지만, 이렇듯 우리 재즈계의 흐름을 되짚어 보는 것이 이 앨범을 마주하는 데도 적잖은 도움을 준다. 이제 데뷔작을 발표하는 피아니스트 박진영 역시 대표적인 신세대 연주자 중 하나다.
박진영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2009년에 열린 「경향실용음악콩쿨」에서 기악 부문 대상을 수상하면서다. 나는 당시 공개된 채점표에 큰 흥미를 느꼈다. 대상 수상자였던 만큼 전체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당연했지만, 심사위원 간의 점수가 상대적으로 다른 도전자들에 비해 눈에 띄는 편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건대 나는 이 결과가 피아니스트 박진영의 현재를 엿보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이미 세상에 등장하던 순간부터 그의 연주는 논란의 대상이 될 만했다. 물론 재즈는 선택의 음악이고, 하나의 잣대로 모든 스타일을 가늠하는 태도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치부된 지 오래다. 결과적으로 얘기하면, 일반 재즈 팬들도 박진영의 데뷔작에 대해 엇갈리는 반응을 보일 수 있겠다.
박진영의 진가가 비로소 빛을 발한 계기는 2009년 10월에 열린 「제3회 자라섬 국제재즈콩쿨」을 통해서였다. 그는 이 경연에서 높은 창의력을 인정받아 2등에 해당하는 ‘베스트 크리에이티비티(Best Creativity)’를 수상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명실상부한 우리 재즈계의 대표적 신인등용문으로 자리한 이 콩쿨은, 서두에서 언급한 신세대 연주자들의 존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현재 클럽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 중인 젊은 연주자 중 적지 않은 수가 그 결선에 진출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미 재즈 팬들에게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는 베이시스트 김인영, 피아니스트 윤석철, 기타리스트 한운기, 색소포니스트 신명섭 등이 그들이다. 박진영 또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스타일의 연주자란 면에서 특히 시선을 끌었다. 그가 자라섬 국제재즈콩쿨의 결선에서 연주했던 곡 중 하나가 이 앨범의 세 번째 트랙으로 수록된 ‘Praise’였다.
[Graceful River]는 마치 하나의 긴 곡처럼 들린다. 서두와 말미에 ‘Prologue’와 ‘Epilogue’를 배치한 사실을 제쳐두더라도, 두 번째 곡 ‘Praying’과 세 번째 곡 ‘Praise’가 하나의 연작으로, 또한 네 번째 곡 ‘King of Spade’에서 여덟 번째 곡 ‘Jack of Club’까지가 또 다른 연작으로 묶여 있다는 점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말이다. 박진영은 자신의 창작곡만으로 준비한 데뷔작에서 일관된 정서와 뉘앙스를 통해 탄탄한 구성미를 드러내려고 애썼다. 그리고 앨범 전체가 마무리될 때까지 쉽사리 멈춤 버튼을 누르기 힘들 정도로 그의 의지는 충분히 빛을 발했다. 그 근간에는 잘 엮인 감성의 흐름이 큰 역할을 했는데, 결국 이를 통해 박진영 개인의 정서와 개성을 각인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그의 연주는 앨범 전체의 그것 뿐 아니라 하나의 곡 안에서도 아기자기한 흐름을 보여줄 때가 많아 이를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듣는 이들은 적잖은 흥미를 느낄 법하다.
오늘날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아직도 프레이징(phrasing)과 보이싱(voicing)에 집착하고 있는 반면, 박진영의 연주는 ‘질감(texture)’에 있어서 다른 이들과 구별된다. 이제 단 한 장의 앨범을 발표했을 뿐이지만, 우리 재즈계의 흐름을 무대 앞에서 직접 관찰해온 이들이라면 이미 박진영의 손길이 어떤 형상을 띠고 있는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외견상 그의 연주에서 클래식 음악의 향취가 함께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의도가 됐든 나는 이처럼 상투적이고 무책임한 관찰을 경계하고 싶다. 아직 완성형의 피아니즘을 드러내지는 못했으나 분명 박진영에게는 그만의 세계가 자리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가 도달할 종착점은 현재 우리가 ‘포스트 모던’이라 부르는 그 어느 곳에 가까울 것이라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관심이 또 하나의 전형이나 스타일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는 자기 자신이 느끼는 것을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연주자다.
