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현 피아노 소품집 [피아노의 숲]
이 앨범의 북클릿에는 다섯 장의 엽서가 동봉되어 있다. 각각의 엽서에는 전민수 작가의 나뭇잎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마치 오래된 책장을 정리하다가 발 밑으로 떨어진 말린 나뭇잎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책갈피에 나뭇잎을 끼워 놓았던 것이 언제였지? 어느 해 가을, 어디쯤에서 주웠던 것이었지? 곰곰이 기억을 떠올리다가 결국 그 아이의 얼굴을 기억해 내고야 만다.
눈이 작고 해맑은 피부를 가진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CD는 아마도 3번이나 4번 트랙으로 넘어가 있을 것이다. 북클릿의 나뭇잎 엽서들과 고즈넉한 피아노 연주는 같은 역할을 한다. CD를 트레이에 넣고 플레이 하는 순간 복잡한 세상의 사건들이 일순간에 삭제되며 뇌하수체 뉴런들은 오래된 기억들을 헤집으며 그 때, 그 아이를 찾게 된다. 이렇게 순식간에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이 세상에 오로지 음악 밖에 없다.
안정현의 연주는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최적화 되어 있다. 과장하지 않지만 진한 감성이 타건 하나하나에 오롯이 살아 있다. 피아노 연주곡들이 종종 그런 기능을 하긴 하지만 안정현의 경우는 그런 공감이 조금 더 강하게 발휘된다. 이것은 간결한 멜로디 사이를 연주하는 노련한 터치가 선사하는 힘이다.
안정현은 80년대 중반부터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였다. 90년대 초반에는 한국최고의 훵키록(funky rock) 밴드 사랑과 평화의 키보디스트로 활동하며 1995년 [Acoustic Funky] 앨범에 참여하였다. 사랑과 평화는 당대 최고 뮤지션들의 집합체였다. 안정현의 노련한 터치는 이미 오랜 세월 음악 활동으로 다져진 고수의 것이다. 이후 안정현은 기타리스트 최이철의 음악적 동지로 수많은 공연을 함께 해 왔다. 2010년에는 최이철, 엄인호, 주찬권이 결성한 프로젝트 밴드 슈퍼세션에서 격정적인 하몬드 올갠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연륜의 뮤지션 안정현의 첫 번째 앨범이 여백 많은 피아노 연주곡이라는 것이 조금 의외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추억속의 집’이나 ‘너를 느낄 수 있어’는 사랑과 평화의 곡들 중에서도 팝퓰러한 센스가 돋보이는 웰메이드 발라드였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런 깊은 서정이 낯설지 않다. 오히려 더욱 진실하게 다가온다. 화려한 조명을 받는 무대 위에서 내려와 홀로 피아노 앞에 앉은 소박한 그의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뻔한 것 같아 말하기 부끄러워 각자의 깊은 곳에 그저 간직하고만 있는 사람들이 있다. 피아니스트 안정현의 노련한 진심은 우리 스스로 그것을 꺼내도록 만든다. 주말 드라마처럼 통속적이더라도 각자에게 소중하고 울창한 나뭇잎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생각보다 커다란 음악의 힘이다.