박진영의 강한 자기정체성은 앞으로 동전의 앞뒷면 같은 정반대의 양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자신만의 색채를 갖지 못하는 연주자가 절대 다수라는 현실을 생각하면 분명 든든한 발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세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스스로 만든 굴레에 묶여버리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후자의 우려가 하찮은 노파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는다. 근거는 두 가지. 무엇보다 그는 스펀지와 같은 감성을 지녔다. 주변의 많은 것을 빨아들여 소화해내는 데 능하며, 동시에 스스로의 모양새를 무너뜨리지 않을 만큼 적절한 고집과 주관적인 시선을 지녔다. 어떤 이들은 그를 이야기할 때 섬세하면서도 화려해 보이는 연주에 방점을 찍고 싶어 하지만, 나는 되레 반대의 인상을 갖고 있다. 그의 연주는 치밀하고도 솔직하다. 아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빠뜨리지 않고 얘기하지만, 아직 체득하지 못한 것을 어설프게 들먹일 만큼 뻔뻔하진 않다.
박진영에 대한 신뢰의 가장 큰 근거는, 그의 작곡 역량이다. 지난 2009년 11월에서 2010년 1월 초까지, 나는 개인적으로 박진영과 매우 소중한 추억을 함께했다. 그가 EBS 스페이스 공감의 특별기획 「얘들아, 재즈를 부탁해 - 미래를 짊어진 한국의 재즈 악동들」의 무대에 서게 된 것이 계기였다. 몇 차례의 리허설을 거치면서, 그 때마다 그가 들고 온 악보에는 매우 인상적인 스타일의 곡들이 담겨 있었다. [Graceful River]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King of Spade’와 ‘Queen of Heart’도 바로 그 때 알게 된 곡들이었다. 멜로디의 진행만으로도 꽤 신선했지만, 그 안에 깃든 풍부한 상상력은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길 만큼 매력적이었다. 당시 마포의 어느 비좁은 연습실에서 ‘King of Spade’의 도입부를 듣던 순간, 나는 이 곡을 만들게 한 이성과 감성이 앞으로 우리 재즈계의 한 획을 그을 것이란 직감을 갖게 됐다. 음악을 듣는 것이 업인 이에게, 그보다 기쁜 순간은 결코 많지 않다.
그렇다고 [Graceful River]에 그 역사적 순간이 담겨 있다며 과찬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직도 박진영은 가야할 길이 멀고 체득해야 할 것이 산더미다. 단적으로, 현재의 탁월한 작곡 실력을 충분히 보완할 만한 연주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 앨범이 발표되면, 사람들은 그의 수려하고 말끔한 연주에 점수를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그의 솔로들은 작곡이 내포한 가능성을 오히려 제한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어쩌면 그 스스로, 자신의 곡이 얼마나 큰 잠재력을 지녔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아쉬운 점이 적지 않은데도 끝까지 그에 대해 신뢰를 놓지 않는 것은 앨범 곳곳에 드리운 그의 진지한 시선 덕분이다. 박진영은 앞으로 그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걸 얻기 위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Graceful River]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박진영이 현재의 자신을 담아 세상에 내놓은 소중한 시금석이자 도큐먼트다. 그의 나이, 만으로 이제 갓 열아홉이다. 청년이라는 말보다 소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아직도 그는 삶 속에서 보고, 듣고, 견뎌야 할 것들이 많다. 때로는 힘든 방황과 갈등의 시간이 뒷목을 움켜쥔 채 그를 희롱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믿는다. 이 모든 가치들이 결국 박진영의 작곡과 연주에 녹아들어 다른 데서는 맛볼 수 없는 감동을 느끼게 할 것임을. 그게 언제일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 결과가 ‘킹’일지, ‘퀸’일지, ‘클럽’일지, 아니면 그저 낮은 숫자에 불과할지도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 걱정 없이 무작정 기다려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주저하지 않고 아낌없이, 그에게 패를 던진다.
김 현 준 (재즈비평가. 저서로 『김현준의 재즈파일』과 『김현준의 재즈노트』가 있으며, 마일즈 데이비스와 쳇 베이커의 평전을 번역했다. 현재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위원, 월간 재즈피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